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계간문예 2014년 봄호, 작가연구: 유현종] 유현종, 그는 누구인가? : 멋진 이야기꾼 - 최인호(故)
"현종형은 데뷔 시절부터 소외되고 어두운 현실을 살아내는 민중들의 삶과 눈물, 그리고 한숨을 냉철한 작가정신으로 고발해낸 문학을 해왔다. 장편 《불만의 도시》나 중편 《섬진강》 등이 대표적이다. 그의 민중문학은 민중의 역사 쪽으로 보폭을 넓히게 되고 최초로 성공했던 작품이 대표작인 《들불》이었다. 들불은 바로 우리나라 근세사 사상 최초로 제기된 민권 자각운동이며 민중 혁명의 역사인 동학을 배경으로 이름 없는 농민 일가의 가족사를 그려낸 명작이다. 그 이후 그는 수많은 역사소설을 쓰게 되었는데 주체는 늘 그 시대를 살아간 민초들이었다. 그럼에도 유현종은 참여문학 작가에서 제대로 대접을 못 받아왔다. 나는 그 까닭을 물었다."
유현종, 그는 누구인가? / 최인호(故)
— 멋진 이야기꾼
1
형은 아마 소설을 쓰지 않았으면 코미디언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무대에서의 연기도 코미디가 일품이다. 항상 웃음과 재밌는 이야기가 넘친다. 10여 년 전 연말 세밑이 아니었나 싶다. 이어령 선생과 가까운 제자들이 평창동이 선생님 댁에서 해마다 송년회를 하곤 했다.
칠팔 명 문우들이 모여 웃고 떠든다. 현종 형은 문단 연조로 보나 나이로 가장 선배이지만 친화력이 좋아 십 년 후배들도 친구처럼 대해준다. 그게 형의 장점이다. 그날도 송년회를 마치고 모두 헤어지는데 형과 나는 강남에 사니까 둘이서 형 차를 타고 선생님 댁을 나섰다.
“어디 가서 커피 한잔 더 마시고 가자? 올림피아 호텔 커피숍이 좋겠다.”
형이 제의한다.
“그럽시다. 여기 오니까 옛날 전적지를 돌아보고 가고 싶은가 보지?”
“전적지? 난 아냐, 니가 싸워 이긴 전적지지?”
전적지란 여자와의 러브 어페어가 서려 있는 연애 유적지를 말한다. 유서 깊은 평창동 올림피아 호텔은 그런 것 말고도 형과 나의 옛날 추억이 많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3십 년 전, 형과 친한 가수 조용필을 처음 만난 곳도 올림피아 호텔 라운지에서였다. 아무튼, 우린 아늑한 구석 자리를 잡아 앉았다. 창밖은 계곡이고 계류 흐르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커피 향에 취해 있을 때 나는 시간이 나지 않아서 보지 못한 영화 이야기를 꺼냈다.
“형! 집에 가기 전에 영화나 보구 가자? 명보극장에서 하는 〈미져리〉가 재미있다 하던데?”
“며칠 전에 봤어. 나 혼자 봐서 미안하다.”
“의리 없이…….”
“너 같은 인기작가는 꼭 봐야 할 스릴러물이더라. 어느 인기작가가 소설 끝을 마무리하려고 깊은 계곡 별장에 갔는데 폭설이 내려서 별장에 갇혀버렸어. 헌데 그 밑 직은 마을에는 미 져 리라는 광적인 팬이 살고 있었지. 이 여자는 인기작가를 자기 애인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데 그게 지나쳐 결국에는 쓰고 있던 소설의 마무리까지 제 뜻에 맞게 쓰게 하기 위해 별짓을 다 하며 작가를 괴롭히지.”
“별짓? 무슨 짓을 하는데?”
“상상 불허야.”
이렇게 되어 형은 〈미져리〉 영화를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한 시간 사십 분짜리 영화를 형은 세 시간 사십 분에 걸쳐 자기 입으로 상영을 했는데 나는 손에 땀을 쥐고 들었고 안타까운 한숨도 쉬었고 분노의 주먹도 쥐었으며 변소 가는 것도 잊을 정도였다. 그만큼 재미가 있었고 형의 이야기 솜씨가 그만큼 탁월했다는 것이다.
현종 형은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호흡이 짧으면 장편을 쓰지 못한다. 그런 이야기꾼이기에 〈연개소문〉, 〈대조영〉, 〈임꺽정〉, 〈천추태후〉 등등 수없이 많은 대하소설을 써낼 수 있었을 것이다. 연개소문 같은 것은 전 7권으로 출간했고 썼다 하면 전 5권이 기본이었다.
2
내가 현종 형을 처음 만난 건 1970년 경이다.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이 당선되어 문단 말석에 이름을 올린 지 얼마 안 되어서이다. 형은 이미 작가 된 지 십 년이 되어가고 있을 때였다. 차를 한 잔 마시게 되었는데 차림새는 연극 패 같았고 눈빛이 날카로워 보여 성깔이 있게 보였다. 대학 때 내가 연극을 했다는 말에 처음부터 호감을 보였다.
형은 서라벌 예대를 나왔고 대학에서 연극도 했고 1968년에는 자신의 장편소설인 <불만의 도시>를 희곡으로 만들어 극단 가교에 의해 국립극장에서 상영한 바도 있는 소설가이며 희곡작가이기도 했다. 형과 나는 처음부터 의기투합했다. 장차 우리는 소극장 운동을 해보자는데 뜻을 같이했다.
우리가 쓰는 소설을 원작으로 〈살롱 드라마〉를 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명동에는 까페 떼아뜨르라고 하는 살롱이 있었는데 작은 무대가 있어 단막극을 올리기도 했다. 형과 나는 그곳에서 내 작품 〈달리는 바보들〉을 형의 연출로 공연했고 이어서 후속작품도 올렸다. 추송웅 박정자가 속한 자유극단도 전속이었다.
1990년대 들어 동숭동 대학로가 예술의 거리로 정비되고 소극장 운동이 일어나 지금까지 2백여 개의 소극장이 문 열고 연극을 하고 있는 현장을 보면 감회가 새롭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이미 그날이 오리라 예상하고 그 운동에 불을 지폈던 것처럼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늦게 복학을 하여 가을 졸업을 하게 되었다. 아무도 알리지 않았는데 뜻밖에도 현종 형이 졸업식장에 나타나서 날 놀라게 했다.
“야, 너 출석 일수가 모자라 졸업을 못할 뻔했는데 그나마 졸업을 하게 해준 건 박영준 선생 덕택이라더라.”
박영준 선생은 연대 문과대 교수였다. 나를 끔찍하게 생각해주는 스승이었다. 여하튼 늦깎이 졸업식장에 찾아 준 문인은 형이 유일했다. 형은 그뿐 아니라 내 결혼식도 참관한 장본인이다. 아내가 된 미스 황은 캠퍼스 커풀이었다. 결혼 후 신혼방을 얻어 살림을 났는데 그 살림방을 맨 처음 찾아온 사람도 현종 형이었다.
원래 우리 집은 아현동 굴레방다리 근처에 있었다. 한옥이었다. 어머니는 문간방에 신혼방을 차리라 했는데 내가 우겨서 분가하게 되었다. 같은 동네였다. 시장에서 언덕빼기를 한참 올라가다 보면 삼거리 골목이 나오는데 삼거리 복판에 목욕탕과 여관이 함께 붙어 있는 낡은 이 층 건물이 있었다. 내가 얻은 방은 바로 이 층, 부엌도 없는 좁은 방이었다.
방세가 싸서 들어간 곳이다. 부엌은 없었지만 난방 시설이 자동이었다. 목욕탕 이 층 방이라 천정으로 엄청나게 큰 온수 파이프가 지나가기 때문에 방에 앉아 있으면 난방을 따로 하지 않아도 언제나 땀이 날 정도로 더웠다. 이곳에 살 때는 웃지 못할 사건도 겪어야 했다.
목욕탕 맞은편에는 복덕방이 있었는데 몇몇 동네 영감님들이 나와 앉아 내기 바둑을 두거나 장기 두는 게 일이었다. 그러든 어느 날. 우리 부부가 외출을 하려고 이 층에서 구석에 있는 계단으로 내려와 길거리에 막 나설 때였다.
“이봐!”
영감님 하나가 소리치는 바람에 흠칫 바라보니 자기들 앞으로 다가오라고 손짓을 하고 있었다.
“저 말입니까?”
“그래 이놈아, 너 좀 이리 와봐!”
영감님 셋이 다가오는 우리 부부를 노려보고 있었다.
“왜 그러시죠?”
“왜 그러시죠? 귀때기 피도 마르지 않은 새파란 놈이 그래 어린 계집 끼고 아침저녁으로 여관 출입을 해?”
그 호통을 듣는 순간 나는 그 이유를 알았다. 문제는 우리 이 층 방과 옆에 붙어 있는 여관의 옆문이 하나로 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우리 부부가 들어가고 나갈 때 영감님들 보기에는 마치 여관출입을 시시때때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마침 현종 형이 찾아왔기에 그 애로사항을 말하고 이사하고 싶다 했다.
“영감들은 오해 풀었어?”
형이 물었다.
“풀긴 하면서도 미심쩍다는 듯 고개를 갸웃 갸웃하는 거야.”
“제대로 걸렸다야. 너희 부부를 고교생이나 대학생 정도로 봤다는 말이구나? 그건 너희들 잘못 아냐? 두 사람 다 키가 아담하고 얼굴이 동안이니 그런 오해 받을 수도 있지. 임마, 그건 행복한 오핸데 뭐 이사까지 간다구 난리야?”
그러면서 형은 유쾌하게 웃었다. 형은 그날 처음으로 우리 신혼방을 찾아왔는데 아현시장 언덕빼기를 올라오면서 이미 활극을 벌였다며 다 깨진 수박조각을 주워 모아들고 왔었다.
“수박이 왜 산산조각으로 처참해?”
그러자 형은 이마의 땀을 주먹으로 훔치며 한숨을 쉬었다.
“나 참 더러워서. 신혼방을 찾아오는데 빈손으로 올 수 있니? 그래 없는 돈 탈탈 털어서 수박 한 덩이를 샀지. 노끈으로 된 망에 넣어 주길래 그걸 들고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데 아 글쎄 너희 목욕탕집 앞에 이르른 찰라 그만 노끈이 끊어지는 바람에 수박이 빠져나가 밑으로 구르기 시작하는 거야. 잡으려고 전속력으로 달려내려 갔지. 나보다 수박이 더 빠르더라. 시장바닥까지 다 내려가더니 세워놓은 리어카 바퀴에 부딪혀 박살 나는 바람에 요지경 요 꼴이 되었다.”
“형 수고했어. 괜찮아. 먹을 땐 어짜피 조각을 내야잖아? 자, 먹읍시다.”
3
형의 트레이드 마크는 뭐니 뭐니해도 환하게 짓는 미소이다. 그 미소 때문에 형은 절대로 화를 내지 않을 사람으로 보이며 항상 부드러워 보이며 마음이 넓고 이해심 많고 인정 많은 사람으로 보인다. 나와는 조금 대조적이다. 인정 많고 마음이 뜨거운 건 비슷하지만 나는 부드럽거나 이해심이 많은 편은 아니다. 조금은 좀 모가 나고 까칠한 편이다. 그렇게 대조적인 성격 때문에 형과 나는 친형제처럼 수십 년간 친하게 사는지 모른다.
난 성질이 급한 편인데 형은 좀 느긋하다. 여간해서 화를 잘 내지 않지만, 화를 내면 아주 직선적이다. 오래전이다. 나와 형과 어느 신문사 문화부장, 셋이서 골프를 하러 필드에 나간 적이 있었다. 이어령 선생과 형 그리고 나는 골프를 같이 시작했는데 운동신경이 좋은 형이 맨 먼저 싱글 골퍼가 되었다. 수도권의 H 골프 클럽에서 치게 되었다.
그런데 4번 홀인 미들홀이 중간에 푹 꺼져 있어 드라이버 티샷을 치면 언덕 밑에서 그린을 공략하는 골퍼를 맞출 수도 있어 꺼진 곳에는 캐디 하나가 먼저 나와 서서 그린에 사람 없으니 쳐도 된다며 수신호를 보내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수신호를 무시하고 뒤 팀 중 한 사람이 쳤다. 공교롭게도 그 공이 굴러 내려와 그린 주변에 있던 현종 형 구두 뒤축을 맞췄다. 그린 홀컵 깃대 옆에 딱 붙이는 어프로치 샷을 하려고(사실은 그 한 타에 만원이 걸려 있었다) 노리고 있다가 맞은 것이다.
순간적으로 화를 내더니 형은 굴러 온 공을 뒤쪽으로 쳐버렸다. 다음 홀은 쇼트홀이라 뒤 팀도 만나게 되어 있었다. 형 나이쯤 되는 반백의 가해자가 다가와 거의 욕에 가깝게 대들었다.
“골프 십 년에 당신 같은 사람은 처음 봤어. 공을 뒤로 치다니?”
그 사람은 마치 내무반 고참이 신입 신병을 잡들이 하는 것처럼 반말로 대들었다. 형은 아무 말 없이 그 수모를 다 견디고 있었다. 내가 나서려 하자 참고 있던 형이 골프채를 거꾸로 들어 그의 배를 쿡쿡 찌르며 맞받아 쌍욕을 쏟아냈다. 치면 안 되는 공을 쳤으니 먼저 사과해야 하는데 날뛰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함께 온 영감 둘이 형을 말리며 끌고 나갔다. 도대체 저 자식 뭐하는 놈이냐고 영감에게 묻고 있었다. 그러자 영감은 저 사람은 자기들을 초대한 A부 모 국장이라는 것이었다. 군사정권 시절이니 그 말에 깜빡 죽을 법도 한데 형은 아랑곳없이 외쳤다.
“쌔끼! 나가서나 국장이지 골프장에 국장이 어디 있어? 그러는 영감님은 뭐요?”
“나는 감독원 원장입니다.”
갈수록 태산이었다. 오늘 우리는 다 죽었구나 싶고 당장 그 앞에서 몰라봐서 죄송했다고 싹싹 빌어도 시원치 않은데 형은 뭘 믿고 그러는지 안하무인으로 맞서는 것이었다. 결국, 그가 사과했다. 클럽 하우스 식당에서 나중에 술 한잔하게 되었을 때 그 국장은 소설가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 줄 몰랐다고 농담할 정도였다.
“뭘 믿고 국장, 감사원장한테 달려들었지?”
돌아오면서 형에게 묻자 그는 씩 웃었다.
“믿기는 뭘 믿냐? 날 믿는 거지. 우리가 꿇릴 게 뭐가 있니? 일 원 한 장 세금 포탈해봤냐 아니면 이권 청탁하고 뇌물 챙겨봤냐? 뒤져두 먼지밖에 더 나오니? 두려울게 뭐가 있어? 권력? 돈? 그건 좀 무섭지만, 주먹은 별로 안 무섭다.”
나는 언젠가 형의 코를 보고 왜 벙벙해 보이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별걸 다 가지고 시비한다? 그래 어려서 콧잔등이를 너무 얻어맞아서 그런다.”
형은 시골도시에서 자라나며 중학생 때부터 권투를 배웠다고 했다.
“친구네 형이 권투구락부를 열었는데 모집한 부원이 나하구 내 친구 둘 뿐이었어. 열심히 배웠지. 아마추어 선수로 학생대회에도 출전했고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했으니까 몇 년 한 셈이지. 권투는 역시 얻어맞는 것부터 배워야 하는 거야. 그래야 겸손해지구 함부로 주먹 휘두르지 않게 되구.”
형의 성격이 직선적이고 꾸밈이 없는 것은 바로 그런 이력 때문이 아닌가 싶다. 스포츠는 솔직하고 정직하기 때문이다. 형은 남의 뒷말 하는 걸 싫어한다.
4
현종형은 데뷔 시절부터 소외되고 어두운 현실을 살아내는 민중들의 삶과 눈물, 그리고 한숨을 냉철한 작가정신으로 고발해낸 문학을 해왔다. 장편 《불만의 도시》나 중편 《섬진강》 등이 대표적이다. 그의 민중문학은 민중의 역사 쪽으로 보폭을 넓히게 되고 최초로 성공했던 작품이 대표작인 《들불》이었다.
들불은 바로 우리나라 근세사 사상 최초로 제기된 민권 자각운동이며 민중 혁명의 역사인 동학을 배경으로 이름 없는 농민 일가의 가족사를 그려낸 명작이다. 그 이후 그는 수많은 역사소설을 쓰게 되었는데 주체는 늘 그 시대를 살아간 민초들이었다. 그럼에도 유현종은 참여문학 작가에서 제대로 대접을 못 받아왔다. 나는 그 까닭을 물었다.
“나야 민중문학 혹은 참여문학 작품은 쓰지 않았으니 그쪽에서 제외시키는 게 당연하지만, 형은 다르잖아? 형을 왜 제대로 대접을 안 하느냐고?”
“간단한 이유 때문이지. 돈을 잘 번 작가 아냐? 쉴새 없이 신문 연재소설을 써왔고 TV에 드라마도 썼고. 그럼 뭐지? 프롤레타리아 작가가 아니라 부르주아 작가 아냐? 그 논리를 적용하는 거지. 그런데 내가 나서서 그게 아니라고 변명할 필요 없잖아? 그리고 그렇게 된 데에는 네 책임도 없다고 볼 수 없지.”
나한테도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다. 돌이켜보니 형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듯했다. 형과 내가 강남땅에 들어온 것은 비슷한 시기인 1975년 경이었다. 거의가 논밭이었고 개발을 서두르고 있을 때였다. 나는 먼저 신사동에 집을 지었고 형은 삼 년 후에 역삼동에 집을 짓고 이주했다.
그때부터 형과 나는 눈코 뜰새 없이 바빠졌다. 내가 형을 좋아하게 된 것은 형과 내가 가지고 있는 주체할 수 없는 예술적 ‘끼’ 때문이었다. 그래서 연극을 했었고 그 때문에 나는 영화에 미쳤고 형은 TV 드라마에 미쳤었다. 게다가 형은 다재다능했다. 음악도 일가견이 있고 그림도 잘 그렸으며 글씨도 잘 썼다. 게다가 형은 문단 단체에도 여기저기 관여하고 있었는데 내가 말렸다.
“문단 정치판에 왜 휩쓸리려 구해? 선후배들 술집에서 만나면? 처음에 한 두잔 할 때는 화기애애하지. 하지만 취해봐. 작품 씹고 사람 씹고 기분 드러워서 헤어지게 되지. 항상 마찬가지 아냐? 상처만 입구 오잖아? 그렇게 한가해? 여기 강남에 있어두 안 되는데 뭐 있어? 강 건너가지 맙시다.”
형도 옳은 판단이라며 맞장구쳤다. 그렇게 되어 우리는 이십 여년 동안 문단과 담을 쌓고 살게 되었다. 물론 후회는 하지 않는다. 형도 마찬가지라니까. 그저 형이 건강하게 오래 살기 바랄 뿐이다.
최 인 호 --------------------------------------------------------
1945년 서울 출생(~2013). 연세대학교 영문학 학사. 196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입선.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1972년 〈타인의 방〉으로 현대문학상 및 〈깊고 푸른 밤〉으로 이상문학상 수상. 1999년 미주 순회 한국현대문학 낭독회. 2013년 제3회 아름다운예술인상 대상 수상. 작품 〈타인의 방〉, 〈별들의 고향〉, 〈견습환자〉, 〈깊고 푸른 밤〉, 〈고래 사냥〉, 〈겨울 나그네〉, 〈유림〉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