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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인간과문학 2014년 봄호, 특집 : 연변문학 수필] 희망, 그 작은 산과 큰 산의 계곡 - 류일복

신아미디어 2015. 1. 22. 09:33

"내일은 정말 아버지도 가 뵈울 겸 아버지의 아버지의 산에 딸애를 데리고 다녀와야겠다. 고향 뒤 산에 누워 두만강을 바라고 솟은 할아버지 산에 가서 절을 올려야겠다. 세살 때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 세 살 난 딸애에게 벙어리 할아버지가 부끄럽지를 않게 하고 증조할아버지의 태고연한 산 앞에서 감사함을 배워줘야겠다."

 

 

 

 

 

 

 희망, 그 작은 산과 큰 산의 계곡        류일복

 

 

어제 아이를 데리고 동물원에 갔었다.
오늘 아이를 데리고 백화상점에 갔다.
그러나 내일 아이를 데리고 할아버지 산에 갔다 올 예정이다.

 

   우리 아이는 온갖 행복을 누리면서도 행복한 줄 모르고 만족할 줄 모른다. 아무리 잘 해주어도 이것도 저것도 트집이고 강떼도 부리며 울기를 전설의 “바보온달과 평강공주”의 평강공주보다도 더 한다. 철없는 세 살 난 딸애는 세상의 보이는 것은 다 만져보고 가지고 싶은 것은 다 갖기를 원한다. 부모 된 우리도 아이 욕심 그릇이 넘쳐 나지 않도록 맹렬히 제한할 생각도 하지만 될수록 아이가 원하는 뭐든 다 이루어 주고 소원성취 해주고 싶다.
   내 어렸을 적 소망하던 것을 소망대로 소망답게 못 이루었던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더는 내 아이에게 와서 아프게, 원망하게, 미련이 남게 하지 말자는 현념으로 내 분신의 아이를 위해서 어머니 된 아내나 아빠가 된 나나 최선을 다 한다.
   아이가 있는 모든 부모 마음이 그렇듯 기억의 먼 강을 거슬러 나의 아버지 년대에도 그랬을까? 자식을 위해서 뭐나 다 이루어주기 위해서 살진 않았을까? 아버지가 나를 키우고 내가 딸애를 키우는 연대가 몇 십 년 차이가 있듯 어려웠던 그 세월에 내가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이면 뭐든 가지게 하고 싶었지만 마음뿐이지 않았을까?  그것 때문에 빈 집처럼 아버진 그렇게 고통을 가슴에 숨기고 살진 않았을까?
   나의 아버지는 누구처럼 빛나게 산 인생도 아니고 평범하게 산 인생에도 못 미치는 민초로 밤낮 침묵하고 살고 있는 산처럼 살아 온 벙어리 장애인 인생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아이를 지나 젊은이가 되도록 동물원 구경을 한번 해준 적도 없었고 백화상점에 가서 새 신발 한 켤레 사준 적도 없었다.
   큰 아버지 생전 말씀에 따르면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두만강 넘어 같은 처지인 어머니를 등에 업어와 가정을 이루어 주기 전에는 30을 훌쩍 넘긴 노총각이었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장애인이었던 아버지의 결혼을 염두에 두고 달 밤 사품치는 깊은 두만강도 서슴지 않고 넘어 며느리감을 구해왔던 것처럼 아버지는 또 우리 자식에게 해준 것이 무엇이며 내리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가난이 어머니탓인 듯 평생에 술 마시고 잘 싸워 오는 한편 우리 세 아들 자식에게 큰 공부도 못해주고 아무런 재산도 남기지를 못하고 늙어 갔다. 어머니를 뇌출혈로 고향 뒷산에 먼저 묻어 놓고 맨 주먹뿐인 아들들이 자수성가하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고 외롭게 얹혀사는 신세가 된 아버지, 세월에 따라 운명에 맡겨져서 조용히 외롭게 허위허위 80세로 살아 오셨다. 또 친척 친우도 별반 없었던 아버지는 그렇게 원형의 모습 그대로 살 수 밖에 없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 자식에게는 아니었다. “병신 새끼”라는 설음을 지니게 했고 어머니와 우리 자식들에게 온갖 생활고를 겪으며 외로운 아이로 자라게 한 설음과 아픈 동년을 지니게 했다.
   그러나 아버지처럼 자식을 둔 아빠가 된 지금 아버지의 저문 들녘 같은 황혼기를 바라보면서 이해를 하고 달리 사색하게 된다. 아버지는 우리 인생에서 삶을 주었다는 그 자체부터 가장 값진 재산이었고 남보다 특별한 인생을 주었다.
   홀로 외줄타기를 하는 서커스단 아저씨처럼 강인하고 인내를 가진 독립성이 큰 아이들로 자라나도록 했다. 아무렇게 내쳐진 아이들이 고생을 알면서부터 삶의 욕구를 강렬히 느끼고 그 과정에서 인생을 정복하는 희열을 통감하듯 세 형제가 서로 부축하고 기대면서 각각 결혼을 하고 이젠 건강한 아이를 가진 아버지가 되어서 아버지를 시름 놓게 했다. 형제 중 막내인 나도 고향인 두만강 변을 떠나 몇 천리 타향인 머언 산동에 와서 출근하고 그 와중 내 마음 같은 여자를 만나 나도 노총각 나이였지만 결혼을 하고 둘이서 벌어 모은 돈으로 자그마한 집 한 채도 마련했다. 여유가 조금씩 생기면서 아이도 낳았다. 아이가 우리 민족어로 말을 번지기 시작하면서 가슴으로 졸였던 부모의 유전으로 인한 상실이 가뭇없이 사라졌고 부모에 대한 고마움과 감개가 커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고개를 기웃거리지 않고 오직 한 곳만을 바라고 내 평범한 인생을 살기 위해 열정을 안고 달려온 어느날 문득 아이를 데리고 고향에 계신 아버지를 뵈러 가야겠다는 집념이 가슴 깊이 파고들게 했다.
   아이 키는 자라날 때 아버지 등은 점점 휘어져 간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나는 이것이 운명이라는 생각을 감질나게 했다. 한줌 흙이 되기 전에 막내동이의 딸애를 안아 보고 싶다는 아버지를 가 봐야 하는 것이 숙명으로 내 가슴을 무겁게 누르면서 뭘 하는 동안 내내 편치를 않게 했다. 오늘의 삶을 주었길래 내 아이의 삶도 있었고 그렇게 인생은 줄다리기 아닐까 하는 아름다운 환원답습을 생각하면서 난 고향의 하늘을 쳐다보기 일쑤였다. 퇴물림 아닌 대물림으로 인생의 소명을 다 하면서  큰 산과 작은 산의 계곡엔 쑥밭이 아닌 찬란한 희망이 두만강의 끊임없는 흐름처럼 연연히 뻗어 있었다. 늙은 나무가 죽은 후 그 뿌리 곁에서 새 싹이 돋아나듯이 산은 언제나 그렇게 희망과 생의 희열로 부풀고 차고 넘쳐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는 헛살지 않았다. 류씨 가문의 대물림을 지속해 왔다는 것만치 거창한 작업이 더 있을까?! 자식된 우리는 그것을 본연으로 더 잘 살아오기 위한  그라프를 그렸을 뿐이다.  
   내일은 정말 아버지도 가 뵈울 겸 아버지의 아버지의 산에 딸애를 데리고 다녀와야겠다. 고향 뒤 산에 누워 두만강을 바라고 솟은 할아버지 산에 가서 절을 올려야겠다. 세살 때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 세 살 난 딸애에게 벙어리 할아버지가 부끄럽지를 않게 하고 증조할아버지의 태고연한 산 앞에서 감사함을 배워줘야겠다.

 

 

류일복  ------------------------------------------

   1971년 6월 6일 중국 화룡시 숭선촌에서 출생. 단편소설 〈형을 불러 본다〉, 〈서로의 변수〉 등 다수. 화룡시방송국 기자, 문예편집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