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좋은수필 2013년 12월호, 신작수필 16인선] 이웃집 은행나무 - 송연희
"은행나무는 이제 마른버짐이 떨어져나가듯 표피가 조금씩 떨어져나간다. 골목길에서 이웃 사람들이 모여 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누군가의 입에서 “죽은 나무가 집에 있음 재수가 없다는데….” 한다. 조만간 죽은 은행나무마저 눈앞에서 사라질 모양이다. 가을 햇살이 호박위에 똬리를 튼 채 졸고 있다."
이웃집 은행나무 / 송연희
뒷집 남자가 은행나무 밑동의 껍질을 벗겨내고 있다. 나무를 죽이기로 마음먹은 모양이다. 나무에 칼질을 하는 그 마음이 어떨까. 이웃 사람들을 향한 무언의 대답치곤 나무가 받는 고통이 너무 심하다. 뒷집엔 은행나무가 두 그루 있다.
집 뒤란과 대문간에 있는 두 그루 은행나무는 키 높이가 이층집을 넘는다. 대문간에 있는 나무는 가을이면 은행 알이 수북이 떨어진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발에 밟혀 골목길이 지저분하다. 그 집 할머니가 은행껍질을 물로 씻어내는 날은 골목 안이 똥냄새로 가득하다.
골목안 사람들은 나무의 존재를 가을이 되어야 알아챈다. 바람이 불어 노란 은행잎이 골목길에 뒹굴면 투덜거리는 소리가 낙엽처럼 쌓인다. 그들에게 은행잎은 그냥 쓸어내야 할 귀찮은 쓰레기다. 사람들의 불평은 은행나무 집에서 낙엽을 쓸지 않는 데 있다. 할머니는 온 동네 간섭을 다하면서도 자기 집 대문 앞을 쓸지 않아 욕을 먹는다.
지난가을 어느 날이었다. 골목 안에서 소요가 일어났다. 옆집 여자가 비닐 자루에 은행잎을 쓸어담아 뒷집 대문간에 갖다 둔 것이다. 쓸기는 했지만 버리는 건 그 집에서 해야 할 거 아니냐고 했다. 할머니가 젊은 사람이 그러면 되느냐고, “할머니도 경우가 없으시네, 그 집 나무 땜에 성가셔 죽겠구만.” 하는 소리를 남자가 집으로 들어오다가 들었다.
이제 은행나무는 잎을 달지 않는다. 멀쩡하던 나무가 여자들의 입 초사에 생목숨이 끊긴 것이다. 무성한 잎들 속에서 들리는 새소리와 죽은 나뭇가지에서 우는 새들의 소리는 다르다. 푸른 잎새들 속에 숨어 서로 부리를 쪼아대며 내는 소리는 맑고 간지럽다. 생명이 살아 숨 쉬는 소리라 듣는 귀도 즐거웠다.
죽은 나무에는 새들이 앉지 않는다. 혹 앉았다 하더라도 불안하고 위태롭게 군다. 죽은 나무를 볼 때마다 미안한 생각이 든다. 나도 그 이웃들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있을 땐 잘 모른다. 그것이 사람이든 뭐든. 나무가 구실을 못하게 된 뒤에야 그 존재의 고마움을 느끼다니. 그동안 내게 나무가 준 위안이 얼마나 컸던가를 알았다. 봄이면 기지개 켜는 아기처럼 새잎을 틔워 봄을 알렸고, 여름날 짙은 그늘은 골목안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노란 은행잎이 떨어지면 가을 정취에 잠시 젖기도 하였다. 겨울밤, 빈 가지를 울리며 지나가던 바람 소리는 누군가의 휘파람소리를 생각나게 하지 않았던가.
올봄 은행나무 밑에 남자는 구덩이를 파고 호박을 심었다. 호박에 때때로 물을 주는 모습을 보았다. 내가 보기에는 호박에게가 아니라 죽은 나무에 물을 주는 듯했다. 나무는 그의 가슴 안에 살아 있는 것 같았다. 호박은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한 듯 나무를 감고 무성하니 잎을 뻗었다.
오늘 빨래를 널다가 은행나무를 보니, 가지를 감고 있던 호박잎은 시들고, 빈 가지 사이에 제법 팡파짐한 호박 하나가 자리를 잡고 있는 게 아닌가. 죽은 나무를 위한 주인의 마음을 알아챘을까. 저리 야무진 놈 하나를 키워내다니. 은행나무의 마른가지는 마치 그 놈을 떠받들고 있는 것 같다.
은행나무는 이제 마른버짐이 떨어져나가듯 표피가 조금씩 떨어져나간다. 골목길에서 이웃 사람들이 모여 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누군가의 입에서 “죽은 나무가 집에 있음 재수가 없다는데….” 한다. 조만간 죽은 은행나무마저 눈앞에서 사라질 모양이다. 가을 햇살이 호박위에 똬리를 튼 채 졸고 있다.
송연희 ------------------------------------------------------
송연희님은 수필가, 《에세이문학(수필공원)》으로 등단. 수필집 《봄물을 탐내다》, 《뿔》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