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월간 여행작가 3-4월호, 신작기행시] 해산령: 그 아흔 아홉 굽잇길로 가는 평화 - 산강
김락기님의 신작기행시를 격월간 여행작가에서 소개합니다. 멋진 사진이 같이 있네요.
해산령 / 산 강
-그 아흔 아홉 굽잇길로 가는 평화
평화는 그저 오는 게 아니다
지난한 길목을 지나 높은 재를 넘어야만 온다
아흔아홉 굽잇길을 올라 상수上壽에 젖을 즈음
반대편으로 아흔아홉 굽잇길을 내려가야 하는 시발점
돌아올 때 거꾸로 오르내려야 하는 분기점
남한 최북단 최고봉에 5리길 긴 터널 1,986m
그 해산터널을 벗어나자마자 만나는 곳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동촌리 460번 지방도
평화를 향해 나아가는 2차선 산복도로
굽이굽이 길섶마다 연분홍 개복사꽃, 비탈마다 산벚꽃 물결
하얀 자작나무 떼, 적송림 군락, 청록 산등성이를 타고 오는 단풍 불꽃
온통 순백의 적요를 깨뜨리는 벼랑 끝 낙석, 등짝을 후려치는 장군 죽비
긴장의 운행 속에 드디어 오르는 높드리, 일산日山
사람들이 섬기는 신산神山, 해발 1,194m
적설봉과 재안산을 얼싸안고 남과 북을 잇는 민족의 영산, 해산
그 고갯마루, 이름 하여 돌올한 해산령
산악의 제왕 호랑이가 길손을 맞이하는 곳
또한 그 산지기 범의 점호를 받고 검문을 거쳐야만 하는 곳
평화는 그저 오는 게 아니다
평화는 그저 오는 게 아니다
지난한 길목을 지나 높은 재를 넘어야만 온다
아흔아홉 굽잇길을 내려가 재안터널, 대붕터널을 지나 비수교를 건너면
반기는 장대한 물의 요새, 평화의 댐*: 어서 와서 종을 치시오!
“빛은 어둠보다 더 강하고 삶은 죽음보다 더 강하다”
데스몬드 투투 주교의 메시지가 세계평화의 타종을 따라 울린다
임남댐아 대답하라
산줄기 강줄기는 민통선을 넘고 넘어 흐르고 만나는데
그놈의 이념이, 이즘이 무엇인지
너는 어이 반세기가 넘도록 말이 없는가
6.25 동족상잔의 사선에서 무참히 쓰러져간 저 앳된 청춘들
무명용사의 녹슨 철모는
시방도 썩은 카빈소총의 개머리판에 얹혀 피를 토한다
그리움은 이끼 되고 서러움은 돌이 되어버린 비목이여, 여기 파로호!
어스름결 윤슬로만 반짝이는 호수는 물길 깊이 아픔을 감추고 있다
북녘 고향으로 날아가지 않고 남아있는 몇 마리 철새에게, 그리고
쪽배도 한가로이 낚시를 드리우고 있는 저 이름 모를 조사釣師에게
황쏘가리는 즐비하건만
이 영욕의 인공호수는 과연 자유어自由魚를 물릴 것인가
자유로움 속에서 자유를 잊어버린 자들은 가라
낭떠러지 아래 산양 따라 호변 따라 돌밭길을 가라
속세의 발길이 끊어지고 물 건너가다 지칠 무렵 나타나는 곳
시간이 멎어버린 마을, 비수구미 마을
꽃피고 새가 우는 샹그릴라, 평화로움 그 본향
평화는 그저 오는 게 아니다
* 평화의 댐: 높이 125m(해발 270m), 길이 710m, 총저수량 26억3천만㎥,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산321번지 소재
김락기 -----------------------------------------------
山堈 김락기님은 시조시인. 수안보상록호텔 사장. 시집 《바다는 외로울 때 섬을 낳는다》, 시조집《독수리는 큰 나래를 쉬이 펴지 않는다》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