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수필과비평 2014년 2월호, 사색의 창] 삶의 벼랑에서 생긴 날개 - 권신자
"남의 마음이 보인다. 사람이 측은하다. 내가 보이기 때문이다. 나와 남이 다르면 얼마나 다르겠는가. 내가 나를 고수하려고 발버둥칠 때마다 터무니없는 나에게 절망한 것이었다. 내가 아무 힘없는 존재임을 인정하기가 이토록 어려웠는가. 미련해서다. 잘난 줄 착각한 만큼 고생했다. 서슬이 퍼런 나를 누가 고운 눈으로 보았겠는가. 남이 나를 경계하는 눈빛에 어찌 이유가 없겠는가 말이다. 겨우 깨달은 것이다. 왜,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주며, 억지로 오 리를 가자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라고 했는지 말이다."
삶의 벼랑에서 생긴 날개 - 권신자
내가 나를 보는 눈
사람이 자유로울 수 있는가? 자유는 어디로부터 오는가? 정신없이 돌아가는 삶의 수레바퀴 속에서도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늘 나를 사로잡는 화두였다. 무엇에게 붙들려 매이기를 싫어하는 나는, 그러기에 내가 나의 주인이기를 바랐다. 스스로 삶의 맨 꼭대기에 서서 판단을 내리고 또 맘껏 설쳐대길 좋아했다. 그러면서 이건 아니지 싶은 때도 있었지만, 거듭 막막한 한계의 구렁텅이에 빠지고서야 나의 주인 노릇에 진력이 났다. 허탈해진 나와 싸우며 무너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쳐 악다구니를 써댔다. 결국은 약한 나에게서 벗어나야 했고, 책임져 줄 누군가를 찾아 나를 온전히 맡기고 싶어졌다. 자신에게 힘든 요구를 하지 않아도 나 됨됨이만큼 삶을 누리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임을 깨달은 것이다. 가까스로 꾸려온 일생 동안, 나를 다그치고 혹사시키는 것이 잘하는 짓인 양 주위 사람들을 착각에 빠뜨렸으므로, 잘못 길들여진 착각에서 그들을 건져내야 했다. 아집을 무너뜨리는 갖가지 섭리 앞에 무능한 나를 인정하여 두 손 들고,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다.
느려진 속도
천지에 널린 풍광이 너나 없이 아름다웠다. 안개 낀 비좁은 길모퉁이를 돌아나오는 고생마저 즐거울 수 있었다. 결혼하고는 자식들 키우며 대가족 시댁 식구들과 주위 사람들을 챙기는 재미에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그렇게 하는 보람이 더없는 기쁨이었다. 곁눈질 없는 줄기찬 행보에 달리다시피 속도가 붙었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하는 짓이라 여기며 앞만 보고 내닫는 미련한 인생살이, 그래도 나의 서슬 시퍼런 장담은 막연한 앞날에 대한 두려움을 멀리 쫓아버렸다. 젊기 때문이었다. 언제부턴가, 신통치 않은 걸음걸이가 차츰 느려지고, 생의 막바지 오르막을 내딛는 발길이 무거워 터덕거리고, 좌우를 두리번거리는 횟수가 잦아지더니 든든하던 마음이 문득문득 허허로워졌다. 그토록 즐거움에 겹던 순간순간들이 아무 감동 없이 먹먹하다 못해 사는 것이 의심스러워진 것이다. 내게 온 사추기(갱년기)는 붉게 타다 남은 잿빛 숯덩이였다. 남은 시간은 그 숯덩이를 달궈 불빛이 사그라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사부작사부작 발을 떼놓아야 했다.
멈춰진 시간
자주 싫증이 났다. 무얼 해도 별 볼일 없다는 생각이 떨쳐지지 않았다. 우울증에 빠진 걸까. 여태, 끈질기지 못한 성격을 참아가며 닥치는 대로 열심을 내느라 기운이 다 빠져버린 것일까. 해놓은 일들이 하나같이 신통찮게 여겨졌다. 꾀부리지 않고 힘을 다하여 섬긴 사람들이 시큰둥하게 별 반응이 없는 건 어찌된 일일까. 남을 나처럼 생각하고 맘을 다해 대해준 것이 바보스러운 짓이었단 말인가.
벼랑에 서다
달리다가 멈춰선 지점에서 몸이 앞으로 기우뚱 쏠리는가 싶더니, 한 동안 맥이 빠져 주춤거리며 가뜩이나 예민해진 마음은 가누지를 못하고 바깥으로 쏟아졌다. 자존심이 아니면 아무나 붙들고 하소연하고 싶었다. 가볍기 이를 데 없는 빈껍데기만 남은 몸뚱이는 알 수 없는 병에 시달리고 살랑바람이 불어와도 넘어질 뻔하였다. 진정, 쉬어갈 만한 언덕이 보이면 아무 데나 기대고 싶었다. 그러나 다 부질없는 짓이었고, 내가 비빌 언덕은 진작 만났던, 언제라도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틈새에 비쳐드는 오직 한 갈래 빛밖에 없었다.
거치적거리는 사람이나 일거리들은 장애물이 아니었다. 단지 마음이 문제였다. 예전에는 그 어떤 난관도 꼿꼿하게 날이 선 긍정적인 시선 앞에 맥을 추지 못하였으므로 문제될 게 없었다. 감감하게 어두워진 정신 상태는 전에 맘대로 주무르던 어수룩한 마음 하나를 다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 신바람 나던 생각들은 어쩌다가 허방에 빠져 정신을 가다듬지 못하고 있는 걸까. 답답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람을 얻을 목적으로 자신 만만하게, 간 쓸개 다 빼주며 철썩같이 믿었던 몇 십 년 지기가 하필이면 이때, 사소한 일로 냉랭하게 돌아섰다. 내 진심 어린 그간의 행동들이 하찮게 보였단 말인가. 아니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걸까.
사람이 참 낯설어졌다. 세상이 두려웠다. 스스로 으스대던 자신감을 잃은 것이다. 가까스로 눌러놓은 자존심이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몸도 마음도 정신도 낙담에 휩싸여 오리무중이다. 이왕 쓰러질 바엔 철저히 죽으리라는 조짐 같았다. 무척 외롭고 초라했지만 누구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한 가지 믿는 구석은 마음 깊숙한 곳에서 간신히 버텨주고 있는 참 자아에게 무엇도 범접할 수 없는 강한 힘을 실어주면 되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래, SOS를 치자. 잠들지 못하고 눈물로 얼룩진 밤을 하소연하자. 세상이 낯설어 꽁무니를 빼고 만 자긍심을 달래어 불러들이자. 높디높은 곳에서 유심히 지켜보며 정신 차리라고 마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니 말이다.
생각 뒤집기
퍼더앉아 끙끙대던 얼마 전과는 사뭇 다르다. 정신을 차려보니 옆자리에 누워 자는 남편이 보였다. 알토란 같은 자식도 다섯이나 있지 않은가. 삶의 이유는 가까운 데서 꿈틀거렸다. 숨죽었던 욕구들이 스러질 줄 모르고 다시 끓어올랐다. 머리를 들고 날 좀 보라고 외쳐댔다. 먼 산을 넘어간 부르짖음이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자기공명을 일으킨 파장들이 마음바닥에 깔린 생기를 진동시켰다. 감정이 마비되어 느낄 수 없었던, 붙잡아주기를 기다리는, 파릇파릇한 기운은 얼마든지 있었다. 멀리서 가물거리는 줄 알았던 사물들이 가까이에서 빛을 내고 있는 것 아닌가. 붙잡을 용기만 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고난이란 눈앞 것에 매여 쩔쩔매느라 멀리 내다보지 못하는 옹졸함을 요란하게 흔들어대는 것에 불과했다. 정신없이 마구 흔들린 덕에 사방이 헐거워져 통이 커졌다. 안달복달하던 집착을 놓고, 마음 다스릴 정신적 여유가 생긴 것이다. 어지간한 일은 시작과 끝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눈이 열리지 않았는가.
돋아난 날개
성질 급하게 다그치던 남편이 너그러워졌다. 내게서 기대를 놓아버린 측은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자기나 나나 다 살지 않았냐는 듯한 가냘픈 미소는 눈물을 핑 돌게 했다. 자식들은 부쩍, 그 억세던 엄마가 이리 맥없는 노파로 삭을 수 있는가 하는 의아한 시선을 보낸다. 저희들을 도와주던 엄마를 잃었다고 생각할까. 아니지, 한결 진지해진 내 모습이 익숙하지 않아서일 게야. 남의 마음이 보인다. 사람이 측은하다. 내가 보이기 때문이다. 나와 남이 다르면 얼마나 다르겠는가. 내가 나를 고수하려고 발버둥칠 때마다 터무니없는 나에게 절망한 것이었다. 내가 아무 힘없는 존재임을 인정하기가 이토록 어려웠는가. 미련해서다. 잘난 줄 착각한 만큼 고생했다. 서슬이 퍼런 나를 누가 고운 눈으로 보았겠는가. 남이 나를 경계하는 눈빛에 어찌 이유가 없겠는가 말이다. 겨우 깨달은 것이다. 왜,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주며, 억지로 오 리를 가자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라고 했는지 말이다. 만물과 다르게 사람은 극히 자기중심적이 아닌가. 과히 중하지도 않은 일에 남들과 자존심 싸움을 벌이지 말고 지레 져주라는 것이리라. 잠시 사는 한세상, 다 두고 갈 것을 아옹다옹하면서 내 자신과 아까운 시간을 소진하지 말고, 사람다운 인격을 갖추어 남에게 유익이 되다가 오라는 뜻일 게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문득문득 가슴에서 못 견뎌서 치받는다. 뿌리박은 아집이 쉬 변할 리 없다. 사는 날까지 애를 쓸 것이다. 이만큼 멋지고 보람된 일이 또 있을까. 잘되든 안 되든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뛰게 즐거운 것이다. 참 가치 있는 즐거움이 답답한 마음에서 벗어나게 했다. 많은 사람에게 좋을 수 있다면 나의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이란 확신이 있는가? 자주 반문해 보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