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문예연구 2013년 겨울호, 기획특집 문학과 문화콘텐츠] ‘애니팡’ 시인 하상욱과 문화콘텐츠 - 서덕민
"문화콘텐츠가 스토리텔링이라는 용어와 쌍을 이루며 세계의 거의 모든 대상에 이야기를 부여하기 시작하면서 각종 서사장르는 시장으로 나설 수 있는 길을 모색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시는 본질적으로 서사를 증발시키고 뉘앙스만을 남겨 놓는 장르이다. 대중이 보기에 시는 멍청하게 크기만 한 텅 비어 있는 주머니이다. 하상욱은 그 주머니를 세간의 온갖 잡다한 이야기들로 채워 놓았다. 목을 차이는 엽기적인 사진을 담아 놓고 ‘목차’라고 우긴다. 수능을 본 수험생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고, 잘난 여자친구 자랑을 늘어놓기도 한다. 대중은 내용물을 우선 확인하고 주머니는 뒤에 인식한다. 주머니는 그냥 주머니일 뿐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시라고 부른다. 이것이 오늘날 시의 운명이고 시의 사용법이다. 이제 시인들도 트위터 계정 하나쯤은 있어야 하는 시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애니팡’ 시인 하상욱과 문화콘텐츠 / 서덕민
1. <애니팡> 시인 하상욱 연대기
‘시팔이’라는, 마치 욕설과도 같은 닉네임으로 최근 소셜네트워크를 지배하고 있는 하상욱을 아시는지. 하상욱은 2013년 11월 현재 5만 명의 팔로워를 보유하고 있는 요즘 가장 ‘핫한’ 시인이다. 150만 명의 팔로워를 보유하고 있는 ‘트위터 대통령 이외수’나 50만 명의 팔로워를 보유하고 있는 공지영과 같이 어마어마한 파워 트위터리안은 아니지만 30대 젊은 직장인이 불과 1년 반 만에 5만 명에 육박하는 추종자를 만들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참고로 파워 트리위터리안으로 분류되는 인사들 대부분은 정치인이나 연예인과 같은 사람들이고, 이들을 제외하면 팔로워 5만 명을 보유한 일반인 유저는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2년 한국 코카콜라가 1년 반 동안 모은 팔로워가 5만 명이라고 한다면 하상욱이라는, 이제 막 시인으로 불리기 시작한 이 청년이 지난 1년 반 동안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지 알 수 있다.
하상욱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이유는 지난해 온 국민을 들끓게 했던 모바일 게임 ‘애니팡’을 소재로한 시 한 편 때문이다. 시 「애니팡」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로가/소홀했는데//덕분에/소식듣게돼’ 허무하고 시시하다. 띄어쓰기도 잘되지 않았다. 이 텍스트는 시詩라기보다는 생활에 대한 짧은 단평短評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한정된 게임 기회를 모두 소진한 이후 게임의 기회를 더 갖기 위해 다른 유저에게 ‘선물-하트’를 받아야 하는 ‘애니팡’의 인터페이스가 중요한 화두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난해 추석과 함께 기억한다. 추석 전야 한 공중파의 8시 뉴스에서는 ‘애니팡’에서 유통되는 ‘하트’를 둘러싼 상관과 부하직원의 이야기가 보도됐다. 게임 그 자체보다 게임에서 파생되는 이야기가 대중을 끌어들인 것이다. 그렇게 ‘애니팡’은 ‘게임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시화시킴으로써 소비자를 유혹하고 소비 계층을 확대할 수 있었다. 하상욱은 대중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시형식을 빌려 트위터에 올렸고 반응은 예상 외로 뜨거웠다.
하상욱은 단 16글자로 ‘SNS 시인’ 혹은 ‘애니팡 시인’으로 불리게 됐다. 일상에 대한 재치 있는 단평이 대중의 공감을 얻음으로써 그는 5만 명의 팔로워와 ‘시인’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그리고 그는 SNS 활동을 통해 발표한 작품을 모아 전자책으로 출간, 무료로 배포했다. 이 책은 10만 명 이상이 다운로드 받았다. 여세를 몰아 2013년 올해 『서울시1·2』(중앙북스)를 종이책으로 출간하며 각각 수만 부의 판매고를 올리기도 했다. 전자책으로 공개된 글을 오프라인으로 출간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시 1』이 2만 5,000부의 판매고를 올리고, 뒤이어 출간된 2집이 5,000부 넘게 판매된 것이다.(2013년 9월) ‘어지간한 중견 시인도 6개월 내에 초판 물량을 소화하지 못하는 시장의 상황을 감안했을 때 하상욱의 성과는 대단한 것이다.’(서울경제, 2013년 9월)
이제 하상욱의 시는 담뱃갑에 각인되어 소비되고 있다. 매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리는 고은의 작품도 아니고, 민족어의 결을 섬세하게 다룰 줄 알았던 우리 사단의 여러 대가들의 절창도 아닌, 제도권 문학에 명함도 내밀어 보지 못한 한 젊은이의 작품이 KT&G의 담배 브랜드인 ‘타임(Time)’ 3종의 전·후면에 각인되어 판매되기 시작한 것이다. 중산층의 대표적 소비재로서 담배가 갖는 위상을 고려해볼 때, 또 브랜드 이미지 제고를 위해 현대인들의 감수성을 디자인에 적극적으로 반영해가는 시장의 특징을 고려해볼 때, 담뱃갑에 파워 트위터리안의 시를 새겨 넣었다는 정황은 매우 이례적이고 특별한 것이다.
스마트폰과 SNS라는 디지털 기술의 총아가 집약된 매체 환경으로부터 탄생한 하상욱과 그의 텍스트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산업 현장에 반영되고 있다. 이러한 정황을 감안한다면 그의 작품을 시詩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콘텐츠(Contents)’라고 지시하는 편이 훨씬 정확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상욱 현상’은 현대 문학과 문화콘텐츠의 문제를 매우 직설적이고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됐다.
2. ‘시팔이’의 탄생
‘시팔이’라는 닉네임은 ‘시를 파는 이’라는 뜻이다. 하상욱의 이력 어디에도 ‘**신문 신춘문예 당선’이나 ‘**문예지 신인상’과 같은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하상욱은 제도 문학권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아웃사이더이다. ‘시팔이’는 트위터나 페이스북과 같은 공간에서 ‘잡스런’ 쓰기에 임하는 한 문학청년의 자조 섞인 자기 현시의 의미를 담고 있는 닉네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가 신춘문예를 비롯한 각종 문예 공모전을 통해 문학인들의 동아리에 편입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이 뒷받침되어야 이러한 생각은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특이한 것은 ‘시를 팔다’가 아니라 ‘시를 팔아 먹다’라는 진술이다. 여기서 우리는 제도 문학권을 의식한 그의 글쓰기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문학에 대한 일말의 경외감이 전제되어 있지 않았다면, 굳이 ‘팔아먹다’라는 서술어를 사용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시를 팔아먹는 행위의 줄임말 ‘시팔이’가 너무나 자연스럽고 친숙하게 욕설을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이러한 생각은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모두가 알다시피 우리 문단에는 한 세기에 육박하는 역사를 자랑하는 신춘문예라는 신인 등용 절차가 있다. 논자에 따라서 차이가 있지만 1911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하던 『대한매일신보』에서 시행한 ‘신시현상모집’이라는 문예 행사를 신춘문예의 기원으로 볼 수 있다면(조재영, 『신춘문예 시 연구』, 창원대 박사학위논문, 2005) 신춘문예를 한 세기에 육박하는 글쓰기 행사라고 표현하는 것도 그리 지나치지는 않다.
우리나라에서 ‘시인’이라는 호칭은 그래서 더욱 특별한 의미를 내포한다. 문학 전문가들의 인준 절차를 통해 면허를 받은 사람을 우리는 ‘시인’ 또는 ‘작가’라고 부르고 대중들도 그렇게 믿어왔다. 신춘문예와 각종 문예지의 신인 등용 절차가 갖는 무게는 하상욱을 ‘시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쉽게 허락하지 않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현대시를 문화 콘텐츠로 개발하는 문제의 전면에는 우리 문학과 일본 문학에만 존재하고 있는 등단 제도가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권위와 전통을 자랑하는 몇몇 일간지와 문예지가 신인을 발굴하고 이를 기반으로 문단의 역량을 강화해가는 우리의 신인 등용제도는 문학의 생산-유통방식에 많은 제한을 가한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문학은 다른 소비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유통 구조를 가지고 있다. 즉 문학은 ‘작가(생산자)-텍스트(소비재)-독자(소비자)’로 구성된 시장의 구성원들에 의해 생산되고 소비된다. 소수의 독과점이 전문가 집단을 내세워 최초의 독자를 자처하고 나서는 문예 공모전 제도는 시장의 논리에 충실한 생산 양식은 아니다. 이 제도에는 일부 독과점이 약간의 기회비용을 지출하여 기존의 체제를 공고히 하고자 하는 전략이 숨어 있다. 문예 공모전이 배출한 작가들이 기존 시스템으로 수렴됨으로써 독과점들은 생산수단을 지배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시스템 안에서 생산된 콘텐츠는 대중을 위한 것이 아니라 문학전문가 집단으로 구성된 최초의 독자들을 향하고 있다.
“문학에서 주류, 비주류를 나누는 기준은 뭐죠?”
이 사람, 인터뷰를 시작하자 대뜸 질문부터 쏟아낸다. 25자 내외의 짧은 시로 인터넷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은 하상욱(31) 씨다. 신춘문예 등 등단제도를 설명하자, 하씨는 등단한 작가들의 작품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작품이 내용에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되묻는다. (……) 하씨는 “사람들이 저를 작가로 부를지 시인으로 부를지 회사원으로 부를지 머뭇거릴 때 내 전략이 성공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한국일보』, 2013년 1월 21일자 20면
하상욱의 콘텐츠들은 제도권 문학에 적지 않은 문제의식을 제기한다. ‘문학 전문가 집단의 검증을 거치지 않은 작품은 문학으로 이해될 수 없는가’하는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그동안 분명하고 단호하게 대답해 왔다. ‘그 작품은 문학적 긴장감이 결여되어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베스트셀러작가들이 평단의 인정을 받지 못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하상욱의 콘텐츠는 그 내용과 형식의 저속함을 지탄하며 눌러버릴 수만은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의 콘텐츠는 문학이 시장의 논리를 어떻게 수렴하고 매체환경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우회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저를 작가로 부를지 시인으로 부를지 회사원으로 부를지 머뭇거릴 때 내 전략이 성공했다고 본다.’는 말은 그가 제도권 문학의 배타성을 어렴풋이나마 인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이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시팔이’라는 그의 별칭으로도 증명된다. 그는 제도권 문학의 권위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며 다매체 시대의 콘텐츠 생산 주체가 어떠한 포지션에 있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일부 소비자들은 그를 시인으로 받아들이고, 일부 소비자들은 그를 회사원으로 받아들인다. 문학을 향유하는 계층과 그렇지 못한 계층 모두를 향하는 것으로서 그의 콘텐츠는 더욱 단단한 입지를 마련한다. 이것이 10만 명에 이르는 독자를 확보한 시집이 탄생한 주요한 계기이다. 이렇게 특정한 개인이 특정한 매체에 특정한 쓰기 양식을 제시하며 영향력을 행사한 사례는 매우 드물다. 단순한 논증이 되겠지만 우리의 문학이 ‘순수’를 주창하며 대중에게 배타적인 입장을 취한다면 문학을 콘텐츠로 전환하는 일은 요원할 것이다. 쓰기 환경의 변화에 무감한 채 문학 담론을 확대하고 재생산하는 과정을 기존의 독과점 형태로 존속시킨다면 상품으로서의 문학의 미래는 그리 밝지 않다.
3. 작가, 소, 개
언급한 것과 같이 제도권 문학 안에서 하상욱을 ‘시인’으로 부르고 그의 작품을 ‘시’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사실 그의 콘텐츠는 제도권 문학에서 요구하는 시의 장르적 규범을 철저히 따르려한 흔적이 발견되지도 않는다. 대중이 하상욱을 ‘시인’이라고 부르고 그가 제작한 콘텐츠를 ‘시’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은, 하상욱 스스로가 자신이 창조한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함축하는 언어를 ‘시’라는 문학 장르로 지시했기 때문이다. 즉 그의 콘텐츠는 브랜드 네이밍(brind naming)과정에서 문학이라는 틀을 빌려온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 될 것이다.
해당 사진들은 SNS와 종이 책에 공개된 콘텐츠다. 첫 번째 사진은 오프라인으로 출간한 『서울시1』의 표지이다. ‘시詩’를 ‘시市’로 읽게 하는 다소 어처구니없고 유치한 언어유희의 산물이다. 다른 사진들 역시 SNS와 인쇄 매체에 함께 공개된 콘텐츠이다. 이들 콘텐츠는 인쇄 매체의 고유 양식인 ‘작가 소개’, ‘작가의 말’, ‘목차’ 등을 유치하고 엽기적인 방법으로 비웃고 있다. ‘작가 소개’의 경우 ‘작가’와 ‘소’ 그리고 ‘개’의 사진을 나열함으로써 실소를 자아내고 있다. ‘작가의 말’ 역시 같은 맥락이고, ‘목차’의 경우는 하상욱 연관 검색어로 묶여 있을 정도로 각광을 받은 콘텐츠이다. 자신의 목을 발로 차는 사진을 통해 팔로워들에게 찬사를 받았다. 이렇게 인터넷 커뮤니티의 유머 사이트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저자의 프로필이 제시된다.
이는 의도적인 조야함과 통속성으로 고급문화와 하위문화의 경계 넘기를 시도하는 일종의 키치(Kitsch)이다. 이들 콘텐츠는 인쇄매체가 가지고 있는 권위와 그 권위에서 발현되는 고리타분함을 공격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새로운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것이 유치하고 단순한 말놀이에 불과하다고 해도 독자들이 즐거워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상욱이 제작한 콘텐츠는 즐거움을 최고의 미덕으로, 지루함을 최고의 악덕으로 삼고 있다. 즐거움 그 자체가 방식이며 목적이고 내용이며 소비의 대상인 것이다.
2006년 등장한 트위터는 블로그와 메신저의 기능을 결합시킨 특이한 서비스이다. 블로그가 대중의 자기표현의 욕구를 반영한 서비스라면 메신저는 온·오프라인에서 사회적 관계망을 형성하려는 대중의 욕구를 반영하고 있는 서비스이다. 대중들은 140자로 제한된 형식을 통해 자신을 현시할 수 있는 강렬한 메시지를 생성하고, 이를 통해 대중과 소통한다. 글자 수의 제한은 의사 전달의 함축을 강제하고, 다른 한편으로 사진과 영상 매체가 동원될 수 있는 여지를 열어 둔다. 글자 수의 제한으로 생산된 텍스트의 행간은 무한대로 확장되지만 이렇게 확장된 행간에 각종 시각 매체를 삽입하면 공간은 다시 조밀해질 수 있다.
하상욱이 자신의 콘텐츠를 활자 매체를 대표하는 ‘시’라는 양식으로 설명하고, 그 양식을 다시 해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콘텐츠가 존재하고 있는 환경의 문제와 관계가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작가’, ‘소’, ‘개’가 나열된 사진은 기존의 문학 양식을 빌려와 그에 맞는 작업을 수행하긴 했지만 독자들이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의식한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상욱의 시는 “현대적 삶을 ‘재현’한 글이 아니라 현대적 삶을 그대로 ‘반복’한 디자인에 가깝다. 아울러 그는 깊이가 사라진 세계에서 깊이를 체현하기보다 이러한 반복을 통해서 모든 것이 조롱거리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김성윤, 『한겨레』, 2013년 3월 8일, 20면 )
연과 행의 구분이라는 시의 최소 형식만을 답습하고 있는 위의 텍스트가 대중이 열광하는 하상욱의 콘텐츠이다. 견해에 따라 의견이 분분할 수 있겠지만 전통적인 문학관을 적용한다면 이것들을 시라고 부르는 것에 선뜻 동의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띄어쓰기가 맞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하씨는 “시를 문학보다 일종의 디자인으로 인식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디자인의 첫 번째 원칙은 단순화예요. 어떤 작품에서 한 요소를 더 빼면 타인이 내 의도를 못 알아보는 시점이 있는데, 그때까지 모든 것을 단순화시키죠. 좋은 디자인은 ‘더 이상 뺄 게 없는 디자인’인데, 똑같은 개념을 글 쓸 때도 대입시켜요.”
『한국일보』, 2013년 1월 21일자 20면
텍스트를 장식하는 문제 때문에 띄어쓰기가 무시되고 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필사본 시대가 막을 내린 이후 텍스트의 장식에 대한 고민과 텍스트의 내용에 대한 고민이 비슷한 수준으로 이루어진 적이 있었을까. 시각 정보의 강렬성을 위해 통사적 규칙을 희생한다는 논리는 문학의 내용이 일정한 수준에만 접근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전제로 한다. 하상욱의 콘텐츠들은 메시지보다는 가독성을 앞에 놓고 있다. 시행을 길게 늘어놓지 않은 것 역시 스마트폰이라는 매체 환경을 적극적으로 고려한 결과일 것이다. 디자인의 원리와 쓰기의 원리가 일맥상통하고 있다는 견해는 매우 새롭게 다가온다. 디자인의 단순화 원리와 시의 간결성, 그리고 쓰기 환경의 제약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모두 충족시키는 과정에서 이러한 콘텐츠가 생산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그의 모든 콘텐츠에는 「하상욱 단편 시집 ‘○○○’中에서」라는 제목이 본문의 말미에 붙어 있다. 이러한 형식은 종이책에도 일관되게 적용됐다. ‘하상욱 단편 시집’은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텍스트이다. 텍스트의 실체가 불분명하다는 설정은 독자에게 텍스트의 내용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강요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안도감을 준다. 이로써 독자는 텍스트를 읽으며 특별한 정보를 얻어야 한다거나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는 ‘독자의 의무’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텍스트의 실체를 불분명하게 방법은 구두 매체 시대의 서사 전략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글의 제목이 본문의 말미에 제시되고 있다는 점에 다시 주목할 수 있다. 글자 수를 극단적으로 제한하고 있는 텍스트는 내용만으로는 메시지가 완성되지 않는다. 작가의 의도는 제목을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 하상욱의 모든 콘텐츠는 이 형식을 따르고 있다. 본문만으로는 내용을 짐작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독자를 텍스트 해석의 과정으로 자연스럽게 연행한다. 하상욱의 콘텐츠는 수수께끼의 내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독자의 텍스트 해석 과정을 촉진하는 담화 양식으로서 수수께끼는 풀이의 과정을 통해 사고의 지연을 만들고 종국에는 정서적 환기를 몰고 온다는 측면에서 수사론적 검토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아침에는 네 발, 정오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이라는 수수께끼가 전하는 메시지는 인간 삶의 덧없음과 시간의 강력한 위력이라는 삶의 진리이다. 수수께끼는 텍스트 이면에 존재하는 담론을 강화하는 수단으로서 알레고리적이다. 문면에 드러나는 정보를 넘어서는 내용이 존재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충족되었을 때 독자들은 즐거움을 느낀다. 독자의 기대감이 충족된다는 것은 콘텐츠 생산자와 독자의 생각이 일치한다는 논리로 수렴된다. 이것이 하상욱의 콘텐츠가 보유하고 있는 ‘설득의 기술’이다.
이러한 수사론적 방법론을 기반으로 하상욱의 콘텐츠는 사회적 이슈를 빠르게 탐지하고 신속하게 흡수한다. 정말이지 뱉는 말마다 시가 되니 우리는 잠시 동안 하상욱을 SNS계의 음유 시인라고 불러도 좋고, SNS계의 풍자 시인라고 불러도 좋겠다. ‘내가/다른걸까//내가/속은걸까’라는 시의 제목은 「맛집」이다. 각종 매체를 통해 소개된 맛집에 가서 실망해 본 사람들은 이 콘텐츠를 접하고 ‘좋아요’를 눌러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상욱의 콘텐츠는 실시간으로 이슈를 수집하고 이를 시라는 형식으로 재발송한다. 그리고 대중과 언론은 이 메시지에 내포된 수수께끼를 손쉽게 풀어 다양한 방편으로 배포한다. 그렇게 하상욱의 콘텐츠는 가상공간에서 무한 증식하는 소비재로 탈바꿈한 것이다.
4. 시를 죽여라(Kill the poem)
시의 유통기한은 끝났는가. 일찍이 플라톤은 시의 용도폐기 이유를 효용성의 문제로 귀결시킨 바 있다. 신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하고, 전장에 나가 싸워야 할 젊은이들에게 동정심을 유발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원래 시는 자연을 모방했다. 문제는 자연(인간)이 시를 모방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젊은 베르테르를 따라 죽어나가는 젊은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시는 딜레마에 빠졌다. 시의 가치는 윤리성과 효용성의 지평 위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문학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이다. 세계대전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지독한 자기 기만적 행위라는 지적의 저변에도 시의 나약함과 쓸모없음에 대한 성찰이 일정 부분 내재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제기되는 시의 무용론은 기존의 논의들과는 궤를 달리하고 있다. 오늘날 시의 문제는 시가 시를 모방하는 단계에서 비롯된다. 플라톤 식으로 이해하자면 시는 수없이 자기복제를 반복하며 자연에서 멀어져간다. 시는 예술이기를 거부하고 형식의 자율성을 극대화해가며 스스로를 지시한다.(물론 이는 대부분의 현대 예술이 겪는 하나의 딜레마일 수 있다.) 대중들이 보기에 시는 형식적으로는 지나치게 난해하다. 행간에는 뭔가 심중한 의미를 숨기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시는 거대한 의미의 덩어리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대중들에게 시는 해석해야 할 것이고 학습해야 할 대상이다. 시의 위기는 여기서 시작된다.
요하네스 아우어의 「시를 죽여라(Kill the poem)」라는 작품은 시가 다매체 시대에 어떠한 위상을 가질 것인지를 조망하게 하는 텍스트이다. 인터넷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이 작품은 총을 발사해 시를 지워가는 인터페이스를 선보이고 있다.(해당 텍스트의 해석과 주석에 관해서는 다음의 논저를 참조할 수 있다; 김요한, 『디지털 시대의 문학하기』, 서진북스, 2005, pp34~40; 또한 제시된 요하네스의 작품 「시를 죽여라」는 다음의 주소를 활용하여 접근할 수 있다. http://auer.netzliteratur.net/kill/killpoem.htm) 독자가 클릭을 하면 탄환이 발사되고, 탄환은 단어를 삭제해나간다. 탄환이 발사되면 발사될수록 텍스트는 간결성을 확보하며 행간을 넓혀간다. 그러다 결국 시는 화면에서 사라져버린다.
이 작품은 근본적으로 다매체 시대의 텍스트의 파괴와 저자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단어의 위치를 변화시키거나 단어를 제거함으로써 텍스트의 구조와 내용상의 의미를 파괴하고, 독자의 개입을 통해 텍스트의 저자가 누구인가를 고민하게 한다.’(김요한, 같은 책)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시라는 장르가 디지털콘텐츠와 의외로 궁합이 잘 맞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형식의 자율성과 여기서 비롯된 넓은 행간은 텍스트의 의미를 모호하게 함으로써 의미를 증발시켜 버리지만, 역설적으로 독자의 참여 가능성을 촉진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한다. 이는 하상욱이 140자로 제한된 쓰기 환경 속에서 수수께끼를 연상케 하는 시작법(?)을 선보인 것과 일맥상통한다.
문화콘텐츠가 스토리텔링이라는 용어와 쌍을 이루며 세계의 거의 모든 대상에 이야기를 부여하기 시작하면서 각종 서사장르는 시장으로 나설 수 있는 길을 모색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시는 본질적으로 서사를 증발시키고 뉘앙스만을 남겨 놓는 장르이다. 대중이 보기에 시는 멍청하게 크기만 한 텅 비어 있는 주머니이다. 하상욱은 그 주머니를 세간의 온갖 잡다한 이야기들로 채워 놓았다. 목을 차이는 엽기적인 사진을 담아 놓고 ‘목차’라고 우긴다. 수능을 본 수험생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고, 잘난 여자친구 자랑을 늘어놓기도 한다. 대중은 내용물을 우선 확인하고 주머니는 뒤에 인식한다. 주머니는 그냥 주머니일 뿐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시라고 부른다. 이것이 오늘날 시의 운명이고 시의 사용법이다. 이제 시인들도 트위터 계정 하나쯤은 있어야 하는 시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서덕민 -----------------------------------------------
전주대학교 국어교육과 객원교수. 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동대학원 박사과정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