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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인간과문학 2013년 겨울호, TV드라마·숨겨진 이야기 ②] 자유, 그 위대함의 도전 - 장기오

신아미디어 2014. 11. 4. 14:58

"누가 나에게 대표작을 묻는다면 나는 스스럼없이 《사로잡힌 영혼》이라고 말한다.  89년 제1회 프로듀서상, 제25회 백상대상 최우수작품상, 88년 방송대상 음악상, 88년 KBS연기대상 최우수연기상 등 4관왕을 차지했다. 나는 그 드라마를 만든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자유, 그 위대함의 도전        장기오

 

1. 기획

   역사를 배경을 한 드라마나 소설은 크게 두 갈래다. 역사의 스토리를 따라가느냐, 혹은 역사적 인물에 포커스를 맞추느냐 이고, 인물도 외형적인 업적위주냐, 아니면 내면의 고뇌를 파고드느냐이다. 대부분의 역사소설이나 드라마는 주로 사초史草를 중심으로 한 업적위주의 편년체 형식이다. 이것은 독자적인 역사해석의 실력과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독자적인 해석이 불러올 파장을 우려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과거 KBS가 김구선생의 일대기를 드라마로 조명한 일이 있는데 방송이후 엄청난 후유증에 시달렸고 20여건의 소송에 휘말리기도 했다. 대한민국에는 김구에 대해 아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또 하나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우리 사회의 조상에 대한 외경심이다. 아마 모차르트가 한국 사람이었다면 영화 《아마데우스》는 제작될 수 없었을 것이다. 모차르트를 그렇게 경박하고 품위 없이 그렸다면 그 후손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내면의 고뇌를 파고드는 것 역시 그리 만만치가 않다. 작가 김훈의 《칼의 노래》나 《남한산성》같은 소설은 초점이 ‘사건’보다는 ‘인간의 내면’에 맞추어져 종전의 역사소설의 틀을 깬 작품이긴 하지만 드라마에서 그런 류의 역사물은 거의 불가능하다. 재미있는 이야기 위주로 전개해야할 TV드라마가 인간의 내면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기에는 한계가 있고 주간단위로 제작해야 하는 방송의 특성상 거기까지 미치기에는 역부족이며 방송작가들의 역사에 대한 혜안 역시 크게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TV 역사드라마들은 지극히 교과서적이다. 이순신은 밥도 안 먹고 똥도 안 누는, 인간이 아닌, 도저히 손이 닿지 않는 전지전능한 신神에 가깝게 그린다. 이런 식의 영웅전은 우리들에게 진정으로 존경하는 역사적 인물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영웅은 있지만 존경하는 인물이 없다.
   셋째, 나는 되도록 족적足跡은 있지만 그 행적이나 기록이 명확하지 않고 좀 모호한 인물을 택한다. 그래야 틀리느니 맞느니 하는 뒷말이 없다. 그런 만큼 작가의 창작의 영역이 넓어진다. 너무 알려진 인물은 기록이나 기존 이미지 때문에 작가의 상상력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래서 나는 되도록 기록이 적은 인물을 택한다. 그래야 상상력이 풍부해지고 따라서 극적인 요소가 많아지면서 인간적인 고뇌를 사실감 있게 그려낼 수 있다.  
   나는 조연출 시절, 사극 조연출을 좀 많이 했다. 그만그만한 역사드라마 조연출을 하면서 우리 역사에 거대한 인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우리의 정신세계에 귀감이 될 수 있는 인물은 없는가를 늘 찾았었다. 흑백시절에 제작, 방영된 일이 있었으나 고증도 틀렸고 전개도 다소 밋밋해 실망했지만 당시로서는 그런대로 잘 만든 프로로 기억되었던 인물이 하나 있었다. 오원吾園 장승업이었다. 나는 컬러로, 다른 각도에서 그 인물을 한번 조명해 보고 싶었다. 그에 대한 기록을 여기저기서 찾았으나 인명사전에 단 몇 줄밖에 나와 있지 않았다. 특히, 나는 그가 왜 임금의 명령을 거부했는가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을 가졌다.
   군주시대에 임금의 명을 거역한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일이다. 민주주의 세상에서도 대통령이 부르는데 시간 늦게 도착했다고 몇 십 년 이어오는 기업을 해체시키고 마는 세상인데 그림을 그리라는 임금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개구멍으로 빠져나가 술을 마시다 잡혀 들어오는 오원은 도대체 무슨 배짱일까? 목숨보다 술이 우선인가? 대부분의 오원의 전기를 보면 술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나는 그런 그의 내면을 한 번쯤 파헤쳐보고 싶었다. 처음은 술이라고 가정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술을 마시고 싶어 했던가? 가난? 불우한 그의 삶? 아니면 호기豪氣? 그 어떤 것에서도 답이 안 나왔다. 그러면 절대군주였던 고종은 또 어찌하여 3번이나 궁을 탈출한 오원을 죽이거나 옥에 가두지 않고 살려두었던가? 이 두 사람의 관계에 무슨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고종은 오원의 그 치기稚氣에서 무엇을 발견하고 인정했던 것이 아닐까? 고종이 가질 수 없던 그 어떤 것을 오원이 가졌던 것은 아닐까? 말하자면 추구하는 어떤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여기까지 나의 생각이 머물렀다. 며칠을 고민했다. 추구하는 어떤 공통점? 나는 며칠을 고민하던 중, 두 사람 사이에 공통점이 아니라 서로 다른 점을 발견했다. 하나는 절대 군주고 하나는 처자식도 없이 떠도는 낭인이다. 그렇다. 그거다.
   나는 무릎을 쳤다. 자유, 그건 자유다. 오원에게는 권력은 없지만 자유가 있고, 고종에겐 권력은 있지만 자유가 없다. 주제는 자유다. 고종은 오원의 그 자유가 부러웠던 것이다.   
   나는 작가(이상현)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프닝(Opening)을 오원이 광활한 초원에서 말을 쫓는 장면이었으면 좋겠다. 작가가 나를 한참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나에게 물었다. “왜” 나는 그랬다. “그는 자유인이니까.” 며칠 후 작가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래 ‘자유’로 하자.” 그래서 이 드라마의 주제는 ‘자유’가 되었다. 흔히들 예인藝人들을 다룰 때 예술혼 운운하는데 우리는 주제를 ‘자유정신’으로 정한 것이다. 나는 대체로 작품을 구상할 때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주제다. 주제가 명확하고 뚜렷하면 드라마는 확고해진다. 그리고 스토리는 보다 탄탄해진다고 믿는다.
   드라마에서의 자유는 이렇게 표현되었다.

 

고종; 너는 어찌하여 자꾸만 궐 밖으로만 도망가려 하느냐?
오원; 만약 아직도 소인의 그림을 바라신다면 소인에게 내리신 벼슬을 거두어 주시고 궐 밖으로 내쳐주시옵소서.
고종; 벼슬을 거두어 궐 밖으로 내쳐
오원; 네, 그래야만 꾸밈이 없고 걸림이 없는 그림이 나올 것 같사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무래도 이놈의 사모관대는 철쇄보다 더 무겁고 대궐 안은 감옥보다 더 답답하여 끝내 성에 차는 그림을 그리지 못할 것 같사옵니다. 부디 소인을 예서 풀어주시어 자유롭게 해 주신다면……
고종; 과인은 견뎌오고 있다.
오원; (고종을 올려다본다)
고종; 자네 못지않게 과인도 매일매일 저 담장을 뛰어넘어 끝도 없이 달아나고 싶지만, 여지껏 견뎌오고 또 앞으로 견뎌나가야 한다.
오원; (충격을 받은 듯 고종을 다시 올려다본다.)

여기서 오원은 고종의 쓸쓸한 표정에서 끝없는 초원을 달리는 한 마리의 야생마를 본다.

 

비장한 음악이 흐른다.(그림 1, 2)


   두 번째 오원을 통해 기득권 세력의 가식과 허영을 비웃는다.
   서권기書卷氣, 문자향文字香을 입에 달고 살며 오원의 그림을 비웃고 무시하는 양반사회에 대한 통렬한 풍자가 있다. 당대 중원 제1의 명수라는 청나라의 화인 오창석(吳昌碩, 1844-1927)의 그림을 구해오라는 권신의 부탁을 받은 역관 하나가 그것을 잘못 간수하여 그림이 못쓰게 되었다. 그러자 이 화禍를 면해보려는 역관은 오원에게 그림을 그대로 모사模寫하게 하여 권신에게 바친다. 이런 사실을 알 리 없는 권신은 대신들 모두들 불러 모아 ‘오창석 그림 감상회’를 가진다. 여기에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는 오원을 불러 같이 보게 한다.

 

정대감; 오창석은 그림뿐이 아니고 시와 전각에도 일가를 이루고 시문에도 능한 사람이지요. 저 그림을 보오. 문자향, 서권기가 넘치지 않소.
송대감; 아믄요, 신운이 생동하니 저런 명품을 낳으려면 복중에 만권서가 없고서야 어림없는 일이지요.
권신; 학문부터 닦아야 인품이 생기고 인품이 있어야만 저런 화격畵格이 생기는 걸세. 그런데 저 오원은 어쩔꼬, 쯔쯔

일동, 오원을 한 번 쳐다보고 와 웃는다. 오원 역시, 그들을 한 번 쭉 훑어보고는 갑자기 파안대소를 한다.

자신을 보고는 서권기, 문자향이 없다고 비웃던 양반들이, 자신이 묘사한 그림을 보고는 서권기, 문자향 운운하며 극찬을 아끼지 않는 양반네들의 가식을 오원은 마음껏 비웃는다. 오원은 눈물까지 흘리면서 낄낄 웃는다. 숙연해지는 장면이다.(그림 3, 4)

 

   그 이후 그는 시서화詩書畵에 서권기, 문자향을 주창한 추사의 행적을 찾아 그 본질에 도전한다. 주제는 명확하고 확실했고 작품전체를 관통했으며 여실했다.
   마지막 장면에서 고종은 도망 나간 오원을 놓아준다.
   대신들이 그를 잡아 능지처참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고종은 이렇게 말한다.

 

“아니오. 그 사람은 이미 제 일을 다하고 이곳을 떠났소.”
“신들이 알기로는……”
“허나 그 사람이 그린 그림은 종이나 비단 위에 그린 그림이 아니라 제 몸을 던져 그림 이상의 그림을 그렸소.”(그림 5)

 

고종은 그를 놓아준다.

 

2. 캐스팅

   보통 예술가를 연상할 때 예민하고 가냘픈 감성적이며 약간 허무적인 인물을 연상한다. 그러나 나의 오원의 이미지는 처음부터 그런 이미지가 아니고 터프하고 호방한 인물이 연상되었다. 나는 덩치 크고 촌놈 같고 별명이 ‘코끼리’인 탤런트 김성겸을 캐스팅했다. 대체로 캐스팅에도 고정관념 같은 것이 있다. 당시 그는 주인공감이 아니었다. 튼실한 조연이라고나 할까. 모두들 반대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연약하고 나이브한 이미지는 오원과 전혀 걸맞지 않는다는 생각만은 변함이 없었다. 비슷한 이미지를 찾았지만 한번 머리에 박힌 그의 이미지가 좀처럼 지워지지가 않았다.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밀어붙였다. 대신 그가 사랑한 초향이는 가냘프고 연약하며 예쁜 김영애를 골랐다. 그 외, 기타 인물에는 아주 굵직한 인물들을 포진시켰다. 내가 잘 쓰는 수법이다. 주인공이 약하면 주위인물들을 호화진으로 구성한다. 자칫하면 주인공이 기가 죽을 수도 있지만 어지간한 경력이면 이를 악물고 그들 호화진과 싸운다. 그래서 훨씬 돋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와 대칭되는 인물인 고종에는 신구를 선택했다. 이만하면 만족이다. 대부분의 연기자들은 캐스팅이 되면 대본부터 먼저 구해본다. 그래서 자기의 역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든지 미미하다든지 혹은 촬영이 많아서 여러 날 이리저리 끌려 다닐 것 같으면 온갖 구실을 다 대며 거절한다. 그러나 이 드라마에서는 거절은커녕 모두들 흔쾌히 승낙을 했다.         


3. 제작 에피소드

   나는 되도록 민속촌은 피해왔다. 민속촌은 모든 사극에 다 나오기 때문에 시청자들의 의식 속에는 드라마를 그냥 드라마로 본다. 늘 보던 고가古家 때문에 진실되지가 않아 보인다. 나는 시청자에게 진실되게 보일 필요가 있고 이 드라마는 정직하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민속촌을 피했다.
   나는 안동 일대 하회마을과 퇴계사원 등을 비롯한 전통고가들을 찾아 다녔다. 그러나 하회마을 역시 너무 알려져 매력이 없었고 당시로서는 좀 덜 알려져 있던 양동마을이 가장 적합해 보였다. 주 촬영지를 양동마을로 정하고 부분 부분을 안동일대를 돌아다니며 찍었다. 드라마란 몽타주이기 때문에 이것저것 섞어 놓으면 거기가 어딘지 잘 모를 경우가 많다. 오픈세트장도 세웠다. 요즘은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양동주민들은 잘 협조해 주었다. 그런데 옥산서원에서 촬영 때 말썽이 났다. 소품도 다 배치하고 간단한 세트까지 세우고 막 촬영을 하려고 하는데 관리인이 딱 카메라를 막아섰다.
   “촬영 못합니다.”
   “왜요?
   “약속하고 다릅니다.”
   “뭐가 다릅니까?”
   “이런 신을 찍는다는 말은 없었습니다.”
   “아니 우리는 전체적인 촬영허가를 얻었지, 개별 신마다 허락을 얻은 건 아닙니다.”
   “그래도 안 됩니다.”
   관리인은 요지부동이었다. 엑스트라까지 모두 백여 명이 촬영을 기다리고 있다. 조연출이 30분을 사정을 했다. 리허설이 다 끝나도록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단호한 결심을 하고 관리인 앞에 섰다.
   “좋습니다. 그럼 철수하겠습니다. 그 대신 계약위반에 따른 위약금을 내놓으셔야 합니다. 방송국은 당신의 말을 믿고 서울에서 여기까지 백여 명이 넘는 인원을 끌고 왔습니다. 이 사람들의 하루 일당, 그리고 버스 임차료, 촬영이 하루 늦어지는 것에 대한 위약금 등등을 모두 보상하셔야 합니다.”
   관리인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조연출이 관리인을 얼른 뒷간으로 끌고 갔다. 잠시 후 조연출이 왔다.
   “시작하십시오.”
   그렇게 어렵게 시작했다.
   그 전에 하회마을에서도 그와 같은 시비가 붙었다. 마을에서 물을 건너 물길이 돌아나가는 건너편 산으로 건너가는데 배가 필요해 헌팅 때 배를 빌려주기로 했는데 막상 촬영하려고 하니 못한다고 버틴다. 무엇을 요구하는지 안다. 그러나 그렇게 해 줄 수가 없다. 책정된 예산안에서 집행해야하기 때문이다. 하회마을은 관광지가 되어서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우리는 철수했다. 곳곳에 그런 암초들이 있다. 어찌되었던 그런 우여곡절을 거쳐 우리는 촬영을 완성했다.
   마지막 장면에서 고종은 그리라는 그림은 팽개치고 오원이 도망쳤다는 보고를 받는다. 세트를 세워 촬영할 수도 있었지만 어쩐지 이 신만은 실제 어전에서 찍고 싶었다. 고궁은 화재라든지 색채의 변색 같은 걸 막으려는 의도로 실내 촬영은 불허한다. 나는 창덕궁 관리사무소에 앉아 지루하게 드라마를 설명하고 허가를 요청했다. 직원도 오원이라는 인물에 흥미가 있었는지 재미있게 듣고는 혀를 차면서 자기 재량권 밖이라며 거절했다. 나는 흥정을 했다. 그러면 인정전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 앞에서 촬영하겠다. 그건 좀 허가해 달라고 졸랐다. 1시간 이상 설득 끝에 허락을 얻었다. 카메라를 돌리는 척 하다가 다시 담당자에게 인정전 문을 좀 열어줄 수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들어갈 거냐고 물었다. 아니다. 임금이 서 있는데 문이 닫혀있으니까 이상하다. 고종의 배경으로 문門이 나오는데 문만 좀 열어 달라고 했다. 그는 또 몇 번이나 망설이더니 문을 열어주었다. 우리는 의도했던 영상을 얻을 수 있었다.
   마지막 장면만 남았다. 오원이 스님을 따라 속세를 떠나는 장면이다. 나는 대체로 엔딩에 힘을 많이 준다. 엔딩을 감동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해, 그 한 장면을 찍기 위해 천리 길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 드라마도 그래야 했다.
   나는 대관령에서 라스트를 찍기로 결심을 하고 이 장면 하나만을 위해 스태프들을 끌고 강원도로 갔다. 나는 버스를 끌고 삼양목장 깊숙이 들어갔다. 해는 지는데 바람은 사람이 날아갈 지경으로 거칠었다. 마땅치가 않았다. 다시 버스를 돌려 나오는데 들어갈 때 못 보았던 한 장소가 눈에 들어왔다. 석양을 배경으로 거대한 잣나무 한그루가 광풍에 미친 듯이 흔들리는 장면은 가슴 서늘한 장면이었다. 카메라 포지션과 연기자의 거리는 500미터는 족히 되었다. 그것도 바람이 부는 언덕을 올라가야 한다. 나는 미친 듯이 소리쳤다.
   “빨리, 빨리.”
   연기자는 허겁지겁 올라갔다. 30분 정도가 걸렸다. 해는 이미 넘어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바람은 더욱 세차졌다. 나는 그 그림을 배경을 엔딩 크레디트타이틀을 올렸다.(그림6) 누가 그랬다. 저 장면을 어떻게 찍었느냐고. 강풍기로 돌려 나무를 흔들었느냐고. 나는 그냥 웃었다.


4. 제작 그 후

   나는 제작이후 가장 신경을 쓰는 분야는 음악이다. 특히 사극일 경우가 그렇다. 서양음악도 아니고 그렇다고 국악처리는 너무 안이한 발상이다. 나는 한양합주를 기획했다. 작곡자가 마땅치 않았다. 나는 당시 중앙대 교수였던 박범훈 교수에게 대본을 보냈다. 대본이 좋으면 작곡을 부탁한다고 했더니 그가 승낙을 했다. 중앙대 국악관현악단이 연주한 배경음악은 상상 이외로 좋았다. 나는 대만족이었다. 그러나 방송이 나간 후 작가는 내게 심한 불만을 토로했다. 음악 때문에 드라마가 죽었다고. 음악이 좋으면 시청자들은 음악에 마음이 빼앗겨 드라마에 소홀해지기 때문이다.
   88년 3월 KBS창사특집드라마로 방영되었다.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보다 13년이 빨랐다. 88올림픽을 앞두고 재방되었다. 이를 본 당시 문광부 이어령 장관에게서 전화가 왔다. 정말 좋은 드라마를 보았다고. 작가가 누구냐고 물었다. 올림픽 기간 중에 그 드라마는 작가의 각색으로 연극으로 다시 재탄생되었다. 
   누가 나에게 대표작을 묻는다면 나는 스스럼없이 《사로잡힌 영혼》이라고 말한다.  89년 제1회 프로듀서상, 제25회 백상대상 최우수작품상, 88년 방송대상 음악상, 88년 KBS연기대상 최우수연기상 등 4관왕을 차지했다.
   나는 그 드라마를 만든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장기오  ----------------------------------------------

   《현대수필》로 등단, KBS 大PD, 드라마제작국장 역임, TV문학관 《금시조》, 《홍어》 등 47편의 드라마 연출, 수필집 《나 또한 그대이고 싶다》, 《사라지는 것은 시간이 아니다, 우리다》외 전문서적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