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수필과비평 2014년 01월호, 세상마주보기] 감각적 아름다움의 진실 - 김지헌
"때론 어설플지언정 햇살에 눅눅한 자신을 건조시키고, 욕망으로 인해 악취 나는 자신을 비워내는 흉내를 내면서도 우리는 간간이 희망을 보아오지 않았던가."
감각적 아름다움의 진실 - 김지헌
12월, 그리고 일요일 한낮, 거실에 있는 나무들의 그림자를 명료하게 드리우는 밝고 투명한 햇볕이 좋아 앉은 자리에서 잠시 눈을 감아본다. 빛을 차단한 눈은 편안해지고 온몸을 간질이는 햇살의 따스한 느낌이 감미롭다. 조용한 집에서 자신의 시각까지 닫아버리니 고요하고 고요해서 공기 입자들이 떠다니는 소리까지 들리는 듯하다. 그러나 그 적요의 시간은 잠시뿐이었고, 내 귀는 살아 움직이는 일상의 소음으로 돌아왔다. 잠깐 동안이지만 편안하고 여유로운 시간이 주는 잔상을 남기고서. 이를테면 환경적 조건에서 오는 외부적인 의식도 사라지고, 자신의 내면에서 이는 생각이나 갈등의 요소에서 벗어나 자신을 무장해제하고 내려놓는 순간의 자유로움이다.
드세지 않은 겨울바람이 뒷산 대나무 가지를 간질이며 지나간다. 잠시 대나무를 흔들고 지나가나 아프게 하지도 송두리째 흔들지도 않는 순한 바람이 참 좋다. 어쩌면 자신의 마음이 그러하길 바라는 것일 게다. 나뭇가지를 흔드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흔들리는 나무를 바라보는 자신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라 했으니. 나는 왜 이리 감각적 심상에 대한 이야기로 여유롭게 에두르고 있는가, 무엇을 말하려고.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 ≪만엔원년의 풋볼≫에는 결코 기억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을 묵직한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묵직하다 표현했지만 때에 따라선 고통스럽게 받아들여야 하는 이야기라는 게 더 적절하다. 통증을 수반하지 않으면 받아들일 수 없는 아름다움, 비극의 매력이며 어쩌면 내가 이 책을 읽은 지 7년 만에 다시 뽑아든 이유일 것이다.
‘좁고 긴 유리창의 흐려진 부분을 구식 거울처럼 타원형으로 닦고 내려다보니, 앞뜰에 쌓인 눈 위를 벌거벗은 다카시가 원을 그리며 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 눈 소리가 완전히 흡수되어버리는 것처럼, 시간의 방향성 또한 언제까지고 내리는 눈에 흡수되어 상실된 상태다. 편재하는 ‘시간’. 벌거벗고 달리는 다카시는 증조부의 동생이며, 나의 동생이다. 백 년 동안의 모든 순간이 이 한순간에 응축되어 있다. …… 눈이 잔뜩 묻은 채 일어난 알몸의 다카시는 다시 고릴라처럼 불균형하게 긴 양팔을 기운없이 늘어뜨리고, 처마 등빛이 더 밝게 비추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 되돌아갔다. 그의 페니스는 운동선수의 알통처럼 절제된 힘과 기묘한 애처로움을 느끼게 한다. 다카시는 알통을 감추지 않는 것처럼 발기한 페니스를 감추지 않았다. 그가 열린 문으로 들어가려 하자, 토방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처녀가 한 걸음 밖으로 나와서 펼친 목욕 타월로 벌거벗은 다카시를 감쌌다. 나의 심장은 수축되면서 아픔을 느꼈다. …… 저 모습은 다카시의 순결한 누이동생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 나는 동생이 가슴속에 품고 있는 심연을, 그것이 의미하고 있는 내용은 아직 분명하지 않지만, 그 존재감만은 일찍이 들여다본 적이 없는 깊이까지 확인했다고 느꼈다. …… 개가 아니라면 애처롭도록 허망하게 발기한 자신의 페니스를 그처럼 솔직하게 노출시킬 수 있는 이는 없다. 다카시는 내가 모르는 어둠의 세계에서 경험한 것을 누적시켜, 고독한 개처럼 절박한 솔직함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이다. 개가 그의 우울을 말로 할 수 없듯이 다카시 또한 타인과 공통의 언어로 얘기될 수 없는 어떤 것을, 머릿속 한가운데에 묵직하게 응어리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나는 이 글의 모티프를 감각적 이미지에서 찾았으니까 본질이 아닌 역사적 사건은 제외하고 위 장면을 해석해야겠다.
다카시는 그 집안이 몰락해가는 과정에서 뿔뿔히 흩어진 가족들과 헤어져 큰아버지 집에서 백치 여동생과 함께 자란다. 여동생은 기계음이나 문명의 소리를 들으면 고통스러워했지만 자연의 소리나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면 행복해하는 그야말로 순수한 소녀였다. 다카시는 그런 동생을 사람들로부터 보호하다가 두 사람이 함께 잔다는 소문을 들으며, 처음엔 생각지도 못했던 그 소문대로 동생을 유일하게 여자의 존재로 여기게 되었다.
결국 다카시는 여동생을 사랑해버렸고, 백치인 여동생을 단속하기 위해 기만하는 행위의 수위를 높여가야만 했다. 시간이 흐르자 여동생은 다카시와의 사랑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하게 되고, 나중엔 임신까지 하게 되었다. 누구에게도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오빠와의 약속과 임신시킨 상대가 누구냐는 큰어머니의 다그침 사이에서 견디지 못한 여동생은 다카시를 보호하기 위해 자살하고 만다. “오빠가 한 말은 다 거짓말이야. 그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고 있더라도 나쁜 일이었어.”라는 말을 남기고.
이 스토리 또한 다카시가 어떤 과정을 거쳐 벌거벗은 몸으로 눈 위에서 달려야 하는지, 어떤 사건으로 깊은 심연의 상태에 이르러 자신을 그렇게 표현했는지를, 독자에게 정보를 주기 위해 썼다. 설명 없이 인용문만 떼어놓을 경우, 우리는 예술과 외설의 문제,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직면하게 될 테니까. 결국 개연성이라는 과정을 거쳐 인간을 이해하는 한 방편인 감각의 아름다움도 내면으로까지 파고들지 못하면 미학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동생의 자살에 의해 그의 절망은 육체와 정신의 가장 깊은 중심에 뿌리내려, 일상과 미래의 전망을 해쳐버렸다. 위의 장면은 그런 다카시가 미국에서 운동권에 속해 있다가 스스로 골짜기 마을로 들어와 여동생에게 가한 폭력의 기억에 바탕한 자기 처벌 욕구의 발현 중 한 부분이다. 이는 그동안 다카시가 거쳐온 고통의 응축된 표현이자 이 소설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기도 하다. 다카시의 절규는, 역사적 맥락에서는 중의적으로 들리지만, 한 인간으로서는 여동생에 대한 죄가를 통렬하게 깨친 자각의 메시지다.
다카시의 죄가를 어떤 말로 설명한들, 그의 심연이 어떤 상태인지를 표현하는 데 있어 위의 이미지에서 보여주는 것을 넘어설 수 있을까? 돌직구의 표현이 아무리 적확한들, 문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정황이 있을 것이며, 어떻게 그의 심연을 다 드러낼 수 있을까. 다카시의 몸짓 속에 스며있는 간절함만큼 설득력을 가지는 언어가 또 있겠는가. 내겐 어느 날, 행운처럼, 옅은 막이 깨질 때의 통각작용으로 ‘감각적 아름다움이 전하는 진실’이라는 문장이 귀를 후벼댔다. 더 말할 나위 없이 이 작품은 그 문장 하나의 깨침으로 시작해서 쓰여졌다. 분명히 핍진성이 있을지라도 내 생각을 세상에 내놓고 싶은 욕구를 숨기지 않았다.
다카시의 고통, 그 고통의 깊이는 다르지만 인간은 모두 자기 처벌 욕구에 이끌릴 정도의 폭력성을 담보해두고 살아간다. 그런 우리를 구해주는 것은 자신이 맞닥뜨린 고통과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이해다. 다카시의 행위는 자신이 어떤 존재이며, 금기를 깬 자의 내면에서 올라오는 통렬한 절규를 몸으로 말해준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다카시에 대한 묘사를 어떻게 아름답게 볼 수 있겠는가! 다카시는 자신의 지옥을 정면에서 받아들이고 죽어도 좋을 만큼 스스로의 삶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한 인물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는 결국 죽음을 택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죽음을 지켜본 형처럼, 다카시가 되지 못하더라도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음을 받아들인다. 부연하면 그런 고통들을 보다 더 완전하게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다카시처럼 죽음을 택하기보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때로 죽음보다 타인을 이해하는 일을 통해 자신과 타자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지 않겠는가. 감각적 아름다움이 주는 하나의 진실이기도 하다.
때론 어설플지언정 햇살에 눅눅한 자신을 건조시키고, 욕망으로 인해 악취 나는 자신을 비워내는 흉내를 내면서도 우리는 간간이 희망을 보아오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