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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수필과비평 2014년 2월호, 세상마주보기] 할머니라는 호칭 - 김상환(동백)

신아미디어 2015. 1. 30. 09:06

"늙어가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늙지 않고서야 어찌 삶에 대한 지혜와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겠는가. 크게 이루어 놓은 것은 없으나 이만큼이라도 살 수 있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모두가 젊음을 투자하여 얻어진 결과이기에 소중하게 생각하고 감사해야겠다. 오늘도 “할아버지!” 하고 달려오는 쌍둥이 손자들 덕분에 내 마음은 새로운 봄을 맞는다."

 

 

 

 

 

 

 

 할머니라는 호칭       김상환(동백)

   “할머니 소리는 듣기 싫어요. 그렇지만 손자 손녀들이 불러 줄 때는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팔순을 바라보는 분이 하는 말이다.
   옛날에는 할머니라고 하면 얼굴에는 주름이 쭈글쭈글하고, 하얀 머리에 비녀 꽂고, 눈도 잘 안 보이고, 입은 치아가 다 빠져 합죽하고, 허리까지 굽어서 지팡이를 짚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그런데 요즘 이런 모습의 할머니는 없다.
   이제 장수시대를 맞이하여 ‘인생 이모작’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젊었을 때 못다 한 꿈을 이루며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분들이 많다. 그래서 나이가 많은 사람은 있으나 노인은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노년을 활기차게 살아가는 분에게 “아직 중년으로 보입니다.”라고 말하면 대부분이 기분 좋아하신다. 중년의 사전적 의미는 청년에서 노년의 단계에 이르는 때를 말한다. 1960년대 평균수명이 53세였을 때 40세를 중년이라고 했다. 이제는 평균수명이 100세 시대에 가까워졌으니 6~70세가 바로 중년에 해당한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알고 보면 할머니란, 어머니의 어머니라는 뜻의 호칭이지 늙은이라는 말은 아니다. 나는 노인이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지만 할아버지라는 말은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할아버지라는 말 또한 할머니와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아버지에 대한 호칭이다. 아버지란 한 가정의 대표이며 대를 이어서 거슬러 올라가면 단군성조이다. 어느 종교에서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가. 그러니 우리 인생에서 최고의 호칭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이름을 불러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내가 아직 말도 못할 때 세상을 떠나셨다. 출상하던 그날이 나는 무슨 잔칫날인 줄 알았었다. 훗날 철이 들어서 생각해 보니 할머니가 당신 무릎에 나를 앉혀놓고 꼬막을 까주면서 눈물을 흘리셨던 그날이었다.
   어린 시절 나는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기 때문에 어머니는 지나칠 정도로 엄하셨다. 대신 할머니가 나의 모든 투정을 다 받아 주었다. 그런 할머니가 여든의 연세가 되어 중풍으로 여러 해 동안 기동을 못해 대소변을 받아 냈다. 그때도 나는 할머니 품에서 마른 젖을 만지며 잠을 잤다. 대소가 어른들은 그런 나를 보고
   “저 아그는 함무니한테서 냄새난 줄도 몰라야.” 하셨다.
   할머니의 냄새가 나에게는 향수 냄새보다 더 좋았다. 쭈글쭈글한 젖가슴은 내 마음에 평화와 행복의 문을 여는 단추였다.
   어린 시절 나에게 할머니의 포근한 사랑은 그 무엇으로도 대체 할 수 없는 따뜻한 봄 햇살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철이 없어 그 깊고 넓은 사랑을 그저 당연하게 생각했다. 죄송스럽게도 그 고마움을 잊고 살아오다가 이제 나도 할아버지가 되어서야 겨우 할머니의 사랑을 조금 알게 되었다.
   부모는 자식을 어떻게 키워야겠다는 목표를 두고 절제된 사랑을 주지만 할머니 할아버지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준다. 더욱이 핵가족 시대에서는 손자들이 보고 싶어도 가뭄에 콩 나듯 볼 수 있으니 소나기 사랑을 주게 된다.
   그런데 대부분이 친할머니보다는 외할머니 사랑을 더 각별하다고 말한다. 옛 속담에도 ‘외손자는 등에 업고 친손자는 걸린다.’ 하였다. 또 ‘친손자에게는 보리밥 누룽지를 주고 외손자에게는 곶감을 준다.’고 했다.
   독일의 카셀대학 심리학교수가 설문조사를 해본 결과에 의하면 가장 친근하고 영향력을 많이 준 친척으로 외할머니를 꼽았다. 또 영국 런던대학과 미국의 워싱턴대학에서는 ‘외할머니와 함께 자라는 영아嬰兒의 사망률이 절반 정도 낮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요즘 손자들을 대하는 아내를 보면 외할머니의 사랑이 보인다. 어머니의 어머니이니 그 사랑 또한 곱빼기이다.
   아내는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며칠 전에 퇴원을 했다. 아직 완쾌되지도 않았는데 여섯 살짜리 쌍둥이 외손자들이 온다고 하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일 년 전에 수술 받은 허리까지 완전치 못한 사람이 손자들이 좋아하는 반찬과 간식거리를 사러 간다고 나섰다. 어쩔 수 없이 나도 짐꾼을 자처하여 따라나섰다.
   귀한 손님이라도 맞이할 사람처럼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바쁘게 서둘더니 손자들을 보자 봄비 맞은 새싹처럼 생기가 넘친다. 이 세상에 어떤 명약이 저보다 더 효능이 뛰어나랴 싶다.
   늙어가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늙지 않고서야 어찌 삶에 대한 지혜와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겠는가. 크게 이루어 놓은 것은 없으나 이만큼이라도 살 수 있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모두가 젊음을 투자하여 얻어진 결과이기에 소중하게 생각하고 감사해야겠다. 오늘도 “할아버지!” 하고 달려오는 쌍둥이 손자들 덕분에 내 마음은 새로운 봄을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