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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계간문예 2014년 봄호, 단편소설] 매듭과 사슬 - 손영목

신아미디어 2014. 12. 17. 17:27

『계간문예』에서 '손영목'님의 단편소설 '매듭과 사슬'을 소개합니다.

 

 

 

 

 

 

 

 매듭과 사슬        손영목

 

   해안도로에서 그 집으로 통하는 진입로는 승용차 한 대가 편도로 이용할 너비밖에 되지 않았다.
   절벽의 울퉁불퉁한 굴곡에 순응하며 오른쪽으로 약간 비스듬히 굽은 하향 30여 미터 정도인 그 길을, 주혁은 작은 손전등의 빈약한 불빛에 의지해 조심조심 걸어 내려갔다.
   집 안의 개가 인기척을 알아채고 냅다 짖어대기 시작했다. 당혹감이나 거부감보다도 오히려 그 소리가 반가웠다. 번거롭고 곤란한 절차를 생략하고도 자기 출현이 집주인에게 알려질 터이므로. 개는 육중한 철제 창살 대문 안에서 우왕좌왕하며 계속 짖고 으르렁거렸다. 누렇고 커다란 놈이었다. 손전등 불빛이 약한데다 대문창살 때문에 식별이 잘 안 되지만, 아마도 셰퍼드 같았다.
   그가 대문 앞 2미터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을 때, 꽉 막힌 어둠의 공간을 흠집 내며 전등 여러 개가 갑자기 켜졌다. 이제야 그는 방금 자기가 지나온 길, 진입로 초입에서 대문 앞까지에 드문드문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운치 있게 바위틈을 잘 이용한 외등이 대여섯 개 설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가 자기 머리 위쪽에 설치되어 있는 감시카메라를 의식하는 순간, 대문 기둥의 인터폰 스피커가 제구실을 하기 시작했다.
   “거기, 누구십니까?”
   울림이 차분한 중년 남자의 음성이었다.
   주혁은 조급하고 다소 높은 목소리로, 근처를 지나가다가 약간의 충돌사고에 차가 고장이 난 바람에 도움을 청한다고 사정 조로 설명했다. 아울러 자기는 신문기자라고 신분을 밝히며, 얼른 패스포트를 꺼내 감시카메라 렌즈 쪽으로 신분증을 들어 펼쳐 보였다.
   인터폰이 ‘딸각’하는 소리를 남기고 침묵하더니, 대문 안쪽 정원 여기저기 외등이 켜졌다.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개성적으로 멋들어지게 잘 지은 이 층 양옥의 윤곽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현관이 열리고, 갈색 가운을 걸친 남자가 나타났다. 얼핏 봐서 오십 대 후반 나이쯤으로 짐작되었다. 여태도 방문자에 대한 경계와 적의를 누그리지 않는 충견을 꾸짖어 침묵하게 만든 남자는 대문까지 걸어와서, 작은 손가방 하나 달랑 들었을 뿐인 주혁의 행색을 창살 사이로 관찰하며 물었다.
   “차가 어디 있습니까?”
   주혁은 손짓으로 위쪽 해안도로를 가리키며, 급커브 사고방지용 둔덕을 들이받으면서 충격으로 엔진이 아주 멎어 방치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남자는 잠깐 생각하더니, 대문 잠금장치를 따주며 약간 책망하는 투로 말했다.
   “이런 야심한 시간에…… 무모하군요. 이쪽은 길사정이 좋지 않은 난코스로 유명한데.”
   “죄송합니다.”
   주혁이 허리를 굽실 숙였다.
   자정이 멀지 않았는데도 굳이 서울까지 강행군하려고 한 것부터 애당초 무리였다. 가로등도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헤드라이트에만 달랑 의지해서 구불구불한 이차선 해안도로를 시속 80킬로 정도로 달린다는 것은 무모함 정도가 아니라 만용이었다. 그 자신도 죽음의 거대한 입을 벌리고 음험한 미소로 자기를 주시하는 바다가 찝찔한 입김을 불어 보내며 바로 왼쪽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내내 꺼림칙이 의식하면서, 불안감 속에서도 스릴 비슷한 일종의 오기로 차를 몰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우회전 모퉁이를 돌다가 길 가장자리의 사고방지용 모래 둔덕을 들이받고 만 것이다. 상당한 급커브인데도 어둠 때문에 상황판별이 제대로 안 되어 핸들을 충분히 못 꺾은 탓이었다. 바로 앞은 수십 길 낭떠러지. 실로 머리끝이 쭈뼛 곤두서고 등골이 오싹한 순간이었다.
   주혁은 대문 안으로 얼른 발을 들여놓으며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공교롭게도 핸드폰 전원이 다 되어 보험에다 사고신고를 할 수도 없고, 걸어서 되돌아가자니 엄두가 나지 않고……. 사장님 댁 진입로 입구가 좀 전에 얼핏 눈에 띄었던 건, 저로선 실로 불행 중 다행입니다.”
   “신고한들 이 야심한 시간에 보험회사에서 여기까지 달려오겠어요? 차를 두고 걸어서 되돌아간다 해도 K 읍까지 15리는 족히 될 테고…….”
   “그러게 말입니다. 아무튼, 감사하고 죄송합니다.”
   “일단 들어오시구려.”
   남자는 썩 흔쾌하지 않다는 기색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몸을 돌려 앞장서서 현관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주혁은 여전히 자기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은 채 여차하면 달려들 것 같은 맹견을 힐끔힐끔 돌아보며 남자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주혁을 거실에 데리고 들어간 남자는 그를 응접 소파로 안내하고 자기도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면서도 생면부지의 갑작스런 대좌가 영 어색하다는 기색이었고, 그 점에서는 주혁 역시 다를 바가 없었다.
   “정식으로 인사 올리겠습니다. Y 일보 사회부 차장 송주혁입니다.”
   주혁이 깍듯이 머리를 숙이며 명함을 건넸다. 남자도 목례로 답하며 박 아무개라고 자기소개를 했으나, 흔치 않고 발음도 부드럽지 않은 이름이어서 주혁의 기억력이 얼른 명확하게 못 받아들였다. 돌발사고로 말미암은 마음고생의 여운에다, 마침 위쪽 도로를 지나가는 어떤 자동차 소리에 순간적으로 정신이 깜빡 쏠린 심리 불안정 탓이기도 했다.
   “어떻게 해드리는 게 좋을는지…….”
   남자가 자못 곤혹스럽다는 듯, 시선을 고정하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만, 전화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어쩌시려고?”
   남자가 비로소 주혁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온화하면서도 사려 깊어 보이는 인상이었다.
   “보험회사에 일단 전화해보겠습니다. 그밖에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남자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소용 있을까? 이 시간에……. 그보단 여기서 몇 시간 눈 붙이시고, 아침에 K 읍으로 걸어가든지 어디에든 연락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말씀 감사합니다만, 그러면 많이 폐가 될 텐데요.”
   “기왕에 폐를 끼치려고 찾아오신 거잖소.”
   조금 짓궂은 대꾸를 하는 남자의 왼쪽 입아귀에 주름이 슬쩍 잡혔다.
   그 재치있는 미소가 주혁을 심리적 부담에서 한결 해방시켜주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염치없지만 사장님 호의를 감사히 받기로 하겠습니다.”
   남자 입아귀의 주름이 금방 펴졌다.
   “난 사장이 아니오. 속세하곤 거의 인연 끊고 초연히 홀로 사는 사람인데, 사장은 무슨……. 하여튼 함부로 남발되는 그 엉터리 호칭이 난 듣기가 영 껄끄럽습디다.”
   “아, 실례했습니다. 습관이 되다 보니…… 죄송합니다.”
   제풀로 낯이 화끈해진 주혁이 고개를 숙이며 얼른 사과하자, 남자는 한 손을 쳐들어 까딱 흔들었다.
   “그렇게 사과까지 하실 일은 아니고……. 가만있자, 따끈한 차를 드시겠소? 아니면 술 같은 걸 한 잔……?”
   “그러시면 제가 너무 폐를 많이 끼치지 않습니까.”
   “괜찮아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던데, 이것도 인연이잖소. 정 피곤하시면…….”
   남자는 현관 옆 방문 하나를 손가락질하며 말을 이었다.
   “저 방에 들어가 먼저 눈을 붙이시지요. 손님을 위한 여분의 침실이니까 마음 편히 쓰셔도 됩니다.”
   “선생님은요?”
   “송 기자님 덕분에 깨어났으니, 다시 침상에 들더라도 새벽녘까진 잠을 들이지 못할 거예요. 그럴 바엔 차라리 혼자 와인이나 홀짝거리며 밤과 친구 하는 편이 낫지.”
   “단잠을 깨시게 해서 불편을 끼쳐드렸으니, 이거 정말 죄송해서 어쩌지요?”
   “미안해하실 거 없어요. 시간조절이 필요없는 생활이라, 안 그래도 밤 시간을 낯처럼 보낼 때가 종종 있고, 경우에 따라선 꼬빡 지샐 때도 있으니까. 나 생각해서 무리하실 거 없이, 피곤하다면 방에 들어가시오. 괜찮으니까.”
   그러나 결국은 주혁이 남자의 무료한 시간 죽이기에 동참해주기로 어색한 양해가 이루어졌다.
   남자가 술을 가지러 주방에 들어간 사이, 주혁은 비로소 관심을 기울여 실내를 둘러보았다. 현대유화와 조각미술품 여러 점, 나전칠기 장식장 속의 도자기들, 한쪽 벽을 빼꼭 메운 서가의 책들, 그 외에도 갖가지 기물집기의 배치나 조명이 고급스러운 조화와 어떤 잠재적 질서를 이루고 있어, 주인의 예술적 감각과 지적 소양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남자가 곧 돌아왔다. 지명도 높은 국산 포도주 한 병과 유리잔 두 개, 그리고 건과류와 치즈 따위 안줏감을 얹은 커다란 플라스틱 쟁반을 들고서. 마치 누가 꼭 찾아올 줄 알고 미리 대비한 것처럼 신속하고 완벽한 준비성이, 염치없는 방문자를 조금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주혁이 그런 뜻의 감탄을 담아 진심 어린 사의를 표하자, 남자는 엷은 미소를 띠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가볍게 받아넘겼다.
   “뭘요. 이까짓……. 특별한 준비는 아니고……평소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자리에 앉은 남자는 회전식 병뚜껑을 돌려서 따고 두 잔에다 번갈아 따르며, 어쩌다가 이런 지경까지 되었느냐고 가볍게 책망하는 투로 물었다.
   “사건취재를 해오다가 시간이 늦었습니다. 큰 국도를 타자면 너무 내려가게 되는 것 같아서, 거리상 훨씬 지름길이겠다 싶어 이쪽 코스를 택한 겁니다. 시골 길 드라이브한다는, 약간의 객기도 없지 않았다 할까요. 겁도 없이……. 들어서고 나서야 점점 후회가 되었지만, 이제 와서 어쩌겠습니까. 강행군을 하는 수밖에요. 솔직히, 길이 이토록 험하리라곤 짐작 못 했습니다.”
   “낮에는 해안풍경 즐기며 드라이브할 만하지요. 하지만 밤에는 지나다닐 만한 길이 못 됩니다. 그나저나 큰 사고 없이, 그만하기도 다행이오.”
   “맞습니다. 아찔한 경험을 했습니다.”
   주혁이 수긍했다.
   와인이 반쯤 담긴 잔을 남자가 권했고, 주혁은 가벼운 목례로 답하며 받았다. 주혁은 잔을 상대방의 잔과 가볍게 부딪치고 나서 입으로 가져갔다. 와인의 상큼한 맛이 입안에 퍼지자, 더운 날의 샤워처럼 기분이 상쾌해졌다.
   “실내장식이 퍽 훌륭하군요. 주인 되시는 분의 높은 지적 안목과 고상한 감각을 한눈에 보여주는 컬렉션입니다.”
   주혁은 짐짓 다시 실내를 둘러보는 척하며, 본인 생각에도 조금 낯간지러운 느낌이 들 정도로 아부성 찬사를 늘어놓았다.
   “그렇게 보입니까?”
   남자의 반응은 왠지 시큰둥했다.
   “그럼요. 선생님의 심미안이랄까, 안목이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자, 남자의 다음 말이 뜻밖이었다.
   “나는 주인이 아니오.”
   “아, 그렇습니까?”
   “이 집의 진짜 주인은 따로 있다오. 난, 말하자면 관리인에 불과하고.”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얼굴에 한 꺼풀 어두운 그림자가 덮이는 것을, 주혁은 놓치지 않았다. 음성에서도 뭔지 모를 여운 같은 것이 느껴졌다.
   “무슨 말씀이신지, 전 얼른 납득이 되지 않는군요. 죄송합니다만…….”
   “죄송할 거야 뭐 있겠소. 사실이 그런걸. 이 집 주인 양반은, 방금 송 기자님이 말씀하신 칭찬을 받기에 족한 분이지요. 인품으로든 지적소양으로든……. 허나, 그 인품과 지적소양이 그분의 인생 자체를 곧바르게 제대로 받쳐주진 못했답니다. 불행하고 애석한 노릇이지요.”
   남자는 와인을 크게 한 모금 마시고 음미하듯 입맛을 다시며 어두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다고 외등 불빛 속에 몽롱한 그림으로 떠오른 정원풍경을, 아니면 특별한 어느 무엇을 응시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주혁은 내심 약간 혼란스러웠다. 불의의 사고를 당하고부터 낯선 집 응접실 소파에 엉덩이 척 내리고 앉아 와인을 홀짝거리기까지 불과 20여 분 남짓 사이에 하나하나 이어진 상황들, 남자를 둘러싸고 있는 뭔지 모를 난해한 분위기가 도무지 예사롭지 않아서였다. 그 혼란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듯, 그런 유사한 기분으로, 상대방이 한 것처럼 와인을 크게 한 모금 들이켰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며 체내에 부드러운 자극을 가하는 알코올 덕분에 비로소 기분이 한결 여유로워졌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분께서는……어디 해외에 장기체류 중이신가요?”
   “그야 모르지요.”
   남자가 시무룩이 대답했다.
   “그럼……?”
   “세상과 인연을 아주 끊을 작정으로 국내 어딘가에 잠적해서 은둔 중인지, 외국으로 훌쩍 날아간 건지……현재로선 생사 자체를 알 수가 없답니다. 오래전 집 나가 고부턴 연락이 두절이니.”
   “가출하신 거군요?”
   “그런 셈이지요.”
   주혁은 와인 한 모금을 다시 천천히 마시는 시간 간격으로 상대방이 심리적 문을 스스로 조금 더 열도록 은근히 유도하고 나서 물었다.
   “가출이라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법한데요. 이건 너무 주제넘은 호기심인지 몰라 여쭙기가 주저됩니다만…….”
   “물론 이유야 있었지요. 원인 없는 결과가 어디 있겠소.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아끼고 신뢰하던 인간한테 크게 배반당한 참담함. 그럴 경우의 분노는 심할 경우 능히 살인으로 이어질 법도 한데, 그분이 택한 해결방법은 스스로 조용히 잠적해서 자기 존재를 소멸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측면에서는 그편이 살인보다 더 지독한 보복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주혁은 왠지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말로 표현하는 경솔한 짓은 삼갔다.
   “사연을 좀 들어볼 수 없을까요? 무례가 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전 호기심 많은 신문기자니까요.”
   “신문에다 내시려고?”
   와인을 홀짝이며 주혁을 건너다보는 남자의 시선 속에 장난기 어린 엷은 미소가 담겼다.
   그 미소를 놓치지 않고 포착한 주혁은 몸을 크게 움직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얘긴 뉴스거리가 될 수 없지 않습니까. 다만,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그럽니다. 말씀하시기 정 곤란하면 제 질문 없던 걸로 해도 무방하구요.”
   “와인이나 한 병 더 비우는 게 어떻겠소?”
   남자가 은근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아닌 게 아니라, 병은 이미 바닥을 드러내기 직전이었다.

   옛날, 가난하지만 의좋은 어린 고아 형제가 살았습니다.
   어찌 된 고아였냐고요? 글쎄, 고아면 고아인 거지, 그렇게 된 사연 따위야 아무러면 어떤가요. 그 시시한 얘긴 건너뛰기로 합시다.
   어쨌거나 이들은 한 몸처럼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며 자랐답니다. 형은 한참 어린 아우를 끔찍이 보살피고, 아우는 형을 어버이처럼 여겨 의지하며 따랐어요. 그럴 수밖에요. 넓고 험한 세상천지 어디에도 이 어린 천사들을 위한 보금자리나 따뜻한 손길이라곤 없었으니까.
   나이 덕에 세상 물정을 보다 일찍 깨친 형이 곰곰 생각했습니다. 우리 형제가 앞으로 똑같이 성공해서 행복하게 잘 살겠다는 건 어리석고 무리한 욕심이야. 가엾은 아우가 잘되도록, 난 오로지 내 한 몸바쳐 뒷바라지나 잘해주면 돼. 그래서 아우가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바라보면, 나도 덩달아 행복해지는 거지, 뭐. 그것만으로 족해. 형은 오로지 아우를 위하는 일념으로 손 부르트고 어깨 뻐근하고 종아리에 알 박히도록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돈을 벌었습니다.
   형 덕택에 아우는 출세에 필요한 학업과 기예를 닦는 데 아무런 어려움 없이 열중할 수 있었고, 성년이 되어 세상에 나가서는 성공의 과정을 거듭한 끝에 영지가 딸린 작은 성의 어엿한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빛나는 신분상승을 성취한 거지요.
   성주는 행운의 원천인 고마운 형에게 보답하려고 했지만, 형은 한사코 손사래를 쳤습니다. 자기는 비록 가난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살아갈지언정 이대로가 좋다고, 아우의 행복한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요.
   그러던 형이 가엾게도 어느 날 덜컥 죽고 말았습니다. 젊었을 때 고생하느라 얻은 지병 때문이었지요. 가슴 저미는 절절한 애한으로 장례를 치른 성주는 하나뿐인 조카를 데려다 잘 키워줌으로써, 형한테서 받은 그대로를 조카한테 되레 쏟아부어 줌으로써, 생전의 형에게 못다 한 보은을 실천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자신과의 그 약속을 성심으로 잘 지켰습니다.
   그러던 중 뜻밖의 불행이 닥쳐왔습니다. 어느 해 널리 퍼진 몹쓸 돌림병에 성주의 아내와 자식들이 모두 죽고 만 것이지요. 그 충격은 성주에게서 삶에 대한 의욕을 송두리째 앗아갔습니다. 어릴 적 고아 콤플렉스에 뿌리를 둔 그의 가족사랑은 병적일 정도로 본인 의식세계 전반을 절대적으로 지배해왔으니까요.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한 성주는 오직 하나 혈육인 젊은 조카를 후계자로 삼아 거의 모든 것을 물려준 다음, 자신은 성 안에 깊이 틀어박혀 세상과 철저히 담을 쌓았습니다. 외부세계와의 소통은 조카가 오로지 유일한 통로였지요. 자기네 가족사를 모를 리 없는 조카는 불쌍한 삼촌의 갸륵한 뜻에 무한히 감사하며 잘 받들어 모셨습니다.
   그럭저럭 십여 년이 지나자, 독신생활의 외로움이 뼈저린 성주는 성의 안살림을 관장할 존재가 필요하다는 구실로 다시 장가를 갔습니다. 상대는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었지요. 그런데 이것이 파멸적 비극의 씨앗이 될 줄이야!
   사치하고 풍요하며 시끌벅적한 파티 연속의 나날일 줄 기대했던 그녀는 성의 현실생활이 자기 꿈과 너무나 동떨어진 것임을 알자 크게 실망했습니다. 아버지뻘 연장자인 남편은 인색하다 싶을 정도로 매우 검약하고, 모든 규범이 철저히 몸에 배였으며, 거의 온종일 사색과 고독을 즐기는 은둔형 인물이었으니까요.
   낙심과 슬픔 때문에 숨이 막힐 것 같은 그녀에게 유일한 구원이 되어준 건 바로 성주의 조카였습니다. 젊고 잘생긴 그와 이따금 사소한 내용이더라도 매끄럽고 따스한 대화 몇 마디를 나누면, 그걸로 금방 시름이 가시며 몸에 생기가 도는 것 같았습니다.
   그건 조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주부인이며 엄연히 숙모이기도 한 그녀가 어느덧 ‘여자’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런 따위 분홍빛 이성감정 교류를 원죄의 단호한 잣대로 매도하거나, 또는 불가항력적 원초본능이라 변호하거나 하는 논리적 말장난이 이 경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같은 맥락으로, 이들 남녀의 관계가 어느 선까지 발전했느냐 말았느냐 하는 것 역시 하찮은 곁가지에 불과하겠지요.
   중요한 것은 성주가 이 발칙한 로맨스를 어쩌다 눈치채버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엄청난 배신감에 충격과 절망과 분노로 미칠 지경에 이르러 당장 둘을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사려 깊고 현명한 사람이라 그렇게 하는 건 문제 해결이 아니라 불행한 자기비극의 새로운 시작임을 깨달은 겁니다. 어쩌면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을 형의 눈길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는지도 모르지요. 그는 고문과도 같은 깊은 고뇌의 시간 끝에, 자기 책상 위에다 아내의 손수건과 조카의 업무보고서 한 장을 포개고 단검을 내리찍어 꽂았습니다. 그래놓은 다음, 아무도 모르게 성을 빠져나가 그 길로 잠적해버렸습니다.
   자기만 출입이 가능한 성주의 서재에 뒤늦게 들어갔다가 대뜸 사정을 파악한 조카가 얼마나 경악하고 가슴을 치며 후회했겠습니까. 어쨌거나 백배사죄는 나중 문제고, 우선 성주를 찾아 모셔오는 일이 중요하므로 급히 부하들을 사면팔방으로 내보냈습니다. 허나 어디서도 성주의 종적을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조카는 불행을 초래한 여자를 성에서 내쫓아버렸습니다. 그런 다음, 두문불출하며 마음의 밧줄로 자신의 몸을 결박하고 채찍질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말하자면 스스로 삼촌의 분신이 되어주기로 작정한 것이지요. 그것으로 속죄가 될 리 만무하고 기약이 있을 수도 없지만, 성주가 언젠가는 나타날 때까지 그렇게 할 작정이었습니다. 어쩌면 자신이 죽는 날까지 계속될 일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그러고 보니 이 기막힐 성인동화도 운명의 어떤 매듭이랄까, 사슬이랄까, 뭐, 그런 게 아니었겠나 싶네요.     

   다음 날 아침, 8시가 조금 지나서야 주혁은 비로소 그곳을 출발할 수 있었다. 간밤에 남자와 어느덧 죽이 맞아 권커니 작커니 하다 보니 와인을 세 병이나 딴 바람에 약간 늦잠을 잔 탓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전화기를 빌려 보험회사와 몇 통화를 했는데, 양쪽 입장의 아귀가 맞지 않아 종내에는 언성이 높아지기까지 했다. 그런 지 거의 한 시간 만에 애프터서비스 차량이 겨우 도착해 엔진점검과 뭔가 한두 개 부속교체를 한 뒤에야 비로소 출발이 가능해진 것이다.
   남자가 간단히 조반을 대접하겠다고 했으나, 주혁은 정중히 사양했다. 어쩌다 이쪽 지역으로 오는 기회가 있으면 들러주기를 원하는 호의에 대해서는 그러겠다고 화답은 했지만, 주혁은 자기가 남자와 다시 만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뚜렷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그래야만 될 것 같아서였다.
   새 아침 상쾌한 바다 공기 들이마시며 그야말로 해안도로 드라이브를 즐기는 상황이 되었건만, 주혁은 기분이 별로 산뜻해지지 않았다. 남자란 인물과 그를 둘러싸고 있는 묘하게 불가사의한 분위기, 게다가 그의 입을 통해 듣게 된, 어쩐지 나름의 필요에 따라 약간은 다듬어지거나 덧붙여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옛이야기 때문이었다.
   다음 순간, 남자가 이야기 말미에서 무심코 입에 담았던 ‘운명의 무엇’ 어쩌고 한 말이 새삼스레 주혁의 뒤통수를 쳤다. 혹시 어쩌면 애당초 형제를 고아로 만든 원인이란 것은, 그 부모를 죽음으로 몰아간 모종의 애달픈 사련邪戀이 아니었을까. 왠지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에 연이어, 자신의 속물근성이 장난기로 불쑥 떠올린 단어 두 개가 주혁을 씁쓸히 미소 짓게 만들었다. 배따라기. 페드라.

 

 

손 영 목  ----------------------------------------------

   거제 출생. 197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판님〉 당선. 197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이항선〉 당선. 1982년 경향신문 장편소설 〈풍화〉 당선. 한국소설문학상, 한국문학상, 채만식문학상 수상. 작품집 : 《침묵의 강》, 《어둠의 목소리》, 《얼음꽃》, 《풍화》, 《유년의 환상》, 《거제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