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인간과문학 2013년 겨울호, 작가재조명·소설편/작품론] 역사, 인물, 패러디 : 손영목의 〈하얀 비둘기〉의 경우 - 유한근
"이 작품은 프랑스혁명 당시의 어지러운 사회 속에 생존과 평화를 위해 투쟁하는 젊은이들과 권력으로부터 소외당하여 보통사람들, 민중들 모습을 통해 오늘날의 우리 모습을 투영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다시 읽힌다. 그리고 ‘마라 암살사건’의 가해자 샤를로트 코르테의 화신인 ‘브나르바 쿰사’. 잔다크같은 그 여인의 순백의 삶을 하얀 비둘기로 표상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래 기억될 것이다."
역사, 인물, 패러디 / 유한근
- 손영목의 〈하얀 비둘기〉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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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목은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 〈판님〉(’74)과 서울신문 신춘문예 단편 〈이항선〉(’77)에 당선 되면서 작가생활을 한다. 1982년에는 경향신문 2천만 원 장편소설 공모에 〈풍화〉가 당선되면서 소설가로서의 역량을 객관적으로 평가받은 작가이다. 이 시기 한국은 산업사회를 거쳐 후기 산업 사회로 진입되어가던 시기였다. 문단적으로는 순수와 참여 논쟁이 첨예하게 대립되었던 시기였으며, 이른바 무교동 소설이라 폄하되던 상업주의소설이 독자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시기였다. 그런 시기에 창작을 시작한 손영목은 시류의 흐름과는 관계없이 ‘작가’ 동인의 일원으로 ‘고양된 휴머니티’를 지향했다.
손영목의 초기 작품은 유년의 원체험이 투시된 작품으로 당대의 사회현상을 은유하고 상징하는 소설을 쓴 것으로 평가된다. 이런 소설이 가능했던 것은 당대의 정치적 상황이나 사회 현상을 대응하는 작가 의식 때문일 것이다. 사라져 가는 고향의 정취, 작가의 유년 체험의 해체, 그 원형을 복원하려는 작가 의식이 그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절제 미학은 인물 창조에서도 나타나는데, 그것은 소설 인물의 내면적 탐색을 통해 시대에 대한 비판의식으로 연결된다. 시대 혹은 역사에 대한 정면 대결이 아닌 담담함으로 무장된 발화법의 소산으로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작가 재조명’에서 다루어진 〈하얀 비둘기〉를 탐색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프랑스 혁명기의 풍운아였던 ‘마라의 암살 사건’을 패러디한 작품으로 보인다.
이 작품에 대한 본격적인 담론은 잠시 미루고, 그의 소설에 대한 특징을 먼저 살펴보면, 그의 소설은 앞서 언급한 ‘고양된 휴머니즘’적인 소설이라는 점이다. 손영목 소설의 인물은 소외된 인간으로서 진솔하고 소박하게 사는 보통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삶의 귀중함과 인간의 원초적인 정서와 삶의 근본적인 모습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선 당대에 풍미했던 사회의식은 어쩌면 허위의식이며 인간 근본 문제를 파헤치는 것에는 걸림돌이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소설이 타락한 사회에서 타락한 형태로라도 진정한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어떠한 진정한 가치를 가져야 하는 문제에 대해 작가들은 고뇌할 수밖에 없다. 그동안 우리 소설계는 신문학 이후 줄곧 이 문제에 대한 담론을 전개해왔고 지금도 이 문제는 미해결 문제로 남기고 있다. 리얼리즘 소설이든 실험소설이든 그 경향이 무엇이든지 소설이 인간학이라는 관점에서도, 그 진정한 가치는 ‘인간’에 맞추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 소설의 공통분모는 ‘휴머니즘’이었다. 휴머니즘은 ‘다양성’이다. 우리가 이데올로기를 ‘인간됨을 막는 조정장치’로 보는 데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자연의 질서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존의 문학이론이나 경향에 종속되지 않고 다양성이 의미하는바 개성을 지향하는 문학적 모반을 부단히 계속한 그룹이 손영목이 소속되었던 ‘작가’동인들의 작품 세계이다. 문학적 모반은 창조적 의지를 의미하며, 다양성과 개성을 동반한다.
문학의 양상은 다양할수록 바람직하다. 그 개성이 다양할수록 바람직하다. 그 개성이 다소 어설픈 것이라 해도 문학의 상식적 범주에서 이탈하지 않는 한, 그리고 인간의 총체적인 문제를 포괄하는 한 인정되어야 한다. 한 시대의 유행적 성향을 띤 당대적인 소설이라 해도 그것이 필연적인 상황에서 발생된 것이고 문학적 모반의 연계선상. 즉 변증법적 진행 위에 놓일 때 그 또한 인정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소설의 다원화와 포괄화를 위한다는 점에서 이것만은 옳아야 한다는 문학 담론은 지양되어야 한다.(졸저, 《생각과 느낌》) 이런 관점에서 손영목의 소설 〈하얀 비둘기〉는 재조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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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목의 〈하얀 비둘기〉는 역사적 사실을 패러디(Parody) 혹은 패스티시(pastiche)한 고양된 휴머니티의 소설이다. 이 소설은 프랑스혁명 시 일어났던 ‘마라 암살사건’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모티프로 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은 역사소설 범주로 넣을 수는 없다. 그 역사적 사건을 주인공의 실명을 차용하지 않고 사건의 핵심적인 뼈대만 빌려왔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패러디하고 있으며, 이 소설에서 의미하고 있는 작가의 메시지를 탐색해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요한 표현 구조로 패러디와 패스티시를 들어 설명되어지곤 한다. 전자를 편의상 일반적 개념의 ‘풍자적인 모방’으로, 후자를 ‘혼성적인 모방’으로 정의하고 있다. “서사 텍스트로서 패러디의 가장 분명한 특성은 그것이 모델을 가지거나 원전을 환기시킨다는 점이다.(…) 바흐친은 ‘모든 반복과 답습’을 패러디의 본질로 보고 있다. 반복(repetition)이란 선례와 선행을 뒤따르는 행위이다. 따라서 반복이라는 행위는 모델을 가지기 마련이며 반복의 대상에는 당연히 선행하는 문체, 문학적 규범, 목소리, 기법, 제재, 관습(convention), 인물과 명명법 등이 포함된다.”(한용환의 《소설학 사전》)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손영목이 소설 〈하얀 비둘기〉는 ‘반복과 답습’이라는 개념으로의 모방을 하고 있지는 않다. 풍자적이거나 희극적인 모방 또한 아니다. 서사 텍스트를 기존의 역사적 사실에서 끌어 왔다는 점이 ‘반복과 답습’일 뿐이지, 온전한 바흐친이나 C. 휴 홀만이 말하고 있는 그 개념과는 다른 특별함을 지니고 있는 소설이다. 그렇다고 해서 패스티시 소설도 아니다. 다른 소설의 내용 또는 표현 구조를 차용하여 작품을 만드는 짜깁기를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실험 소설 형태는 그 나름의 의미를 갖는다. 패러디는 기존의 것을 재현하거나 환기시킴으로 해서 별개의 의미 체계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다른 예술적 모델이나 혹은 사실에 대한 의식적 아이러니 혹은 냉소적 환기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패러디는 아이러니적 성격을 지닌다. 유희적이다. 엄숙한 것을 희화화하고 기품과 품격을 비속화시킨다. 권위적인 것을 냉소하고 도전적인 시각으로 주체를 회복하려 한다. 위장된 진실의 허구를 깨뜨리고 현대의 새로운 담론적 체계를 만들려고 한다. 이에 종속된 소설은 현대의 사회적 관습이나 심리적 관점, 사고와 세계관을 반영하는 강력한 담론으로 자리매김 된다.
손영목의 〈하얀 비둘기〉는 앞서 언급한 바, 프랑스 혁명 시 장 폴 마라의 암살 사건을 주요 서사구조로 하고 있다. 소설에서는 장 폴 마라를 ‘리퉁구 느반조’로, 그를 암살한 여인 샤를로트 코르테를 ‘브나르바 쿰사’로 환생시켰다. 그 당시, 프랑스 혁명 시 프랑스 산악파가 국민공회를 장악하자, 이에 맞서는 지롱드파가 왕당파와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킨다. 마라는 산악파의 핵심적인 지도자이다. 이들은 봉건적 공과貢課의 무상폐지, 망명자의 몰수재산 분할판매 등을 결의하여 무산농민을 소토지 소유자로 바꾸어 놓는 법령을 발표한다. 독재가 시작된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1793년 7월 13일 마라는 산악파의 독재를 증오하는 반혁명파 여성 샤를로트 코르데에게 자택 욕실에서 암살당한다. 이 사건을 서사 구조로 하여 〈하얀 비둘기〉는 쓰고 있다. 이 사건을 소재한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은 근대미술사에서 주목받는 그림이기도 하다. 암살사건으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샤를로트 코르데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마른 체형에 아름다운 25세의 여인이며 지롱드파를 지지하는 인물이었다는 사실이외에는 특별한 기록이 없다.
〈하얀 비둘기〉의 서두는 암살자 코르테를 모델로 한 ‘브나르바 쿰사’와 그녀의 남자군인인 ‘무쿰바’이야기로 시작된다. 이들은 사랑하는 사이이다. 그러나 정세의 혼란으로 미래를 가늠할 수 없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는 젊은이들이다. 이 부분에서 작가는 ‘브나르바 쿰사’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녀의 커다랗고 검은 눈이 슬픔과 두려움에 흔들리고 있었다. 눈에 띌 정도의 미모는 아니지만, 하얀 원피스에 싸인 몸매는 날씬하면서도 상당히 섹시한 느낌을 주었다. 그녀의 왼손에는 중간 크기인 두툼한 가방이 들려 있었다”고. 그러나 이들이 만나는 “20미터쯤 떨어진 뒤쪽에는 그들이 타고 온 지프가 엔진을 끄고 서 있었다.”고 묘사된다. 다분히 영화 영상적이다. 지프차의 그들은 브나르바의 배후세력이라는 의혹을 갖게 한다. 이렇듯 이 소설의 서두 부분은 젊은 여인들의 슬픔과 두려움을 통해서 미래의 불확실성과 시대 정세의 불투명성을 그려준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T읍과 K시이다. 이 공간을 연결시켜주는 대중교통은 하루에 한 번씩 다니는 버스이다.
T읍은 오밀조밀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포석이 깔린 광장을 중심삼아 석회를 칠한 낮은 건물들이 대체로 방사선 방향으로 늘어서서 시가지를 이루었고, 광장에서 여러 갈래로 뻗어나간 도로에는 야자나무와 고무나무를 주종으로 한 가로수들이 길가 양쪽으로 늘어서 있었다.
이른 아침 광장 한쪽에 있는 교회 종탑의 종이 맑은 소리를 내며 울리는 것과 함께 비로소 T읍의 하루가 시작되곤 했다. 일찌감치 밖에 나온 선량한 사람들은 아무에게나 미소와 함께 상냥한 인사를 건네고, 개들은 축축한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길바닥에서 어슬렁거리며 코를 킁킁거렸다. 그처럼 거리는 느긋한 가운데 하루를 맞곤 했다.
-소설 〈하얀 비둘기〉에서
위의 인용문처럼 T읍은 평화로운 곳이다. 그러나 구 정부군과 혁명군이 포기할 수 없는 비극적인 공간이다. “모든 것이 파괴되고 뒤틀린 가운데서도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는 곳이다. T읍에서 맨 먼저 브나르바를 발견한 사람은 전략상의 취약지구에 해당하는 밀림 쪽 도로 어귀를 경비하고 있던 초병들 세 명이다, 그들은 그녀를 강제 연행한다. 그녀는 경비대장에게 혁명위원회의 ‘리퉁구 느반조’를 만나러 왔음을 밝힌다. 불안한 얼굴로 지켜보던 구경꾼 중 “순박한 청년 옹고 무스키는 누구보다도 마음을 졸이면서 그녀가 별 탈 없이 풀려나기를 간절히” 빈다. 이 청년은 브나르바를 전에 알지도 못하나 처음 본 순간 감전된 것처럼 쇼크를 받는다. 이 청년을 등장시킨 이유는 뒤에서 밝혀지지만, 국외자로서 이 소설에서 이야기되는 사건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사람으로, 젊은이의 시대의식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옹고는 K시로 가는 버스에서 브나르바와 대화한다.
“그건 그렇지 않아요.” 브나르바의 대꾸에는 어쩐지 날이 서 있었다. “우린 오늘의 사태를 정치적인 눈으로 똑바로 바라보지 않으면 안 돼요. 문제를 일으킨 건 자칭 혁명가들이고, 그래서 시작된 내전이죠. 그들이 엉뚱한 야욕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이 나라는 그전처럼 평화로웠을 거고, 댁의 어머니도 돌아가시지 않았을 거 아니냐고요.”
“그건 그래요. 어머닌 겨우 쉰다섯 살이고, 좀 뚱뚱해서 숨이 차긴 해도 물소처럼 건강하셨으니까.”
“거 보세요. 그것만으로도 댁한테는 혁명정부에 대해 적개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충분하잖아요.”
옹고는 갑자기 목덜미에 찬 물방울이라도 떨어진 듯 공연히 오스스한 전율을 느꼈다.
위의 인용문에 우리는 브나르바의 일단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느반조의 암살 동기의 먼 원인이 된다. 혁명위원회의 야욕으로 인해 평화로웠던 마을과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했던 전쟁은 혁명정부가 책임을 져야하며, 적개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는 브나르바의 날선 말이 그것이다. 옹고는 이러한 여자에게서 “용기나 정의니 하는 말과 딱 어울리는 강렬한 어떤 빛“을 느낀다.
K시는 전쟁으로 인해 “음산한 유령의 도시”로 변한다. 혁명위는 정부를 전복시키고 중앙정부 구성을 선포했지만, 그들은 주도권을 잡기 위한 내분이 일어난다.
엄밀히 따지면 국민 대중의 처지에서는 어느 정파가 정권을 잡든지 말든지 큰 상관이 없었다. 문제는 그들의 싸움으로 국민들만 죽을 지경이라는 사실이었다. 농경지는 진격하는 군홧발과 전차의 바퀴에 짓이겨졌고, 공장의 기계는 멈춰선 채 녹슬어가고 있었으며, 은행과 상점은 문을 닫았을 뿐 아니라 실상은 지급할 돈도 팔 물건도 없었다. 그처럼 대부분의 산업기반이 갑자기 무너지거나 마비되는 바람에 경제는 파탄 상태의 혼란에 빠졌고, 국민들은 당장의 생활고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곳곳에서 난민이 속출해 그 상당수가 K시로 무작정 몰려들었다. 그렇다 보니 중앙광장이나 자유공원 같은 곳은 거대한 난민수용소로 변해 버렸고, 배고프고 지친 탓의 죽음이 속출했으며, 열악한 위생상태가 전염병을 불러들였다.
위의 인용문은 사회의 단편적 상황과 민심을 그리고 있다. 난민수용소로 변한 K시의 중앙광장과 자유공원은 국민들의 생활상을 표상하는 공간이 되며, 후에는 암살자인 브나르바의 처형장이 되기로 한다.
이런 사회 상황에서 혁명위는 혁명의 완성을 위한 토론이 전개된다. 그리고 혁명의 이념과 입장을 재정비하려하고 그 어려움을 실감하게 된다. 자신들이 원했던 혁명은 ‘신국가 건설’이 아니라 민중의 기반 위에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본디 “민중은 우매한 집단이기 때문에 그들의 불평 불만이 발상 여하에 따라 묘약도 될 수 있”음을 그들은 고민한다. 혁명위의 지도자의 한 사람인 이퉁구 느반조도 고뇌한다.
이날 오후, 리퉁구 느반조는 자기 집무실에서 안절부절못해 방 안을 오락가락하며 신경질적으로 자기 몸을 긁고 있었다.
그는 이날따라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 혁명의 최고 이론가로 자임할 뿐 아니라 위원회 총서기로서 방대한 조직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그는 돌아가는 상황이 자기 희망과 일치하지 않는 양상을 보이는 데 대해서 곤혹감과 분노를 함께 느끼고 있었다. 그 이유의 첫째는 구정부 세력이 의외로 만만하지 않아 조기 평정이 어렵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혁명 추진 방법에 대한 동지들의 내부의견이 일치되지 않을 뿐 아니라 패배의식이나 현실 안주의 희망까지 슬몃슬몃 내비치고 있으며, 셋째는 혁명위원회 안에 주도권을 잡기 위한 물밑경쟁과 합종연횡이 복잡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퉁구 느반조가 고뇌하는 것은 인용문처럼 구정부 세력이 만만치 않다는 점과 혁명군 내에서 의견이 분분하고 주도권 쟁탈전이 심각하다는 점이다. 느반조의 혁명철학은 “힘과 피”이다. 이에 따라 그는 ‘사형집행인’ 또는 ‘파리 사냥꾼’이라는 악의적인 별명을 갖게 된다. 그러나 구정부 세력 소탕작전과 민생문제의 책임소재에 중심에 서있는 느반조는 “자기의 몰락을 암암리에 원하고 획책하는 자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기회, 자신의 반세력에게 결정타를 날릴 수 있는 기회를 엿본다.
그러자니 속이 부걱부걱 괴어 작은 일에도 소리를 버럭 지르게 되었고, 혼자 있을 때는 자기 머리카락을 쥐어뜯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혈압이 부쩍 높아져 혈압강하제를 수시로 맞지 않으면 안 되는 정도가 되었다. 심기가 그러니까 가려움증조차 더욱 심해지는 것 같았다.
반정부 혐의자로 쫓기던 시절에 도망치다가 더러운 시궁창에 들어가 온 나절을 꼼짝 못하고 숨어 위기를 넘긴 적이 있었는데, 그때 옮은 피부병은 고질이 되어 느반조를 두고두고 괴롭혔다. 남들의 눈에 지저분해 보이는 것은 둘째 치고라도 우선 본인 자신이 괴로워서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 가려움은 기분이 나쁘거나 열이 뻗치면 증상이 더해졌고, 중요한 회의석상에서조차 어쩔 수 없이 다섯 손가락으로 갈퀴를 만들어 겨드랑이를 벅벅 긁거나 지휘봉을 목덜미 옷깃 사이로 찔러 넣어 잔등을 쑤석거려야 하는 판이었다.
느반조의 몰락이 암시된다. 혁명하기 위해 지하에서 활동할 때 옮은 피부질환이라는 설정이 그것이다. 브나르바와의 만남의 당위성과 필연성이 이 피부병이라는 계기로 암시되고 이루어진다.
느반조는 사형집행인이라는 악의적인 냉혹한 별명과 수도승이라는 빈정거림을 받을 만큼 절제심이 강하고 여자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자택 숙소에서 일하는 로스클타라는 정부가 있기는 하지만 방탕한 생활을 하지 않는 혁명가이다. 그리고 루루라는 애견을 가진 동물사랑이 지극한 소시민적인 사람이다.
보편적 인식의 기준으로 본다면 리퉁구 느반조라는 인물은 확실히 특이한 괴짜였다. 정치 또는 정권에 집심을 보이는 인간들에게 일반화된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탐욕을 그에게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결벽이라고 할 정도로 검약성과 절제심이 강했으며, 권력의 힘을 사사로운 목적에 적용한다든지 거만을 떠는 일도 결코 없었다. 그런 청렴의 덕목에 대해서는 이념상으로나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관계인 적들조차 긍정해주기에 인색하지 않을 정도였다.
느반조가 혁명을 신봉하고 구정부를 쓰러뜨린 대의명분을 들자면 순전히 나라와 국민에 대한 그 나름의 열화 같은 사명감 내지 소명의식이 있었을 뿐, 개인적인 출세욕이나 다른 목적 같은 것은 추호도 개입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막강해진 신분에도 불구하고 버젓한 정부공관에 들기를 사양하면서 낡고 허름한 자기 집을 지난날과 다름없이 거처로 삼고 있었다. 가족이 없어 큰 주거공간이 필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남이 살던 곳은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고 불편하다는 것이 그가 내세운 이유였는데, 어쨌든 혁명정권의 다른 권력자들이 구정부 고관대작들이 쓰던 여러 공관이나 저택을 멋대로 분배해 차지한 것과는 판이하게 대조적이었다.
위의 인용문처럼 느반조는 개인적인 사욕이나 출세욕보다는 혁명에 대한 소명의식에 철저한 인물이다. 빼앗은 공관을 분배받지 않고 자신이 살던 주거공간을 집무실로 사용한다. 그 공간은 후에 그의 암살 장소가 된다.
브나르바는 전화상으로 약속하고 느반조의 공관를 찾아간다. 그 공간에서 그녀는 놀라게 된다. 내부구조는 단순하고 소박하며, 거실을 서재와 함께 사용하는 학자의 연구실 같은 그 집을 둘러보며 브나르바는 혼란을 느낀다. 국가의 최고 권력자이며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악당”으로 인식되어있는 그 인물의 집으로는 너무 소박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멋대로 그렸던 리퉁구 느반조의 초상은 물소처럼 건장하고, 눈이 부리부리하며, 얼굴빛이 시커먼 사내였다. 다시 말해서 과격하고 잔인하다는 일반세평에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실제의 느반조란 인물은 그네들 종족사회에서 상류계급 출신의 표징으로 통하는 연한 갈색 살빛이었고, 차가워 보이기는 하지만 무척이나 사색적이고 우수에 찬 고상한 얼굴이었다. 게다가 물 위에 드러난 머리와 어깨만 가지고 가늠하더라도 물속에 잠긴 몸집을 물소에 비견한다는 것이 턱없는 무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반세평을 빗나가게 하는 인물임에 놀랐지만 브나르바는 당돌하게 그를 만나 비서로 써달라고 요청한다. 고등교육도 받았고, 비서로서의 업무수행에 필요한 요건을 갖추었다고 자부한다는 말로 느반조에게 채용을 요청한다. 이에 느반조는 자신은 여비서를 두지 않는다는 말로 거절한다. 그러나 브나르바는 “인간을 원죄의 늪에서 영원히 빠져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격렬하고 간교한 기지로, 그리고 요염한 자태로 느반조를 유혹한다.
브나르바는 착 감아드는 목소리로 속삭이며, 로스클타가 사용하던 물수건을 왼손으로 집어 느반조의 어깨를 쓰다듬듯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몸을 구부려 오른손으로 원피스 아랫단을 더듬었다. 확인하고 또 확인했던 것이기 때문에 간단히 ‘그것’을 포착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물수건을 남자의 어깨에 걸쳐놓은 채 왼손까지 동원하여 옷단 안쪽에 숨겨져 있던 그것을 은밀하면서도 재빠른 동작으로 꺼냈다. 그것이란, 그녀의 가운뎃손가락 길이만한 날카로운 은빛 침이었고, 그 첨단부는 보랏빛으로 변색되어 있었다.
바로 그때, 밖으로 나간 로스클타가 되돌아오는 기척과 함께, 기쁨에 겨운 음색의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느반조가 잠시 정신을 파는 순간, 브나르바는 오른손에 쥔 침으로 그의 목덜미를 힘껏 찔렀다. 가늘면서도 몹시 빳빳한 금속이 연한 육질 사이로 너무나 부드럽게, 너무나 쉽사리 파고드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최대한의 순발력으로 그 흉기를 아주 깊숙이 밀어 넣었다.
이 부분이 이 소설의 절정이다. 느반조는 순식간에 벌어진 사태에 “공포와 분노에 찬 시선으로 가해자를 노려”봤고, 가해자인 브나르바는 그의 눈 빛 속에 갇혀서 얼어 붙고 만다. 느반조는 브나르바의 의해 암살된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 혁명위원회는 혁명과업의 유연성을 획득하게 된 것으로 평가한다. 그 사건은 자신 모두에게 경각심을 주는 것이며, 정부군에 대한 전략상 수정을 필요로 하며, 혁명 과업이라는 대업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한다. 느반조를 “진정한 혁명의 아들, 정의의 수호자”로 미화시켜 “허위를 진실로 포장하고, 부당도 정당으로 말짱하게 탈바꿈”시키는 정치예술의 미덕으로 둔갑시킬 계략을 세운다. 그리고 브나르바를 자유의 광장에서 공개 재판하여 처형시킬 것을 결정하다. 그리고 암살자인 브나르바의 이용할 계략을 세운다.
우선 그 여자를 영웅으로 부각시키는 연출이 필요할 것 같아요. 연약하고 아리따운 범인과 최고 권력자인 피살자, 그만하면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할 드라마틱한 요소는 충분하지 않습니까? 대중은 정의나 당위성과는 무관하게 약자를 편드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 점에 초점을 맞추어 잘만 선전에 이용한다면, 놈들이 자기네의 뿌리라고 착각하고 떠벌리기도 하는 민중으로부터 놈들을 유리시켜 존립기반을 위태롭게 만드는 것도 그리 허황한 기대는 아닐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국민들의 고통과 어려움이 좀 더 심화되도록 어느 정도까지는 기술적으로 방관 내지 조장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이번 내전을 촉발한 당사자에 대한 분노가 비등점에 빨리 도달할수록 우리의 권토중래는 그만큼 앞당겨질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공개재판에서의 암살자인 브나르바에 대한 검찰관의 논고를 통해 자신의 혁명 과업을 정당화 한다. 검찰관의 세 가지 논고는 이러하다. 첫째는 “범행 수법과 피고인의 심리에 대한 고찰”로, 범행 수법은 소름끼치도록 잔혹하여 정상참작의 여지가 없고, 법의 존엄과 사회 정의와 인민들의 공통된 정서를 감안해야 한다는 점. 둘째는 “피살자가 과연 죽어 마땅한 인물인가 하는 점”에서 그는 시민들의 탁월한 지도자이며 획기적인 정책 입안자며 실천자임을 광장에 모여 있는 시민들에게 강조하여 가해자의 정당성을 부인하는 선동을 하게 된다. 그리고 셋째는 피고인의 배후로 반혁명적 반국가적 집단임을 지적하며 “느반조는 애국자! 혁명 만세!”라는 군중의 함성을 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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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느반조와 브나르바의 성격을 탐색하면서 내러티브를 살폈다. 이제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인물 중 옹고 무스키와 야쿰을 살펴볼 차례다. 이들은 이 소설의 후반부에서 소설의 테마와 깊은 관계를 지니고 인물이기 때문이다.
옹고 무스키는 T시로 가는 버스에서 브나르바가 만난 젊은이이다. 그는 T시에 생존할 수 있는 일자리를 구하러가는 사람이다. 구직자이며 노숙자인 셈이다. 그는 “처음에는 절망과 슬픔으로 참 견디기 힘들”었지만, 공원에서 노숙하면 그곳에서 밑바닥 생활에서도 “상부상조하는 인간적 연결고리가 조성”하고 있음을 안다. 그가 자연공원에서 만난 친구는 텁석부리 사내인 야쿰이다. 야쿰은 “세속적 지위와 풍요한 생활이 소름끼치도록 정나미 떨어져, 가족까지도 포함한 모든 것을 팽개치고 가출을 단행했다고 너스레를” 떠는 자칭 전직교수였다는 사람이다.
옹고가 야쿰에게 금방 친밀감을 느끼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비둘기를 자유자재로 데리고 노는 재주꾼이라는 사실이었다. 야쿰의 비둘기는 광장과 공원 일대에 서식하는 비둘기 떼 중에서도 극히 보기 드문 축에 속하는 흰비둘기였는데, 어쩌다 다쳤는지 오른쪽 다리의 발가락 하나가 없어 뒤뚱거리는 불구였다. 언제 어떻게 길을 들였는지 놈은 유난히 야쿰의 움막 언저리에서 거의 떠나는 적이 없었다. 그가 마치 배배 꼬는 듯한 묘한 소리로 휘파람을 불며 빵조각 따위를 쳐들어 보이면, 멀리 있다가도 금방 날아와 그의 어깨 위에 올라앉아 그것을 받아먹곤 했다.
그 모양이 하도 신기해서 입을 다물지 못하는 옹고를 보고, 야쿰은 자기는 어떤 짐승도 간단히 친구로 만들 수 있다고 으스댔다.
“짐승과 친하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마음을 통하는 것이야. 그 요령만 터득하면 자네도 아무 짐승이나 친구로 사귈 수 있어. 특히 조류는 신경이 예민하고 소리에 민감한 짐승이기 때문에 다른 짐승에 비해 좀 더 세심한 정성과 주의가 필요하지. 어쨌든 인간에 비하면 이들은 훨씬 깨끗하고 신에게 가까이 다가가 있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네. 이들과 교감하다 보면 그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지.”
그러면서 야쿰은 옹고더러 흰비둘기와 친할 수 있는 비법을 전수해 주겠다고 제의했다.
옹고와 야콤은 민중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이들이 좀 더 긴밀하게 친하게 된 계기는 자유공원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비둘기 떼 때문이다. 비둘기와 교감하는 야쿰에게 옹고는 호기심을 갖는다. 옹고는 야쿰에게서 느반조를 살해한 젊은 여자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알고 있는 여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광장에서 공개재판에 있을 것이고, 그 재판이 한 인간을 정치적 제물로 삼는 행위라는 것을 알게 된다. 위의 인용문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흰 비둘기’의 원형 상징적 의미는 ‘평화’이다.
여자는 다소 초췌한 얼굴이었고 원피스는 구겨진 데다 때가 묻어 있었으나, 풀죽은 기색 없이 오히려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있었다. 자기에게 집중되는 무수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고 의연했으며, 군중 속에서 누구를 찾는 듯 그 아름다운 눈을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튼 그 의연한 기품은 보는 사람에게 강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해, 여기저기에서 낮은 탄성과 한숨소리가 새어나왔다.
이윽고 두 대의 차는 비둘기 떼를 쫓아서 날리며 노대에 다다랐다.
먼저 트럭 위의 군인들이 뛰어내려서는 지휘관의 지시에 따라 군중을 노대로부터 사방 십여 미터씩 물러나게 하여 일정한 공간을 확보한 다음 빙 둘러서서 방어벽을 구축했다.
위의 인용문은 브나르바가 처형될 자유공원에 서있는 그녀의 모습과 공원과 그 주위의 모습을 묘사한 부분이다. 여기에서 먼저 주목할 부분은 브나르바의 모습이지만, 그보다는 비둘기 떼와 두 대의 차와 트럭이다. 후자인 차와 트럭은 폭력을 의미한다. 혁명군과 남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비둘기 떼는 민중이며 여자 그리고 브나르바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자는 비둘기를 밟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계단을 통해 노대 위에 올라갔다. 그리하여 이미 법정 구조로 배치가 완료된 좌석들 가운데 피고인석으로 떼밀려가서 딱딱한 나무의자에 앉았다. 그녀 앞에는 작은 책상이 있었고, 책상 위에는 마이크가 놓여 있었다. 그녀의 자리 바로 앞에는 서리書吏와 정리廷吏같은 법정 직원석이 서로 마주보면서 그녀와는 대각을 이루었고, 그 서기석과 정리석 뒤에 각각 배치된 독립석이 검찰관석과 변호인석이었다.
공개재판을 받기 위해 법정으로 올라가는 브나르바의 올라가는 모습이다. “비둘기를 밟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계단을 올라가는 브나르바. 그런 그녀의 모습은 흰 비둘기와 등가치이다. 하얀 비둘기를 표상하는 모습이다.
브나르바는 의례적인 변호와는 관계없이 총살형을 당한다. 그녀는 장교가 사격명령을 내리려고 손을 들어올리자 “무쿰바”라는 이름을 부른다. 그 이름은 이 소설의 서두 부분에 등장했던 그녀가 사랑한 젊은 군인이다. 네 자루의 자동소총이 불을 뿜고 그녀는 “벌집처럼 뚫린 몸의 구멍구멍에서 흘러나온 피가 흰옷을 붉게 물”들이자, 멜빵 가방을 맨 젊은이가 군중 속으로부터 튀어나와 “여잔 무죄야!“라고 외치다가 총구의 과녁이 되어 쓰러진다.
어디선가 흰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와서 청년의 주검 위에 사뿐 내려앉았다. 비둘기는 자기의 분홍빛 발에 청년의 붉은 피가 묻는 것도 모르는 듯, 아니면 알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그렇게 잠시 서성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작열하는 햇볕 속에 그 광경을 내려다보는 시계탑의 숫자판이 가만히 정오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 부분은 소설의 결말 부분이다. 청년의 주검 위에 내려앉은 흰 비둘기는 중의적인 상징 의미를 갖는다. 브나르바의 환생 비둘기일 수도 있고, 비둘기의 상징의미는 ‘순백 평화’일 수도 있다. 평화는 참혹한 삶의 현장과 살육의 현장을 짓이겨 극복한 뒤 얻을 수 있다는 의미까지도 함유하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에서의 “작열하는 햇볕” “시계탑 숫자판” “정오”는 어떤 의미를 가진 기호인지 해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정오는 가리키는 작은 바늘과 큰 바늘이 하나로 겹쳐지는 상황을 의미한다. 주체와 객체의 하나. 피해자와 가해자의 하나. 억압받는 자와 억압하는 자의 하나. 두 대척적인 관계의 합침은 인간의 삶, 그 자체밖에는 없다. 생존은 누구에게나 필수 조건이다. 지나친 비약인지는 몰라도 그렇게도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프랑스혁명 당시의 어지러운 사회 속에 생존과 평화를 위해 투쟁하는 젊은이들과 권력으로부터 소외당하여 보통사람들, 민중들 모습을 통해 오늘날의 우리 모습을 투영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다시 읽힌다. 그리고 ‘마라 암살사건’의 가해자 샤를로트 코르테의 화신인 ‘브나르바 쿰사’. 잔다크같은 그 여인의 순백의 삶을 하얀 비둘기로 표상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래 기억될 것이다.
유한근 ----------------------------------------------
동아일보 신춘 평론으로 등단. 시집 〈사랑은 흔들리는 행복입니다〉외. 평론집 〈문학의 모방과 모반〉 〈현대불교문학의 이해〉, 〈한국수필비평〉등 다수. 명상언어집 〈별과 사막〉. 동화집 〈무지개는 내 친구〉 등 저서 논문 다수. 만해불교문학상, 한국문학평론가협회상, 신곡문학상 대상, 여산문학상 등 수상. 현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교수. 《인간과문학》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