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문예연구 2013년 겨울호, 서평: 김완하 시의 의미] 시간의 모서리에 부딪쳐 피어나는 탈각脫殼의 상상력 - 김경복
"김완하의 이번 『절정』 시집에 실려 있는 한 편의 시가 눈길을 붙잡는다. 시집 전체를 읽다가도 자꾸 그 시가 눈에 잡혀 돌아와 들여다본다. 신비하다. 누구나 산이나 들판에서 뱀의 허물을 보기는 쉽다. 그러나 저렇게 이상한 느낌이 들도록 쓰기는 힘들다. 현실과 환상이 중첩돼 이상한 만화경을 들여다보는 느낌을 준다. 자꾸 현실의 나를 신비한 세계로 이끄는 김완하의 시는 이렇게 우리의 의식과 의식에 기초해 있는 일상에 파열을 내는 것 같다. 그렇다, 일상의 파열! 저 의식의 깊은 곳에서 이상한 떨림을 일으키게 하여 현실의 나와 나의 삶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것인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시간의 모서리에 부딪쳐 피어나는
탈각脫殼의 상상력 / 김경복
-김완하 시의 의미
햐, 기이하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고자 함일까? 허물을 벗은 뱀이 사라진 곳의 행방을 찾는 시적 화자의 모습은 기이하다 못해 안쓰럽다. 벼랑에 도달한 뱀은 제 허물을 벗고 그 벼랑 어디론가 제 길을 찾아갔건만 시적 화자는 벼랑 앞에 도착하여 그 흔적 앞에 서성거리며 뱀이 갔을 법한 곳을 두리번거리며 찾고 있다. 그의 눈에 포착되는 것은 벼랑 너머로 펼쳐져 있는 허공, 화자는 저 허공으로 뱀이 사라진 양 두리번거리는 형국이다. 뱀이 허물을 벗어 몸이 가벼워져 저 허공으로 날아갔나? 벼랑이 주는 아찔함 앞에서 허물과 비약과 사라짐 등이 얽혀들며 이상한 감정들을 불러일으킨다. 시인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무엇을 노래하고 싶은 것일까?
김완하의 이번 『절정』 시집에 실려 있는 한 편의 시가 눈길을 붙잡는다. 시집 전체를 읽다가도 자꾸 그 시가 눈에 잡혀 돌아와 들여다본다. 신비하다. 누구나 산이나 들판에서 뱀의 허물을 보기는 쉽다. 그러나 저렇게 이상한 느낌이 들도록 쓰기는 힘들다. 현실과 환상이 중첩돼 이상한 만화경을 들여다보는 느낌을 준다. 자꾸 현실의 나를 신비한 세계로 이끄는 김완하의 시는 이렇게 우리의 의식과 의식에 기초해 있는 일상에 파열을 내는 것 같다. 그렇다, 일상의 파열! 저 의식의 깊은 곳에서 이상한 떨림을 일으키게 하여 현실의 나와 나의 삶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것인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스스로 왔던 길이 무거웠던 것일까
뱀 허물은 벼랑 앞에 걸려 있다
거기까지 끌고 온 몸 벗어놓고
어디로 갔을까,
그의 길을
가르고
껍질 속을 빠져나와
어디로 갔을까,
자신을 가두던 벽을 찢고
끝내 길을 빠져나가
─ 「뱀」 전문
시적 화자가 주목하는 것은 아무래도 허물을 벗은 뱀의 모습인 모양이다. 그 허물만 남은 모양을 두고 ‘자신을 가두던 벽을 찢’고 나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뱀의 탈피를 두고 뱀이 자신의 실존적 삶에서 일상과 무의미로부터 탈출해 진정한 자아로 나아간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좀 더 의미의 심화는 있더라도 ‘그의 길을 / 가르고 / 껍질 속을 빠져나’온 뱀의 이미지도 이 경우는 마찬가지다. 존재의 내적 승화를 의미하는 이 구절들은 시적 화자가 일상적 존재에서 탈일상적 존재로 나아가기를 염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존재의 성숙은 일상적 제 존재성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치열하게 하는 사람들에게 정신적 형상으로 주어진다. 바로 탈피와 탈각! 제 미숙하고 저열한 특성들을 털어버리고 보다 지고한 가치의 형상으로 나아간다는 것인데, 이는 보는 사람에게도 심원한 느낌을 준다. 인간의 불완전성이나 유한성 등의 존재 구속적 면에 사로잡힌 우리들로서 이러한 심원한 이미지 제시는 놀랍다 못해 신비하다. 그 점에서 김완하의 이 시는 자신의 존재론적 염원을 표현하고 있는 데서 멈추지 않고 이 지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인간 존재의 염원을 대리 표상한 것이라는 점에서 원형적 신비성을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의 매혹은 그러한 원형적 주제에 있지 않다. 시의 전반적 분위기는 존재의 질적 전환을 꾀한 뱀이 어디로 갔을지에 대한 호기심이다. 아니 그 길에 대한 간절한 바람이다. 매혹은 여기서 발생한다. 시적 화자는 ‘뱀 허물은 벼랑 앞에 걸려 있다.’고 언급하면서 벼랑 앞에 서서 뱀이 갔을 법한 데를 찾고 있다. 그 찾음이 벼랑의 속성이 스며들어 있는 ‘허공 저 너머’로 눈길을 두는 것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시적 화자는 왜 벼랑에 걸린 뱀의 허물에 관심을 두고 있나? 벼랑이라는 아슬아슬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이른 존재에 대한 관심인가? 시적 긴장 또한 여기에서 발생한다. 들판에 가로놓인 허물이라면 그냥 단순한 호기심을 자아냈을 것이다. 그러나 벼랑에 걸린 허물은 죽음과 맞닥뜨리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뱀은 벼랑에 떨어져 죽었나? 죽으려고 허물을 벗지 않았을 테니 그렇다면 뱀은 벼랑에서 어디로 갔을까? 이 뱀은 특이하게 벼랑에 이르게 됨으로써 오히려 제 허물을 온몸과 온 정신으로 벗을 수 있게 된 것은 아닐까? 벼랑은 그 허공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본질로 주어져 있는데, 이 뱀은 죽음과 삶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가로질러간 셈이네?
시인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고, 또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 시를 통해서는 찾을 수 없다. 시는 미궁과 매혹으로 남아 우리로 하여금 이 시 주변에 맴돌게 한다. 그러나 이전 시들과 이번 시집에 실린 시들을 교차적으로 읽어보면 조금은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우선 이번 시집에서도 벼랑의 이미지는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어 앞 시집의 벼랑 이미지와 겹쳐 볼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벼랑의 속성이 어떻게 유지되고 변해 가는지 살펴보는 것도 김완하 시를 즐겁게 감상하는 하나의 포인트가 될 수 있다. 이번 시집에 그 벼랑의 의미가 잘 나타나는 시는 시집의 표제가 된 다음 작품이다.
히말라야의 쇠재두루미는
나뭇가지에 앉지 않는다
봉우리를 넘을 때 높은 암벽 칼날
향해서 나래친다
힘이 부치면
더 높은 벼랑으로 차 오른다
천길 바닥으로 떨어지는
쇠재두루미 떼 그림자 쌓여
히말라야는 점점 높아간다
─ 「절정」 전문
이 시에서 우리는 벼랑이 갖는 미학적 윤리적 가치를 알 수 있다. 제목이 암시하는 바, 벼랑은 존재의 극한 상황을 상징한다. 즉 삶과 죽음의 경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일체의 방심이나 안일을 용납지 않으려는 삶의 태도다. 그 극한 상황에 존재가 처하게 되었을 때, 위 시에서 보듯이 쇠재두루미가 ‘암벽 칼날 / 향해서 나래치’는 것처럼 자기의 전 존재성을 걸고 제 존재의 나약함과 저열성을 털어버리고 보다 지고한 상태로 치솟아 오른다. 그 끝이 비록 죽음일지라도 보다 지고한 경지로 나아가려는 열망과 의지를 꺾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김완하가 생각하는 벼랑의 정신인 셈이다. 쇠재두루미의 이러한 정신으로 벼랑은 더욱 그 정신적 수위를 높일 수 있다. 그러므로 ‘절정’은 인간이 가닿을 수 있는 정신의 지고한 경지를 이름하는 것이다. 그 절정의 경지에는 이 시로 볼 때 힘들어도 ‘나뭇가지에 앉지 않는’ 강인한 정신과 열망을 갖고 존재만 갈 수 있다.
이 시를 보고 우리는 이육사의 『절정』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이육사의 절정은 일제하 극한적인 상황에서 자신의 목숨으로 그 상황을 타파할 수밖에 없을 때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자리란 의미를 갖고 있다. 김완하의 시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거는 상황은 아니지만 극한적 상황에 대응한 초극의지로서 강인한 의지의 표출은 동일하다. 둘 다 자연의 심상으로서 ‘절정’이 주는 이미지와 그 의미의 형상성이 잘 녹아들어 있고 내용과 형식의 긴장미가 잘 드러나고 있다.
김완하의 이러한 벼랑의 관심은 정신의 성숙 단계와도 관련돼 있다. 주체인 인간은 다루는 대상에 의해 그 심리적 성숙의 단계를 판정받을 수 있다고 바슐라르는 말하고 있는데, 모래나 흙을 가지고 노는 것과 벼랑을 타는 것은 같은 것일 수 없다. 김완하가 그의 의식의 투사로서 벼랑을 떠올리는 것은 그의 의식의 성장 단계가 평범한 수준을 뛰어넘어 초인의 경지를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때문에 벼랑은 그의 현실적 삶의 장소가 아니라 의식적 지향으로 ‘불려온 것’이다. 세속적 삶의 안락이나 나태함에 물들지 않겠다는 강인한 의지가 물질화된 것이 ‘벼랑’ 이미지인 것이다.
이러한 벼랑의 특성을 나는 그의 4번째 시집 『허공이 키우는 나무』 해설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때 그의 시에 나타난 벼랑 이미지를 두고 “삶은, 그의 운명은 항상 ‘시간의 벼랑’위에 자신의 전 존재성을 올려둠으로써 언제나 생의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위기감과 절박함으로 살게끔 한다. 그것은 생의 무의미와 무료함으로부터 자기를 지켜내는 일이자 보다 지고한 존재로의 고양을 의도하는 의지적 행위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벼랑은 하나의 도전적 정신으로, 삶의 무의미에 저항하기 위한 강인한 정신을 상징한다.”고 하였다. 이번 시집에 나타난 벼랑의 의미도 크게 보아서 이 지적에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번 시집에 나오는 벼랑은 단순히 가파르고 아찔한 수직의 높이를 가진 것에서 그치지 않고 ‘암벽의 칼날’에서 암시하고 있듯 ‘칼날’의 정신을 내비치고 있다는 점에서 조금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벼랑의 정신이 보다 치열하게 안으로 응어리져 날이 서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벼랑이 분리와 날섬을 통해 배척의 의미로 흐르는 것은 아니다. 벼랑은 그 가파름의 형상으로 나약한 존재들의 무름을 단련시키는 의미도 갖고 있다. 다음 시가 바로 그런 의미를 띤다.
비탈에 이르러서
형제는 씨익 웃는다
비탈길을 함께 올라 힘차게
따뜻한 둥지로 가고 있었다
하늘에 별 키득대고 있었다
─ 「비탈길」 부분
이 시에서 비탈길은 서로 다투던 형제들로 하여금 실존의 처지를 깨닫게 하여 화합케 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즉 존재를 화해시키고 단련시켜 존재의 완성을 이루게 하는 매개 고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 존재의 완성에는 별들도 키득대고 있음을 두고 볼 때 천지와 조화를 이루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이때 비탈, 즉 벼랑은 존재의 결핍을 환기하여 존재의 존재성을 완성시켜주는 근원적 물질이다. 크게 보아서 벼랑의 정신과 통하나 힘의 작용면에서는 보다 은밀하고 따뜻하게 존재의 존재성에 스며들고 있다. 그러나 이 시도 비탈이 주는 위기감이 없다면 이러한 존재 전환의 단초가 생기지 않았으리라는 점에서 벼랑의 정신은 여전히 유효하게 작동된다 할 수 있다.
그 점에서 김완하의 시적 상상력은 이제 곡선이라기보다 직선인 모양새를 취한다. 그의 시들은 벼랑, 비탈, 허공의 이미지를 거느리며 칼날이라는 이미지로 ‘각角’을 세우고 있다. 이때의 각은 대립, 갈등의 각이 아니라 의식의 첨예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각이다. 일상의 흐리멍덩한 자아는 의식의 날선 자아의 개입으로 존재의 질적 전환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각의 심상을 잘 보여주는 시편이 다음 작품이다.
블라인드 칼날의 각을
조금만 바꾸어 놓아도
밝기는 분명 다르고
구석까지도 환한 순간이 온다
그 어디에 숨어서
짙은 심연을 울리는 당신
내 방으로 오는
빛과 어둠의 간격을
칼날 하나로 고르는가
─ 「순간」 부분
각의 정도에 따라 사물의 음영과 밝기가 달라진다. 이는 곧 의미의 유무를 칼날같이 가르겠다는 의지 그것이다. 이것은 시적 화자가 무의미와 의미의 질적 여부를 냉정한 눈으로 판단하겠다는 의지의 표출이다. 그런데 이런 예리한 구분을 가능케 하는 대상이 ‘그 어디에 숨어서 / 짙은 심연을 울리는 당신’으로 밝히고 있다. 이 시에서 ‘블라인드 칼날의 각’은 당신이 행하는 시간의 각, 곧 ‘순간’에 의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당신은 시간을 주재하는 존재로서 초월적 존재, 즉 신이다. 신의 각의 조율에 시적 화자는 민감하게 반응하며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한다. 그 의미의 탐색은 앞에서 보았던 벼랑의 자세로 할 것은 불문가지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시간의 각이 바로 벼랑이 아닐까 하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한시라도 방심과 나태로 살지 않겠다는 의지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는 실제 「시간의 각」이라는 시가 갖는 의미를 통해 추출할 수 있다. 그 작품은 다음과 같다.
내가 왼쪽으로 돌아섰을 때
그는 오른쪽으로 돌아간 뒤였다
<중략>
이렇게, 어긋나는 것은 한순간일 뿐
점점 다가서면 멀어지는 법이다
─ 「시간의 각角」 부분
이 시에서 각은 운명의 어긋남이다. 순간으로 인해 점점 멀어지게 되는 필연성을 보여주고 있다. 때문에 시간의 각은 매우 섬세하고 예민하게 접근해야 되고 그것에 대응해야 한다. 마치 벼랑을 타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순간 순간이 바로 삶의 질적 깊이와 승화를 매개하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이는 앞에서 보았던 벼랑이나 비탈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시간의 각이 갖는 어떤 깨어남이 바로 존재의 질적 전환이나 비약을 가능케 하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김완하의 시는 매우 의식이 곤두서 있는 셈이다. 존재의 질적 초월을 위해 그 어떤 계기 하나, 분위기 하나라도 놓쳐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에 싸여 있다. 의식이 광섬유처럼 올올이 서 있을 때 벼랑은 또 다른 해방을 주는 기쁨이 된다는 것을 말해주기라도 하는 것일까? 하나의 의식이 서 있으면, 또는 여러 개의 의식이 서 있으면 그 풍경이 사뭇 듬성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의식이 빽빽하게 칼날로 직립해 있다면 그 풍경은 장관이 아닐 수 없다. 김완하의 모든 시들이 이렇게 의식의 날을 빽빽하게 세우고 있어 그 양상이 매우 엄정하면서 천상적이다.
그 천상적 의식의 올 하나를 지난 시집에서 찾아보자면 다음과 같은 작품이 아닐까?
순간, 벼랑 뛰어내려 하늘로 솟구친
매 한 마리
능선을 타고 맴돌다 날갯짓 멈춘다
사이, 허공이 팽팽하게 긴장한다
─ 「一瞬」 (『허공이 키우는 나무』) 부분
일상적 존재에게 벼랑은 위험이자 구속으로만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세계의 일면성을 초월한 사람은 사물의 양면성을 이해하는 차원에서 벼랑의 단면에만 그 인식을 머물게 하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위 시 「一瞬」은 벼랑이 갖는 이면의 의미, 곧 ‘매’의 입장에서 볼 때 ‘자유로운 비상’이란 의미를 갖는다. 더욱이 벼랑의 연장선상인 ‘허공이 팽팽하게 긴장한다.’는 인식은 자유로운 비상이 매우 탄력 있고 재미있는 놀이임을 보여준다. 그것은 모든 자유로운 존재가 그렇듯이 일상의 억압에서 벗어나 진정한 존재가 되었을 때 가질 수 있는 신명의 감정과 통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구절은 매우 놀랍고 신선한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 김완하의 시적 정신이 매우 높은 경지에 올라 있음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부분이라 할 것이다.
재미있는 점은 위 시는 이번 시집보다 먼저 쓰여졌지만 이번 시집에 발표된 「뱀」이라는 작품과 내적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상상력의 논리로 보자면 「뱀」의 마지막 구절 ‘끝내 길을 빠져나가’는 그동안 뱀이 다니던 길을 벗어났다는 의미에서 사라져버린 뱀이 있어야 할 곳은 허공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허공으로 나아간 뱀의 이야기는 위 시의 ‘매’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실제 뱀이 탈피를 하고 허공으로 나아갔다면 날개가 돋아났을 것을 상상할 수 있다. 파충류가 날개가 생겨 익룡이 되었고 그 익룡의 후예가 새로서 매라면 상상력의 논리가 그렇게 과학적으로도 영 틀린 것은 아니다. 상상력의 차원에서는 확실히 존재의 질적 전환을 이루었다.
문제는 위 시에서 제목이 갖는 의미다. 이번 시집에서도 「순간」이라는 제목이 시간의 각이라는 의미를 지녔듯이 「일순一瞬」 역시 시간의 각을 여지없이 잘 드러낸다. 김완하의 의식은 매순간마다 의식의 섬모를 올올이 세워 자유로운 정신으로 비상하고자 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마치 칼날 위에서 의식의 한순간도 빈틈을 만들지 않으려 수행하는 고행승과 같다. 아니 앞의 『절정』시에서 본 바 있는 것처럼 히말라야 산속에서 산의 지고성을 내면화하기 위해 구도하고 있는 요기와 같다고나 할까. 그러므로 매순간 자기 존재의 미숙한 부분을 벗고 보다 지고한 존재로 질적 전환을 하고자 하는 상상력, 제 존재의 미숙성을 껍질이나 껍데기로 만들어 훌렁 벗어버리는 이 상상력을 우리는 ‘탈각脫殼의 상상력’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다음 시처럼 김완하가 자기 의식을 매순간 단련시키기 위해 자기 안에 벼랑을 두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너와 나의 섬 사이는
얼마나 벼랑이 깊은가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날카로운 부리로 허공을
쪼아 올리는
나 또한 네 안의 벼랑
허리를 곧추세워
섬을 쌓는다
너와 나 닿아 열리는
저 물길 바다도
가파른 벼랑의 절정 속에
허공으로 와 닿는다
─ 「내 안의 벼랑」 부분
이 시는 김완하 스스로 제정신을 단련시키기 위해 만든 자기단련설명서인 셈이다. 나태해질수록 ‘날카로운 부리로 허공을 / 쪼아 올리는’ 의식의 섬모를 올올이 흔들겠다는 의지가 넘쳐나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시인 김완하는 시로써 자기의식을 날 세움으로써 만장의 벼랑을 만들고 그 안에서 존재의 존재성을 분명히 인식하여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 고뇌하는 사람이라 볼 수 있다. 시로써 자기 구도의 세계에 한 치의 빈틈도 만들지 않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시인의 엄정함을 새삼 물질과 향락에 덮여 사는 우리들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르나 그 의식의 치열함에 새삼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시가 가닿는 궁극이 궁금해지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김경복 ------------------------------------------
부산대 국어국문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문학박사), 1991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및 같은 해 계간지 『문학과 비평』 평론 신인으로 등단, 저서 『풍경의 시학』, 『한국 아나키즘시와 생태학적 유토피아』,『서정의 귀환』, 『생태 시와 넋의 언어』, 『시의 운명과 혼의 형식』, 『한국 현대시의 구조와 의식지평』, 『시와 비평의 촉기』 등. 현재 경남대 국어교육과 교수. 계간 시전문지 『신생』 편집주간, 『시에』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