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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수필과비평 2014년 1월호, 월평] 주체(작가)와 객체(대상)의 관계양식 - 유한근

신아미디어 2014. 11. 8. 22:56

"문학의 주체를 작가라고 한다면, 문학에 있어서의 객체는 바로 문학적으로 파악되고 인식된 객관 세계의 그 모든 것, 문학의 모티프, 혹은 제재가 되는 모든 것을 의미하게 된다. 이를 어떤 이는 문학적 대상이라고도 한다. 작가와 문학적 대상의 관계에서 전자가 주체라면, 후자는 객체인 셈이다."

 

 

 

 

 

 

 주체(작가)와 객체(대상)의 관계양식        유한근


 1.
   철학에서 주체와 객체는 하나의 개념으로 다루어지는 인식론의 중심적인 내용이다. 이들의 중심적인 논의는 첫째, 어떻게 주체가 객체를 알 수 있게 되는가의 문제이고, 둘째는 존재론적으로 양자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경험철학에서는, 세계는 사물들로 구성되어 있고, 정신은 관념들로 구성된다고 보고 있다. 정신은 세계를, 관념은 사물을 재현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에 비해 관념철학에서는, 관념이 객체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을 구성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후기 구조주의나 후기 경험주의에서는 주체와 객체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으로부터 단절을 시도하거나 존재론이나 인식론의 엄격한 개념으로부터 벗어나 상대주의와 연관을 시키고 있다. 아니면 객관주의나 상대주의를 초월하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니체는 “주체와 대상(객체)은 서로 작용하고 또는 반작용하는 관계를 맺는다.”(≪유고≫에서)라고 본다. 여기서 주체와 객체는 서로 ‘구별’은 되지만, 인식 활동상 서로 ‘분리’될 수는 없는,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를 맺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문학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다.
   문학의 주체를 작가라고 한다면, 문학에 있어서의 객체는 바로 문학적으로 파악되고 인식된 객관 세계의 그 모든 것, 문학의 모티프, 혹은 제재가 되는 모든 것을 의미하게 된다. 이를 어떤 이는 문학적 대상이라고도 한다. 작가와 문학적 대상의 관계에서 전자가 주체라면, 후자는 객체인 셈이다.

 

   한바탕 고통을 겪고 지나간 종과 당목의 모습이 숙연하게 다가온다. 묶어 놓은 줄을 푸는데 당목의 몸이 종 쪽으로 스르르 기운다. 종소리의 여음이 손끝으로 전해오는 듯하다. 소리를 묶어 두었구나. 묶인 건 소리였구나. 여태까지는 소리의 주인으로 종의 공덕만 앞세웠는데 당목의 의미를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름다운 공모가 만들어낸 소리였다. 종이 잠들지 못하고 울린 것은 제 소리만 하려는 것이었을까. 절간 한편에 서서, 큰 바람 앞에 어쩌지 못하고 고통을 겪어야 하는 말 못하는 뭇 생명들의 아픔을 보며 대변하는 소리가 아니었을까 싶다. 세상에는 음모를 지닌 힘 있는 자들이 바른 소리를 묶어버리기도 한다. 얼마나 많은 소리다운 소리가 그들의 횡포에 묶이고 사라지고 했겠는가. 개인사 울음이 아니다. 공생 공존의 울음이다. 세상의 아픔을 위무하고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 종과 당목이 합세하여 빚어내는 소리다.

-이양주의 <종과 당목撞木>에서

 

   이양주의 <종과 당목撞木>에서의 주체가 작가라면 객체는 ‘종과 당목’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경우에는 주체가 ‘종’이 되고 ‘당목’이 객체가 될 수 있다. 이 두 가지 시각으로 볼 수 있는 이 작품의 모티프는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작가는 이 수필의 끝 부분에 이렇게 쓴다. “나는 누군가에게, 더 나아가 세상의 당목이 되고 싶다. 그리고 내가 종이라면 더 더욱 좋겠다.”는 토로가 그것이다. 사찰의 범종은 당목으로 쳐야 소리를 낸다. 당목이 없으면 범종 소리는 없다. 범종은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울린다. “사람들이 번뇌에서 벗어나 지혜가 생기게 하고 지옥중생까지 제도한다는 의미”에서 사찰에서 행해지는 사물의식이다. 그런데 작가는 사찰에서 종각 기둥에 묶여져 있는 ‘당목’을 보게 된다. 종각과 종과 당목인 주체인 작가에게는 객체이다. 그 객체 중 중심은 당목인 셈이다. 그런데 위에 제시된 인용문에서도 나타나지만 이 수필의 주제인 ‘공생 공존의 울음’을 내기 위해서는 주체와 객체를 종과 당목으로 설정하고 이해하게 될 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게 된다. 종이 주체이고 당목이 객체일 때, 객체의 도움 없이는 주체가 본분의 일의 해낼 수 없고, 그 반대의 경우, 당목이 주체이고 종이 객체일 때, 객체가 없으면 주체 또한 본분의 일을 해내기 못하게 된다. 그래서 ‘공생 공존의 울음’이라는 언어의 성립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문학 작품을 이해하는 데 철학적 논리는 어떤 경우는 번거롭고 이해를 왜곡시킬 수도 있다.
   이 수필에서 주체는 작가이며 객체를 종과 당목으로 설정하고 이해하는 것이 작가가 의도하는 바 메시지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이 수필의 결말 부분에서 말한 바 “중요한 건 종과 당목과 같은 아름다운 인연의 고리”가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가 그것이다. 하지만 이 수필의 모티프는 다른 데 있다. 주체가 객체인 종과 당목을 자기화하여 작가의 마음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스님에서 “저 종 좀 풀어주세요.”라고 말한다. 그것은 소리 내지 못하도록 종각 기둥에 묶어준 당목을 풀어달라는 말이다. 종소리를 들어보고 싶다는 욕구이다. 결국 작가를 종을 치게 된다. “나는 있는 힘을 다 모아 종을 쳤다. 멋진 때림이었다. 종소리는 먼저 내 몸을 울리고 세상으로 퍼져나갔다. 종을 통해 내가 울린 소리가 세상으로 뻗어 나간다는 건 근사한 일이었다.”가 그것이다. “종을 통해 내가 울린 소리”는 작가의 문학작품이다. “아무도 모르게 아침을 밝히고 세상 사람들을 깨우”치는 그 종소리는 작가가 쓴 작품이어야 한다. 이러한 작가 욕구가 내포되어 있다. 그것이 곧 인연인 셈이다.

 

   브라질의 세계적 작가 파울로 코엘료에게 영국의 메일 온 선데이(The Mail on Sunday)지의 기자가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 만일 오늘 죽는다면 어떤 장례식을 원합니까?” 수 차례 죽음의 손길이 스쳐가는 것을 경험한 그는 “글쎄요. 내 뜻대로라면 장례식은 없습니다. 화장을 하여 내 아내에게 스페인의 엘 세브레이로라는 곳에 뿌려달라고 했으니까요!” “그럼 묘비명을 쓴다면 어떤 말이 좋겠습니까?” “화장을 하니 묘비명은 필요 없겠지만 굳이 묘비에 새길 한 문장을 택하라면 이 말이었으면 좋겠군요.”
   “그는 살아서 죽었다.”
   (……)
   죽음을 해결하는 법은 육체의 재생이나 부활에 있지 않다. 오직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갈망과 집착을 깨닫고 버렸을 때 죽음의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죽기 전에 죽는다는 것은, 나를 알고 태어난 원인과 죽어서 갈 곳을 알게 된다면, 옷을 바꿔 입듯이 언제나 홀가분하게 가고 싶을 때 갈 수 있는 것이 죽기 전에 죽는 것일 것이다. 역대의 성인들이 그랬고 진리를 깨달은 수많은 선지식들이 모두 죽기 전에 죽은 분들이었다. 숭고한 그들의 죽음에는 어떤 제삼의 힘이 작용하지 않는다. 모두가 스스로 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원찬의 <죽기 전에 죽은 개미> 결말 부분

 

   이원찬의 수필 <죽기 전에 죽은 개미>의 주체는 작가이고, 객체인 문학적 대상은 ‘개미’이다. 고흥 수락도에서의 안거 때 만난 왕거미. “큰 왕개미 한 마리가 바다를 향해 가는 것이 눈에 띄었다. 별 먹이도 없는 땡볕에 저 녀석이 왜 바다로 가는가 하고 지나쳤는데, 절벽 밑에서 다시 돌아올 때 보니,” “바닷물을 뒤집어쓰면서도 여전히 바다를 향해 가고 있”는 왕개미. 죽음을 알면서도 바다로 가는 개미. 스스로 바닷물에 몸을 맡기는 개미가 객체이지만, 작가인 주체는 그 객체에게서 자신의 마음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파울로 코엘료의 묘비명 “그는 살아서 죽었다.”라는 문구, 그 주체인 코엘료와의 아이엔티티를 찾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가가 정작 말하고 싶은 것은 위의 인용문 “죽기 전에 죽는다는 것은, 나를 알고 태어난 원인과 죽어서 갈 곳을 알게 된다면, 옷을 바꿔 입듯이 언제나 홀가분하게 가고 싶을 때 갈 수 있는 것이 죽기 전에 죽는 것일 것이다.”라는 말이다. 죽음에 대한 선험의식, 그것을 통해 죽음에 대한 초월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뮈토스와 로고스는 희랍어로 말의 뜻이었다. 뮈토스는 ‘이야기’로, 로고스는 ‘이성’을 거쳐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으로까지 의미의 확충이 이루어졌다. 요한복음 첫마디에 나오는 ‘태초의 말씀’도 로고스를 가리킴은 물론이다.
   요한복음의 언급은 말이야말로 세상의 창조자라는 뜻이다. 당연한 결과로 세상의 파괴자도 말이 아니랴? 시바가 창조와 파괴의 신이듯 말이다. 빛이 밝을수록 그늘도 짙어지는 법이라면 말의 위대한 창조성과 치명적 파괴성을 두말해 무엇하랴 싶다.
   무엇보다 바벨탑은 명심보감해야 할 타국지탑他國之塔이다. 세상이 무너지기 전에 말이 먼저 혼란에 빠진다는 기념비적인 신화인 까닭이다.
   단적으로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인 춘추전국시대도 다름 아닌 말의 암흑시대였다. 지록위마指鹿爲馬의 언어폭력이 끝없이 확대재생산되었던 말의 절망시대였음이다.

-황인용의 <혼잡통행료> 서두 부분

 

   위의 황인용 수필 <혼잡통행료>의 시작 부분으로 읽었을 때, 이 수필은 ‘뮈토스’와 ‘로고스’ ‘요한복음’ ‘바벨탑’의 ‘타국지탑’ ‘춘추전국시대의 지록위마의 언어폭력’ 등 유식함을 자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는 언어의 “창조성과 치명적 파괴성”과 ‘언어폭력의 확대재생산’되는 말의 절망시대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수필의 제목 ‘혼잡통행료’라는 말과 연결시켜 보면, 이 수필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불통의 언어’, 진실을 왜곡하고 굴절시키는 언어에 대한 경계심을 주기 위한 수필로 보인다. 그러니까 이 수필의 주체는 작가이고, 객체는 ‘말, 언어’인 셈이다. 이를 공간적으로 확대하면, 혹은 역사 사회학적 상상력으로 확대하면 이 수필의 객체는 ‘사회’의 모든 것일 수도 있다. 그럼 점에서 이 글을 미셀러니가 아닌 에세이적인 글이다. 칼럼에 가까이 다가간 수필이다.


 2.
   이제, 미셀러니적인 수필에서의 주체와 객체는 어떤 관계양식을 가지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작가가 작품 쓰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그 대상에 대한 애착이나 의미부여, 혹은 감동받았을 때, 그리고 상징·은유 구조로 적당할 때 개체로 설정하기 마련이다. 이런 경우의 수필을 몇 편 살펴보자.

 

   물레는 어머니의 삶이었다. 겉모양은 둥그스름하지만 물레 줄은 팽팽했던 것처럼, 당신은 순순하게 사셨지만 속은 늘 물렛줄 같은 긴장감에 차 있었다. 가족들의 건강을 도우면서 자신의 영화는 돌아볼 틈조차 갖지 못하셨다. 라마교의 마니차도, 물레방아도 자신을 돌려 누군가를 위하는 삶이지 않는가. 물레를 돌리면서 어머니는 식구들을 위해 노래하듯 주문이라도 외지 않았을까. 때로는 절망스런 마음도 둥글게 다스리려 애썼을 것이다.
   변함없이 살아온 것도 잘못일까. 남을 위해 평생 붙박이로 살아온 물레는 정작 자신은 변화하지 못한 채 길가 골동품 가게에 멍하니 나앉은 신세가 되었다. 변화는 생명이라는 말도 들린다.
   물레는 여인들의 애환이 깃든 혼자 궁실거리는 민요 같은 노래를 기억한다.

-정종부의 <물레>에서

 

   정종부의 <물레>는 이렇게 시작된다. “골동품 가게로 따돌린 물레는 서먹서먹한 표정을 하고 있다. 낯선 자리가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아 보인다”가 그것인데, 작가는 골동품 가게에서 ‘물레’와 만난다. 그리고 그 물레의 자리가 본디의 제 자리가 아님을 느낀다. 화자인 작가가 만난 대상은 ‘물레’이다. ‘물레’는 주체인 작가의 객체인 셈이다. 그러나 그 뒤를 계속 읽어 나가다 보면 그 물레가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어머니의 삶으로 인식한다. 물레로 표상되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기 위한 수필임을 알게 된다. “남을 위해 평생 붙박이로 살아온 물레”에게서 어머니의 삶을 환기하는 것이다. “자신은 변화하지 못한 채 길가 골동품 가게에 멍하니 나앉은 신세가”된 물레에게서 ‘여인의 애환’을 느낀다. 그리고 “변화는 생명”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수필의 마지막 문장인 “물레를 돌리는 일은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일은 아니다. 물레는 변화에 굼뜬” 주체인 작가 자신을 일깨워 준다. 이 내용으로 볼 때, 다른 시각에서 보면 어머니의 표상인 주체가 되고 자신이 객체가 될 수 있음을, 다시 말하면 주체와 객체는 문학작품 속에서는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나는 오늘도 손바닥만 한 사진엽서에 만년필로 편지를 쓴다. 몇 해 전 흠모하는 J 작가님이 보내준 워터맨(Water Man)만년필이다. 서툰 컴퓨터 글쓰기를 한 뒤 멀어진 게 손글씨다. 펜촉이 다 닳아버린 손때 짙게 묻은 파커(Paker)와 파이로트(Pilot) 만년필 몇 자루는 소임을 다하고 책상 서랍 속에서 골동품 대우를 받으며 편히 쉬고 있다. 한때 잘나가던 소싯적을 추억하면서…….
   어릴 때 문화연필은 참 좋은 친구였다. 종이가 절대 부족했던 그 시절, 글쓰기를 좋아했던 나는 달력이나 회 포대 등에 글씨 쓰고 그림 그리며 낙서하기를 무척 즐겨었다. 우리 고장 전주에서 생산되던 향나무 냄새 그윽한 문화연필은 으뜸이었다.

-김재환 <손글씨>에서

 

   김재환의 수필 <손글씨>는 위에서 보듯이 손 글씨 쓰는 도구인 만년필, 볼펜, 연필에 대한 예찬의 글이기보다는 ‘글씨’에 대한 작가의 인식을 편하게 쓴 수필이다. 이 수필의 주체는 작가다. 그리고 객체는 만년필이라기보다는 ‘손글씨’이다. 작가가 이 수필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글씨는 곧 그 사람의 인격이라 했다. 그 사람의 정성이며 영혼”임을 환기시켜주기 위해서이다. “글씨 쓰는 과정이 수양이며 득도이”며, 자신과의 갈등이지만 즐거움이라는 것. 그래서 욕심을 부리지만, 그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우둔함” 때문에 글씨 쓰기의 즐거움은 반감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기 위해 쓴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강미나의 <숟가락>을 보자.

 

   어머니는 출산하면서 큰 병을 앓았다. 갓 눈뜬 아가에게 애달게도 초유조차 먹일 수 없었다. 엄마는 불은 젖을 먹이지 못해 젖몸살을 앓고, 젖배 고픈 아기는 단잠을 못 자 보챘다. 아기를 업고 동네 젖어미네로 젖을 빌러 가면, 꿀떡꿀떡 마른 논에 물 들어 가는 소리를 냈다. 젖 맛을 알아버린 아기는 젖어미 젖꼭지를 물고 놓지 않으려고 떼를 썼다. 그도 모자라 입을 오물거리면 밥물을 넘겨 떠먹이고, 끓인 쌀죽을 입안에서 녹여 먹였지만 아기는 통 여물지 않았다. 검부러기마냥 해깝아서 안을 때마다 어머니는 애가 달았다.

-강미나의 <숟가락> 서두 부분

 

   여기까지 읽으면 이 수필은 어머니의 모성에 대한 수필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 수필의 제목이 <숟가락>이기 때문에 객체가 ‘어머니’라는 생각은 잠시 접고 그 다음을 읽게 된다. “아버지는 나무를 다듬어 숟가락을 만들어 주었다. 처음 손에 쥐어준 나무 숟가락. 아기는 애착이 없었다. ‘오로로 까꿍’ 한 술 꼴딱. ‘까르르 웃을 때마다 아’ 한 입 꼴딱. 포로롱 날아가는 새를 보며 벌린 입으로 무른 밥을 떠 넣었다. 아가는 제 기분이 싫으면 입속에 들어온 숟가락을 꽉 물고 놓지를 않았다.”에서 이 수필은 숟가락이 문학적 대상(객체)임을 알게 된다. 그 뒤로 숟가락과 얽힌 유년시절과 혼수의 은수저 이야기, 어머니 임종 때의 숟가락 이야기로 전개된다. 여기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임종 때의 이야기다. 어머니의 밥은 죽으로 바뀌고, 숟가락조차도 무겁다고 하시여 ‘옻칠한 나무 숟가락’으로 바뀌었지만, 어머니는 “제 몸을 내 준 빈 숟가락으로 산자락을 엎고 가셨다”는 부분이다. “어머니는 닳고 닳은 숟가락”이라는 비유는 더욱 감동적인 표현이다. 이 수필은 어머니의 숟가락을 테마로 하여 쓴 수필인 셈이다. 주체는 어머니이고 객체가 숟가락인 것을 작가가 대신한 화자로 해서 쓴 수필이다.

 

   도마뱀은 보름간의 잠행에서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굶어 꼼짝 못하고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점차 땅 냄새를 맡는 시늉을 하더니 몸을 움칠거리면서 서서히 풀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우리 집에서 보름간 먹지 못하고 굶은 몸으로 나갔으니 가슴이 아팠지만 저 살 곳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본 그때의 흐뭇함과 기쁨은 잊을 수가 없다.
   이제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때 그 도마뱀은 지금쯤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사랑하는 지 애비나 지 에미를 만나 영양가 있는 육식을 먹고 기력을 회복했길 빈다. 그리고 다시는 우리집에 잠행해 들어오지 말기를 바란다. 한번으로 족하다.

-김원의 <길 잃은 도마뱀> 결말 부분

 

   김원의 <길 잃은 도마뱀>은 “우리 집에 도마뱀 한 마리가 들어왔다”로 시작한다. 나를 따라온 도마뱀을 잡지 못하고 작가는 하와이 크르주 여행을 떠나 보름 동안 집을 비우게 된다. 돌아와서 발견한 상황이 위의 인용문이다. 밖으로 내보낸 도마뱀에 대한 작가의 감회로 이 수필은 끝난다. 작가가 사는 미국 서부지역의 기후와 도마뱀 이야기와 이범선의 소설과 도종환의 수필 이야기를 통해서 도마뱀의 눈물 나는 사랑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수필의 객체가 되고 있는 대상에 대한 인식은 좀 더 깊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도마뱀은 지금쯤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하는 의혹은 차라리 인간적이라 감동이다. “지 애비나 지 에미를 만나 영양가 있는 육식을 먹고 기력을 회복”했으면 기원하는 마음은 이 수필의 객체인 이범선과 도종환의 도마뱀 이야기들이 모티프를 보조하여 그 감동은 배가된다.

 

   올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태양의 뜨거운 열기를 밀어 날리듯 태풍이 두어 차례 지나간 후 아침나절에 스웨터를 찾게 된다. 여름옷 정리를 하면서 스웨터를 찾다가 오래된 할머니의 스웨터가 눈에 띄었다. 이 옷은 삼십여 년 전, 내가 첫 월급을 타면서 월급의 반이 넘는 가격으로 산 양모 100% 순도의 수제품인 옷이다. 아직도 실의 짜임이나 조직이 한결같아 가지고 있다. 할머니는 이 옷을 좋아하시기는 했으나 무겁다고 집에서 잘 입지는 않았다. 처음 선물이라 비싸면 다 좋은 것인 줄 알았던 나의 실수였다. 오히려 나중에 사 드린 얇은 보라색 스웨터를 더 좋아했다. 할머니는 연가지색이 제일 예쁘다고 하셨는데 그게 연보라색인 줄도 나중에 알았다. 그 당시 내가 알고 있던 색은 크레파스에 명명된 색으로만 인지되었기에 한동안 소라색, 갈색, 연가지색, 국방색 등이 실제 어떤 색의 이름인지 잘 연결시키지 못했었다. 지금은 연가지색을 보며 할머니색이라고 명명한다.

-안현진의 <할머니> 서두 부분

 

   안현진 수필 <할머니>의 주체는 작가이고, 객체는 할머니이다. 나는 앞에서 “문학의 주체를 작가라고 한다면, 문학에 있어서의 객체는 바로 문학적으로 파악되고 인식된 객관 세계의 그 모든 것, 문학의 모티프, 혹은 제재가 되는 모든 것을 의미하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 이를 상기하고 안현진의 이 수필을 볼 때, 객체는 문학적으로 파악, 인식된 제재의 모든 것인 할머니에 대한 기억들도 포함된다.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스웨터’, 할머니색이라 명명한 연가지색, 은비녀, 바늘쌈지, 할머니의 영화이야기, 음식 맛, 특히 식혜, 그리고 서양 여자 얼굴인 신문 쪼가리 사진을 자신의 어머니를 닮았다고 보물처럼 여기시고 간직하는 행위 등등의 삽화, 이 모든 것들은 객체이며 대상이다. 이를 통해 그리운 할머니의 모습을 기억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주체는 객체의 도움으로 작가 자신이 말하고 싶은 정서나 사상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글의 서두에서 철학에서의 주체와 객체의 중심 논의는 주체가 객체의 정체성 문제와 존재론적인 양자의 구성문제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시각에 맞추어 수필을 탐색한 결과, 철학과는 다른 문제임을 알 수 있었다. 문학의 주체는 화자의 문제이며 객체는 바로 모티프의 문제라는 것이 그것이다.


 

유한근  ----------------------------------------------------

   동아일보 신춘 평론으로 등단. 시집 ≪사랑은 흔들리는 행복입니다≫ 외. 평론집 ≪문학의 모방과 모반≫, ≪현대불교문학의 이해≫, ≪한국수필비평≫ 등 다수. 명상언어집 ≪별과 사막≫. 동화집 ≪무지개는 내 친구≫ 등 저서 논문 다수. 만해불교문학상, 한국문학평론가협회상, 신곡문학상 대상, 여산문학상 등 수상. 현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교수. ≪인간과문학≫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