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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수필과비평 2014년 01월호, 세상마주보기]  산자의 염殮 - 김연분

신아미디어 2014. 8. 25. 13:49

"나직한 목소리가 들린다. 잠시 후 그 갑갑함의 실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눈과 입을 누르고 있던 팩을 걷어내고 나서였다."

 

 

 

 

 

 산자의 염殮        김연분


   오늘은 벼르고 별러서 피부과를 찾았다. 색소 침착이 눈 아래에 좌우로 손톱 크기만큼 넓게 퍼져있다. 처음 생겼을 때 좀 더 신경을 써서 지우려는 노력을 했더라면 좋았겠지만, 그땐 이런저런 핑계로 방치했었다. 몇 년 전부터 부쩍 색이 진해져서 컨실러를 발라 가려보아도 오히려 노력이 무색할 정도다.
   의사는 눈가의 색소 침착은 다른 곳보다 치료하기 까다롭고 시간도 많이 걸려서 지속적으로 관리 받을 것을 권했다.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시작된 시술은 따끔거리고 화끈거렸다. 걱정한 것만큼 아프진 않았지만 정말 없어질지 아직도 확신이 서진 않는다. 단지 지금보다 훨씬 좋아질 거라는 믿음이 생긴다.
   레이저시술 후 마사지도 받기로 했다. 은근히 긴장된다. 왠지 친구와 함께 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혼자 영화를 보거나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일에는 별다른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데, 유독 낯선 공간에서 모르는 사람과의 접촉은 부담스럽다. 더군다나 가운을 입고서.
   “팩 올리겠습니다.”
   눈과 입술에 거즈를 올린 뒤 차가운 팩이 얼굴에 도포되었다. 심적인 부담 탓일까. 갑자기 심장 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두근두근.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말을 할 수 없는 이 상황이 공포로 다가왔다. 두렵다. 코로만 숨을 쉬기에 산소가 턱없이 모자란다. 헉. 헉. 손을 들어 허공에 흔들었다. 누구 거기 없냐고, 날 좀 도와달라고. 얼굴 전체에 도포되어 있는 팩의 무게로 숨을 쉴 수 없어서 질식할 것 같다. 피부관리실 안의 공기가 차갑게 느껴진다. 들어올린 팔에 닭살이 돋아난다. 싸늘해진 손가락 사이로 걸러지지 않은 기억 하나가 영사기를 통과한 듯 되살아났다.
   그날도 어김없이 버스 안에는 승객들로 사방이 막혀 있었다. 초복이 지난 뒤라 아침부터 후텁지근한 날씨와 차 안 특유의 퀴퀴한 냄새로 짜증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급정거와 급회전을 일삼는 버스에서 중심을 잡기란 쉽지 않았다. 아무리 다리에 힘을 주고 버스 손잡이를 꽉 쥐어도 휘청거리기 일쑤다. 손잡이를 놓칠세라 뻗은 팔을 따라 하얀색 교복 상의는 치마 위에 가지런히 내려와 있어야 하는데 옆구리 위로 올라가 있었다. 다른 손으로 아무리 끄집어 내리려 해도 틈은 좁혀지지 않는다. 매일 비일비재한 일이라 몇 번 시도하다 포기했다. 혼자 아등바등거리느라 기운이 빠져서 차창 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건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했던가. 갑자기 버스가 급정거를 했다. 등 뒤에 남자가 서 있었나 보다. 난생처음 남자의 몸에 눌려진 상황이 발생했다. 황당하고 기분이 나빠서 홱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 남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다. 오히려 버스 안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인데 뭘 그걸 가지고 발끈 하냐는 듯 쳐다볼 뿐이다. 그러고 나서는 나에게 자신의 몸을 의도적으로 비비적거렸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대부분 남자다. 변태인 그 남자 때문에 모두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학교에 왔는데도 찝찝함을 덜어낼 수 없다.
   그 일 이후로 버스 안에서 자리를 잡을 때 먼저 주위를 둘러보고 사람들을 한 번씩 훑어보는 습관이 생겼다. 가급적 여자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예전에는 지금처럼 성추행이나 성폭행과 같은 단어를 입 밖으로 얘기하는 것조차 껄끄럽게 생각했었고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풍토였던 것 같다. 그 분위기에 편승해서 성추행 당한 일을 수치로 여겨 내색하지 않고 숨기려고만 했기에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날의 분노와 충격의 잔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지워지지 않는 기억을 가진 이들이 나 혼자만은 아닌 것 같다. 공지영 소설 ≪도가니≫의 연두와 유리. 민수 형제. 광주인화학교에서 벌어진 장애우들에 대한 선생과 교장의 구타와 성추행, 그리고 성폭행. 5년 동안 학교 안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연이 세상을 울렸던 적이 있었다. 자신에게 독이 되기도 하고 약이 되기도 하는 권력. 약자 위에 군림하려는 힘의 남용.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는 상황에 놓인 아이들의 절규와 몸짓에 눈과 귀를 덮고 입을 닫아 버린다면 살아도 산 것이 아니요, 죽은 자와 다를 바 없다. 죄와 벌. 인면수심의 그들은 법적인 제재를 받았지만, 상처받은 아이들의 영혼은 어떻게 보듬어 줄 수 있을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극복하려면 또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지. 잊으려 해도 지우려 해도 가슴속에 화인처럼 새겨진 자국을 끌어안고 살아갈지 모른다.
   나직한 목소리가 들린다. 잠시 후 그 갑갑함의 실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눈과 입을 누르고 있던 팩을 걷어내고 나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