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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좋은수필 2013년 12월호, 신작수필 16인선] 머나먼 곳 바그다드 - 성낙향

신아미디어 2014. 9. 5. 21:35

"여행이란 여행지에 대해 가지고 있는 환상을 깨뜨리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게 꼭 슬픈 일만은 아니다. 마음으로 그리워하던 도시를 거닐고 나면, 옛 연인과 재회하고 돌아온 밤처럼, 가슴에 차오르던 고통스러운 갈망의 감정을 비워내고 후련히 잠들 수도 있을 테니까. 나는 사실 유럽이라는 나라들이 내게 준 환상을 지우고 싶다. 그러나 바그다드. 어린 날에 창조했던 위대한 도시 하나만은 결코 마음에서 사라지게 하고 싶지 않다."

 

 

 

 

 

 

 

 머나먼 곳 바그다드        성낙향

 

   여덟 살에 바그다드를 만났다. 외국의 수많은 도시 가운데 처음으로 알게 된 도시였다. 그때 내가 읽은 동화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은 모두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벌어졌다. 어린 시절의 나는 서정적인 안데르센 동화보다 아랍의 역동적인 민화가 더 좋았다. 음악 교과서의 동요보다 이장희, 신중현의 가요들에 마음이 끌린 것처럼. 어쨌든 바그다드, 그곳에는 상남자 알리바바와 신드바드가 있었고, 터번을 두르고 긴 칼을 찬 눈썹 짙은 마초들이 있었다. 풍만한 바지를 입은 요염한 공주, 그리고 보석으로 치장한 화려한 돔 지붕들의 궁전이 있었다.
   나는 푸른 타일로 지어진 집들의 골목을 매일같이 돌아다녔다. 골목에는 여자들의 찰그랑거리는 팔찌 소리와 항아리 속에 담아둔 유향, 달콤한 향나무 향을 지닌 루반의 냄새가 풍겼다. 덥고 건조한 그곳에는 슬픔조차 건조해서 도무지 눅눅한 우울이라곤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바그다드에는 음모와 야망이 흘러넘쳤다. 그곳은 환상과 현실이 뒤범벅된 매혹적인 도시였다. 바그다드, 바그다드, 그 이름을 발음하면 혓바닥에 피어싱한 쇠붙이들이 치아와 부딪혀 달각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바그다드, 바그다드 하고 되뇌면 뜨거운 햇살 아래 오래 서 있을 때처럼 갈증이 일었다.
   영화 〈바그다드 카페〉를 보고 궁금했다. 황폐한 마을 어딘가에 을씨년스럽게 서 있던 카페의 이름이 왜 ‘바그다드’였을까 하고. 내가 간직한 바그다드의 이미지는 그곳과 어울리지 않았다. 바그다드가 가진 정조는 큰 시장이 열리는 날처럼 활기찼지, 어둡고 침울하진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했다. 트럭 운전사들을 상대로 거친 삶을 살아가는 카페 주인 브렌다, 그녀도 바그다드를 그리워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고. 그래서 그 명랑하기 짝이 없는 네 글자를 어울리지도 않는 자기 건물의 간판에 박아 넣었던 거라고 말이다.
   고등학교 지리수업 시간에 만난 바그다드는 비늘을 긁어낸 생선처럼 펄떡임이 없었다. 지리부도 속의 그 바그다드는 동명이도의 도시인 양 낯설었다. ‘이라크의 수도.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다섯 개의 아랍국가 사이에 둘러싸인 나라. 그런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누대에 걸쳐 무역로의 교차점이 되었으며, 또한 페르시아, 알렉산더제국, 오스만튀르크, 몽골 등 세기의 패권국이 차례로 휩쓸고 지나간 땅’ 그리고 1980년. 화염과 포연에 휩싸인 바그다드…. 현대에 이르러 바그다드는 아름다운 판타지영화의 배경에서 참혹한 다큐멘터리의 현장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어려서 바그다드를 만났을 때, 나는 그곳을 아틀란티스와 같은 상상 속의 도시라고 여겼는지 모른다. 바그다드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건 그 때문이었던가. 바그다드는 나와 현실의 우리가 함부로 들락거릴 수 없는 곳이어야 했다. 혹시라도 내가 마음을 바꿔 바그다드에 간다면 그곳에는 나의 사랑했던 바그다드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 깨달음과 함께 위대했던 도시 하나가 내 마음속에서 영영 사라지고 말 것이다.
   파리, 피렌체, 바르셀로나…. 그 도시들에도 오랜 세월 만들어온 나만의 환상이 깃들어 있다. 그것은 그 나라에 다녀온 사람들이 나에게 심어준 환상들이다. 사진이나 기행문을 통해 사람들이 알려주는 대로 나는 그 도시들을 동경하고 흠모했다. 하지만 그들이 보여준 것은 그 도시가 지닌 가장 아름답고 장엄한 부분들인 것을 안다. 나는 실체가 아닌, 이 세상에 없는 왜곡된 도시를 사랑하여 애를 태웠을지 모른다. 홍콩여행을 통해 나는 그것을 얼마간 확인하였다. 홍콩의 아가씨와 그곳의 거리는 노래 가사처럼 황홀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여행이란 여행지에 대해 가지고 있는 환상을 깨뜨리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게 꼭 슬픈 일만은 아니다. 마음으로 그리워하던 도시를 거닐고 나면, 옛 연인과 재회하고 돌아온 밤처럼, 가슴에 차오르던 고통스러운 갈망의 감정을 비워내고 후련히 잠들 수도 있을 테니까. 나는 사실 유럽이라는 나라들이 내게 준 환상을 지우고 싶다. 그러나 바그다드. 어린 날에 창조했던 위대한 도시 하나만은 결코 마음에서 사라지게 하고 싶지 않다.

 

 

성낙향  ---------------------------------------------

   성낙향님은 수필가.《경남일보》신춘문예 수필 당선, 수필집 《염장다시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