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수필과비평 2014년 1월호, 사색의 창] 안개 속으로 - 전해주
"오후 6시가 훌쩍 지나고 날은 저물어 길조차 구분하기 힘들었다. 드디어 고대하던 성판악휴게소의 불빛이 보였다. 순간, 하산 길의 막바지에서 나를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오직 나 자신의 도전에 묘한 환희로 가슴이 벅찼다. 나는 백록담을 확연히 보지는 못했지만 기어코 한라산을 다녀왔다는 성취감에 빠져들었다."
안개 속으로 - 전해주
그 산을 오를 수 있을까.
해발 1,950m. 정상까지는 9.6km. 하늘의 은하수를 잡아당길 수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한라산이다. 한번 도전해보기로 마음먹고 미리 산행연습에 들어갔다. 미끄러지고 넘어지기를 여러 차례, 양 허벅지에 시퍼렇게 든 멍이 희미해질 무렵이었다.
제법 쌀쌀한 늦가을이다. 나는 마침내 배낭을 꾸려 자신만만하게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튿날 오전에 비가 살짝 뿌린다는 일기예보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까짓 가랑비쯤이야. 강풍으로 일기가 사나운 날 눈이 와도 산행하는 이들을 화면으로 많이 보았다. 그럴 때마다 저들처럼 내가 힘든 산행을 얼마나 참고 견딜 수 있을지 스스로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한라산 아래에 숙소를 잡고 새벽부터 일어나 서둘렀다. 성판악 휴게소에 들러 김밥 두 줄을 사서 배낭에 넣고 등산로에 들어섰다. 울창한 숲 속으로 외길이 뚫려 있고 길 양옆으로는 조릿대 숲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아마도 이곳의 공기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맑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 폐 속이 말끔히 청소가 되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에는 완만하던 길이 갈수록 경사가 심해지고 울퉁불퉁한 바위로 험해졌다. 수시로 발목이 꺾이곤 하여, 혹시 발목 부상이라도 입을까 마음이 불안했지만 그럴수록 나는 마음을 단단히 다졌다. 한발 한발 바위 계단을 오를 때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진달래밭이 펼쳐져 있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진달래밭대피소에 도착했다. 8시쯤 출발했는데 벌써 12시가 넘었으니 속도가 조금 느린 편이었다. 가져간 김밥으로 점심을 대신하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런 다음 방수재킷을 꺼내 입고 신발 끈을 다시 조여매고 나서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
정상까지는 2.3km, 점차 바람이 거세지고 간간히 빗방울이 비쳤다. 거기다 시나브로 안개가 출몰해서 내 시야를 지웠다. 나무계단길이 미로처럼 끝없이 이어졌다. 안개 낀 미로 속에서 나는 오로지 정상에 오르겠다는 일념으로 앞으로 나아가기에 급급했다. 한 치 앞을 모르는 우리 인생처럼 천 길 낭떠러지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길이었다. 그렇게 한 시간 가까이 오르니 갑자기 숲이 사라지고, 희미하게나마 시야가 트였다. 여기서부터 산은 온통 초원이다. 정상까지는 아직도 1km가 남았다. 바람은 더욱 거세게 몰아치고 비까지 섞여 몸을 가누기조차 어려웠다.
한라산을 가볍게 보았던 내가 얼마나 교만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계단 아래로 땅에 엎드려 강한 바람을 이겨내는 풀들이 눈에 들어 왔다. 이곳에서는 키 큰 나무는 살아남을 수 없다. 강한 채 머리를 꼿꼿이 들고 큰 키를 뽐내다가는 뿌리째 뽑힐 것이다. 올곧은 소나무보다 잡초의 강인함이 새삼 경이로웠다. 세찬 바람을 견디고 새로운 봄을 꿈꾸는 풀들은 내게 한없이 겸손해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몸이 휘청거려 잠시도 쉴 수가 없었다. 체온이 급격히 내려가며 손끝의 감각이 둔해졌다. 나는 과연 무엇을 위하여 어떤 것을 보러 이 고생을 하고 있는가. 비구름과 안개로 보고 싶었던 백록담은 아예 보이지 않을 것임을 예감했다.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는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테오 앙겔로폴로스 감독의 영화 <안개 속의 풍경>이 떠올랐다. 영화에서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른다는 절망적인 말을 듣고도 어디에 있을지 모르는 아버지를 찾아 무작정 길을 떠나듯이 모든 삶이란 이런 건지도 모른다.
한 가닥 빛을 찾는 그 간절함으로 수묵담채화 같은 길을 올라갔다. 드디어 정상이다. 바람이 아무리 강하게 불어도 안개는 물러서지 않고, 도도하고 고고한 백록담은 결코 내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허락한 것은 고작 백록담이라 새겨진 돌비석 하나가 전부였다. 그 옆에 섰다. 모름지기 빼어난 경관을 쉽게 허락하는 산은 드물다. 그래서 비경을 보려면 삼대가 덕을 쌓아야 한다고 했을까. 한라산 백록담, 듣기만 해도 그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렸던가. 그림이나 사진으로 볼 때 백록담은 미래의 희망 같은 곳이었는데. 그래서 늘 설렘으로 다가오던 백록담에 오려고 얼마나 많은 세월을 벼르고 별렀던가. 쉽게 볼 수 없었기에 더욱 큰 안타까움과 간절함을 안고 하산할 수밖에 없었다.
내리막길에 무릎이 시큰거렸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저 열심히 내려가는 일만이 내겐 최선의 길이었다. 어느덧 사위가 어두워지고 화려한 단풍의 향연도 사라지고 없었다. 하산하는 길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거칠고 경사가 심했다. 1km쯤 내려왔으려니 하고 이정표를 보면 겨우 500m밖에 안 됐다. 어떻게 이 길을 올라갔을까. 나보다 늦게 출발한 사람들이 계속 내 곁을 지나가고 점차로 사람들이 눈에 띄질 않았다.
어느덧 오후 6시가 훌쩍 지나고 날은 저물어 길조차 구분하기 힘들었다. 드디어 고대하던 성판악휴게소의 불빛이 보였다. 순간, 하산 길의 막바지에서 나를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오직 나 자신의 도전에 묘한 환희로 가슴이 벅찼다. 나는 백록담을 확연히 보지는 못했지만 기어코 한라산을 다녀왔다는 성취감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