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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수필과비평 2014년 01월호, 세상 마주보기] 홍화紅花 - 김경자

신아미디어 2014. 8. 22. 22:58

"석양은 세인들에게 짜릿한 전율을 주고 잠시나마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시간을 준다. 청결한 춘란은 나약한 듯하면서 꼿꼿한 자세를 지켜 매력과 자존감을 보여준다. 있는 듯 없는 듯 제자리를 지키고 영혼을 맑게 함으로써 많은 호감을 느끼게 한다. 난꽃이 아름다운들 보지 못하고 난향이 향기로우나 그것들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면 사람 사는 냄새는 없을 것이다. 세상살이에 굳이 돋보이지 않아도 홍화처럼 살아간다면 의미 있는 삶이 되지 않을까."

 

 

 

 

 

 홍화紅花        -  김경자


   삭풍을 이겨낸 땅이 살아 있는 모든 것에 희망을 준다. 춘설을 마다 않고 돌아온 봄은 올해도 돌매화나무까지 새순을 돋게 했다. 지금 나의 눈앞에는 두화, 주금화, 색설화, 홍화 등의 이름을 가진 춘란春蘭이 온기 가득한 빛깔을 담아 호반새처럼 도도한 본새로 향기를 뿜고 있다.
   춘란 중에서도 유독 홍화가 눈에 들어온다. 세 개의 꽃대를 올려 짙은 홍색으로 꽃잎 전체를 물들이고 있는 모양새가 뉘엿이 넘어가는 홍도의 석양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듯하다.
   빠른 걸음으로 춘란 전시장에 들어왔다. 초입부터 나부끼는 난향이 공해에 찌든 도시인에게 정화 회복제를 선사한다. 봄 소리를 안고 있는 난꽃들, 눈이 부시어 어느 난분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잠시 서성인다. 애란인들이 정성을 다해 피워 낸 춘란은 비 갠 후 능선을 타는 산안개처럼 나의 심장을 펄떡이게 한다. 그중에서도 눈부신 홍화에게 반가움의 인사를 보낸다. 뛰어난 색감, 강풍에도 흔들리지 않을 초연한 모양새를 보고 있노라니 내 인생의 황금기가 언제였는지, 그런 시기가 있었는지 돌아보는 시간을 주는 것 같다. 특색 있는 색감이 잊었던 감성과 활력까지 끄집어낸다.
   수개월 전 캄보디아에 여행을 한 적이 있다. 그때 동양 최대의 톤레샵 호수 위를 지나던 중 비행기 안에서 하늘을 바라본 찰나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붉은색 날개옷을 걸친 석양은 새벽을 밝히는 은하수보다 찬란했다. 몇 번이고 숨이 멎을 뻔했다. 주황색과 붉은색을 혼합한 파스텔 톤의 석양은 슬프도록 아름다운 우주의 선물이었다. 차마 바로 볼 수가 없었던 그날의 감동을 채 잊기도 전에 그 석양의 빛깔과 비슷한 홍화를 보니 다시 가슴이 뛴다.
   지혜와 희망을 대변하는 주황색은 오염에 휘감긴 심신을 치유하는 특성이 있다. 근래에는 아웃도어나 일상복의 컬러도 주황색이 대세인 만큼 홍화가 더욱 가까이 다가온다. 인도의 성지 강고트리 부근에는 순례자들이 즐겨 찾는 곳이 있다. 그곳에는 강물을 담아 갈 수 있도록 쌓아 둔 주황색 용기가 있고 순례자들도 주황색 옷을 입는다. 불을 의미하는 주황색은 번뇌와 욕망, 업을 태워 버린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주황색을 좋아하는 사람은 매사에 열의와 용기가 있고 친밀감이 있다고 했다. 이렇듯 주황색은 우주와 지상에서 꼭 필요한 색상 같다. 녹색과 조화를 이룬 홍화와 톤레샵 호수의 석양은 심장을 펄떡이게 하는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었다. 닮은 꼴의 감성 매개체였다.
   일 년 전 지인으로부터 춘란 두 분을 선물 받았다. 하루라도 빨리 개화를 바라는 내 기대와는 달리 느릿하게 걸어가는 황소처럼 연둣빛 신아 두 개가 살짝 올라왔다. 청보리 싹이 새순을 틔우듯 얇은 바람결에 속살대며 내 곁으로 온 난촉은 사람이 아닌 자연의 일부임에도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처럼 무척이나 반가웠다. 곡식이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면 춘란은 주인과의 손끝 대화로 단아하게 태어나는 것 같다. 지속적인 노력과 시간이 지나면 기다림의 선물로 삶의 꽃도 보여 줄 것 같다.
   전시회장을 몇 번 돌고 다시 돌아오니 홍화가 나를 끌어당긴다. 어느 성악가가 부른 가곡의 중간 부분을 바이브레이션 하듯이 세 꽃송아리가 떨잠처럼 떨고 있다. 자체 발광이 아닌 자연 발색이 참으로 경이롭다. 다른 꽃처럼 색채가 요란하지도 야단스럽지도 않다. 꽃의 머리 부분은 곧 비상할 듯 하늘을 향하고 팔 부분은 3월의 소소리바람을 가로막고 있는 모양새다. 한낱 작은 식물도 묵묵히 자기를 드러내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데 나는 누구에게 감동을 주었는가? 내심 부끄러운 마음이 생긴다. 유난스럽지 않은 홍화에게 나는 무언의 교감을 보낸다.
   누구의 손길도 온기도 닿지 않는 산속에서 홀로 개화를 했었다면 이렇게 아름답게 피었을까? 주인과의 교감, 수백 번의 손길과 눈맞춤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자생지를 떠난 척박한 환경에서 고운 색을 위해 고통을 감내한 홍화는 세인에게 보내는 지상의 선물 같다. 꽃 한번 피우도록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애란인들의 마음이 이제 조금은 이해가 된다.
   자연과 사람을 어우르도록 해주는 매개체가 없다면 세상은 삭막할 것이다. 일출과 일몰의 풍경, 힘겹게 낳은 새끼의 얼굴을 닦아주고 먹이를 주는 동물의 모정, 위험에 처한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던지는 모정은 감동 이상이다. 숨이 멎는 풍경은 잠깐이지만 자연과의 교감은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아 일상을 풍요롭게 한다. 그런 꽃은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의 정신을 품고 있으리라. 이렇듯 순수한 감정의 몰입은 감성을 낳고 영감靈感을 부르기도 한다.
   석양은 세인들에게 짜릿한 전율을 주고 잠시나마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시간을 준다. 청결한 춘란은 나약한 듯하면서 꼿꼿한 자세를 지켜 매력과 자존감을 보여준다. 있는 듯 없는 듯 제자리를 지키고 영혼을 맑게 함으로써 많은 호감을 느끼게 한다. 난꽃이 아름다운들 보지 못하고 난향이 향기로우나 그것들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면 사람 사는 냄새는 없을 것이다. 세상살이에 굳이 돋보이지 않아도 홍화처럼 살아간다면 의미 있는 삶이 되지 않을까.
   전시장에서 나온 발걸음이 날아갈 듯 가벼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