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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수필과비평 2014년 2월호, 테마수필: 여성이야기] 아픔의 무게 - 김인호

신아미디어 2015. 1. 12. 16:56

"“당신이 겪는 일평생 통증을 무게로 잰다면 얼만큼이나 될까?” 아픔으로 덧칠한 아내의 일생은 아픔의 메아리였다. 또 아픔과의 타협이었다. 연애시절 설레게 했던 그 미소, 순수하고 정갈했던 그 모습이 아픔의 흔적으로 일그러져 버렸다. 고통苦痛의 잔상 탓이다. 아내가 웃는다. 쇠락한 낙엽처럼 차라리 애잔하다. 잊힌 통증들이 다시 가지를 치면, 아내는 손끝에 맺힌 작은 아픔 하나로 겨울 긴 밤을 불면으로 지샐 것이다. 마약성 진통제라도 쓰고픈 나의 의도를 한사코 거부하며 아내는 기도한다. “깃털만 한 행복이 지루한 삶을 이겨 내듯, 고요한 영혼으로 일그러진 육신을 추스르겠다.”는 아내의 작은 소망은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 아픔을 맑게 풀어주지 못하는 의사로서 나의 존재가치가 한심스러울 뿐이다."

 

 

 

 

 

 

 아픔의 무게        김인호


   아픔을 느끼는 중추가 있다. 중뇌 깊숙한 곳 ‘달라무스’의 돛단배 모양 신경섬유 집단이다. 이곳은 마음과 영혼의 아픔보다 신체 조직의 모든 통증을 총괄한다. 나는 가끔 이 중추가 없다면, 인간의 삶은 훨씬 행복할 수 있었을 텐데 하며 의문표를 던진다. ‘왜 신은 아픔으로 인간 스스로 괴롭히는 느낌을 갖게 했을까.’ 때로 원망스러울 때가 많다.
   60대 중반인 요즘까지 아내가 겪어 왔던 아픔들, 뒤돌아보면 그것은 아내가 지나온 삶의 동반자였다고 본다. 어쩌면 이는 여생을 같이하며 끝까지 갈는지도 모른다. 아픔은 살아가며 누구나 어디서나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아픔의 크기는 각기 달라 그것의 느낌과 반응에 따라 특유하게 표출되며, 또 그것은 때로 숨길 수 없는 괴로운 고독이며 아픈 사람만이 알고 있는 슬픔일 때도 있다.
   “어깨와 허리가 아파 한 숨도 못 잤어요.” 부스스한 얼굴로 거실을 건너 부엌으로 어정쩡히 걸어가며 말하는 아내를 힐끔 쳐다보고 나는 조간신문을 뒤적인다. “제 말 들었어요?” 인삼차를 타 오면서 다그치나 짐짓 모른 체한다. “이젠 아예 무시하는군요!” 금세 토라지며 돌아선다. 내심 나의 무관심이 좀 지나치다 여겼지만 “그 정도의 아픔은…….” 이제 별 대수롭지 않다는 표시였다. “잠을 못잘 정도로 아팠다구?” 하며 어깨나 허리를 안마라도 하게 되면 나는 출근을 또 허겁지겁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 의도적인 나의 무관심에 아내도 이제는 대충 넘어가고 있다. 그러나 나의 이런 무관심이 대장간의 도낏자루 썩는 양 크게 후회 된 적이 있어 아픔의 부위와 크기에 따라 내 나름 잣대가 정해져 있다.
   결혼 후 아내의 아픔은 복통으로 시작했다. 엉뚱하게도 아내는 그 복통이 처녀시절 연탄가스 중독사건 후에 생겼다고 믿고 있었다. 의식불명 상태에 산소탱크 치료 후 수혈까지 받았는데 그때의 피가 불결하였고, 그것이 피부 발진과 복통을 유발하였다는 것이다. 그 강박증은 꽤 심각하여 복통을 소식과 채식으로 해독시킨다고 노력했다.
   내가 본 병리생태는 전혀 아니었지만, 복통은 한번 나타나면 선통仙痛처럼 숨도 못 쉴 정도였다. 소화 장애로 헛배가 부르고 구토도 했다. 30대 여자의 복통을 감별 진단하려 여러 질환을 검사했으나 번번이 아니었다. 진경제鎭痙劑 등으로 대응했던 그 아픔은 임신 중 뜨악했는데 출산 시 산통産痛과 오버랩 되며 더 격심하게 나타났다. 그때는 나도 대신할 수 없는 여자의 업보라 여겼지만 유독 과민하게 나타나, 분만 의사도 하얗게 밤을 지새우도록 했다.
   분만 후의 변비가 야기하는 복통 역시 악성이었다. 항상 배를 움켜쥐고 지내기 일쑤였다. 생리통 역시 쩔쩔 매더니 생리량도 늘어나 빈혈마저 생겨 안색이 창백했다. 게다가 배란통도 또한 무시하지 못했다. 고통으로 얼룩져 괴롭고 어두운 표정이 한 달 생활 중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나름 여러 진통제로 순간을 넘겨가며 생활하던 중 통증의 근원지가 결국 ‘자궁내막증’으로 결론지었다. “괜찮아……. 신경성일 거야. 스트레스 갖지 마…….”라고 무시해 왔던 나는 그동안의 나의 무관심과 무지함을 자책하였다. 소아과의사 남편이기에 오히려 더 고생시킨 꼴이 된 셈이었다. 결국 아내는 여자 40대 초에 자궁과 난소를 적출하는 수술을 받게 되었고 그 후 그토록 괴롭히던 복부 통증은 사라졌다. 그 대가로 갖고 싶던 딸을 갖지 못했고 난소호르몬 대체 약은 지금까지 복용하고 있다.
   아내는 순발력이 좋아 테니스, 스쿼시, 탁구 등 구기운동을 잘했다. 게임을 해본 파트너들이 이구동성으로 힘들이지 않고 유연한 터치 때문에 힘으로 밀어붙이는 플레이어는 이길 수 없다고 할 정도였다. 자전거도 잘 타서 새벽안개를 뚫고 집 앞 올림픽공원길을 달리곤 했다. 헬스도 열심히 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둘째가 초등학교 입학할 즈음, 두통과 어깻죽지가 아프다며 파스를 붙이곤 했다. 운동 탓이리라 여겨 모든 게임을 끊고 스트레칭 위주로 했으나 목 어깨 통증은 점차 심해졌다. 한 밤에 “날갯죽지를 끊어 내고 싶다.” 하며 불면증까지 일으켰는데 ‘목 디스크’가 원인이었다. ‘경추 견인 물리치료’를 추천하여 거실코너에 그 기능 의료기를 장착한 의자에 앉아 조석으로 독서 겸 목을 천장으로 당기는 물리치료를 꾸준히 해 왔으나 호전되지 않았다. “선배님! 사지가 마비될 정도로 디스크가 터지기 직전입니다.” 하며 경고하는 신경외과 후배의사의 호들갑에 눈 내리는 겨울 크리스마스이브 날, 6, 7번 경추에 티타늄을 대체하는 수술을 받았다.
   그때도 그랬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의사남편을 믿고 견인하며 기다린 아픔이 아플 것은 다 아프고 수술한 셈이 되었다. 그 아픔은 수술 후 좀 경감되긴 하였지만 아직도 아내를 괴롭히고 있다. 아내의 척추근골격의 병변이 과격한 운동 탓인지 퇴행성 병변 때문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50대 중반부터는 이제 요통으로 시달리기 시작했다. 내 추측으로는 그때쯤 북한강변 전원주택으로 이사를 하였는데 꽤 큰 잔디정원을 가꾸며 잡초 뽑기로 정성을 쏟은 후유증일 것으로 본다. 그것도 ‘요추디스크’였다. 엉거주춤하며 걷는 모양과 새우등처럼 웅크리고 잠자는 형상, 끙끙거리며 무릎 짚고 일어서는 것은 영락없는 시골 할머니 모습이었고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픔을 호소할 때는 곁에 있는 내가 안타까웠다. “요추에 두 개, 미추연결 부위에 한 개가 문제인데 한 번에 세 군데를 못하고 우선 위 두 개만 먼저…….” 수술은 안 한다며 버티는 아내를 달래 결국 허리에 티타늄 두 개를 또 심었다.
   출국심사대의 금속 탐지기에 걸려 “내 몸은 철인이에요.” 매번 설명하는 해프닝도 생겼다. 그런데 아직도 꼬리뼈 하나가 삐져나와 있어 요통은 끝나지 않았는데 그 아픔은 그곳에 진통 마취제를 직접 주입하여 6개월 정도 견디도록 처치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거실에는 대형 고무공, 인도의 자연등받이치유기구 ‘쿠룬타’, 자동마사지기 등이 즐비하다. 운동치료사 지침 따라 아내 스스로 스트레칭을 하며, 유산소 걷기, 복근과 척추배근, 옆구리 근력운동 등을 빠짐없이 하는 것을 지켜보면 안쓰럽기까지 하였다. 근력으로 골격을 보강해 보겠다는 뜻이었다.
   아내가 66회 생일을 넘긴 연말 밤, “여보! 손목이 부었어요!” 하며 손을 내미는데 나는 깜짝 놀랐다. 주름 진 손을 볼 때마다 연애 시절 윤기 나던 고운 손이 연상되어 심란할 때가 있었으나 손가락은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양쪽 엄지 손마디가 부어오르고 엿가락처럼 ‘C’자 모양으로 휘어져 있었다. 느낌으로 일견 류머티스 관절염이었다. 노후 전신 관절마디에 건드릴 수 없는 통증을 유발하는 자가면역自家免役질환이다. 이 통증은 신경마디를 짓누르는 칼날 같은 아픔이 온다. 나는 안다. 이 병세는 이제 마디마디에서 큰 관절로 파급될 것임을. 이 아픔은 이제 끝까지 아내를 괴롭히며 동행할 것임을……. 그래서 한편 두렵기도 하다. “여보! 정말 많이 부었네! 아팠겠구먼……! 왜 일찍 보여 주지 않았어?” 하며 얼음찜질하고, 파스를 잘라 감아 주자 아내는 의아한 듯 쳐다본다. 아픈 부위와 색깔만 다를 뿐인데 왜 이렇게 과민하게 반응하느냐는 아내를 가만히 감싸며 혼잣말처럼 물어 본다.
   “당신이 겪는 일평생 통증을 무게로 잰다면 얼만큼이나 될까?” 아픔으로 덧칠한 아내의 일생은 아픔의 메아리였다. 또 아픔과의 타협이었다. 연애시절 설레게 했던 그 미소, 순수하고 정갈했던 그 모습이 아픔의 흔적으로 일그러져 버렸다. 고통苦痛의 잔상 탓이다. 아내가 웃는다. 쇠락한 낙엽처럼 차라리 애잔하다. 잊힌 통증들이 다시 가지를 치면, 아내는 손끝에 맺힌 작은 아픔 하나로 겨울 긴 밤을 불면으로 지샐 것이다. 마약성 진통제라도 쓰고픈 나의 의도를 한사코 거부하며 아내는 기도한다. “깃털만 한 행복이 지루한 삶을 이겨 내듯, 고요한 영혼으로 일그러진 육신을 추스르겠다.”는 아내의 작은 소망은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 아픔을 맑게 풀어주지 못하는 의사로서 나의 존재가치가 한심스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