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좋은수필 2013년 12월호, 신작수필 16인선] 달아, 밝은 달아 - 정호경
"다 같은 하늘인데, 사계절 중 가을 하늘이 유독 푸른 이유를 모르겠네요. 초등학생들 요즘 학교에서 사생대회 할 때 도화지에 가을 하늘 칠하느라 파랑색 크레용이 다 닳아지게 생겼네요. 거기에 또 어떤 아이는 고추잠자리 그린다고 빨강색도 바쁘겠어요. 요즘 세상 사람들 서로 제 잘났다고 고래고래 지르는 소리는 안 들은 것으로 하고, 추석날 많이 먹고 즐겁게 보내세요.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달아, 밝은 달아 / 정호경
4월 초에는 숭어 떼가 몰려 와서 낚시터가 시끄럽더니 요즘은 또 볼락 철이라고 낚시꾼들이 북적거리는데, 사람들 사는 마을 앞에까지 바짝 들어온 이 녀석들은 워낙 약아서인지 낚아 올리는 사람은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낚시는 그렇다 치고 요즘 우리의 밥상을 맛깔스럽게 만들어 주는 것은 ‘정어리 상추쌈’으로 밥숟가락 위에 이것저것 많이 집어 올려 싸먹을수록 맛이 난다면서 볼이 터지게 입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나는 요즘 밥때마다 한국 밥상의 이 야만스러운 풍요를 즐기면서 이 땅에 태어난 것을 자축하고 있습니다.
지금 나는 서재의 컴퓨터 앞에 앉아 일을 하다가 눈이 피로해서 머리를 들어 창 너머 안개 자욱한 한 폭의 수묵화를 구경하고 있습니다. 장마가 시작되었나 봅니다. 이런 날의 바깥 풍경은 보는 사람의 눈에 따라 혹은 각자의 직종에 따라 색깔도 모양도 다른 그림으로 보일 것입니다. 뒷산의 산비둘기는 장맛비 속에서 구슬프게 울고 있습니다. 비가 오니까 괜히 슬픈 척하는 것인가요. 올해의 장마와 태풍에는 모두들 아무 탈이 없기를 천지신명님께 빕니다.
요즘 아침저녁으로 창 너머 풀밭으로 가을이 잠깐 왔다 갑니다. 노래가 아니라 악을 쓰며 시끄럽던 매미들이 목이 쉬어 떠나버린 그 여름의 뒷자리들이 허전합니다. 비바람에 뿌옇게 흐려진 내 서재의 유리창을 닦아야겠네요. 9월은 고향 냄새가 나는 성묘의 달입니다.
잠자리나 개미나 호랑이나 세상 모든 것들은 환한 낮에 잘 보이는데, 달은 특히 오늘 같은 추석 보름달은 깜깜한 밤에 더 잘 보입니다. 얌전하게 생긴 보름달은 무서움을 많이 타서 깜깜한 밤을 싫어할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네요. 아까 이곳 후배 친구가 아들과 함께 오동도에 밤낚시를 하러 나와 있는데, 고기가 통 안 낚인다고 휴대전화로 문자를 보내왔기에 고기가 안 낚이면, 둥근달이나 낚아오라고 답신을 보냈어요. 오늘은 먹을 것도 많은 ‘팔월 한가위’입니다.
다 같은 하늘인데, 사계절 중 가을 하늘이 유독 푸른 이유를 모르겠네요. 초등학생들 요즘 학교에서 사생대회 할 때 도화지에 가을 하늘 칠하느라 파랑색 크레용이 다 닳아지게 생겼네요. 거기에 또 어떤 아이는 고추잠자리 그린다고 빨강색도 바쁘겠어요. 요즘 세상 사람들 서로 제 잘났다고 고래고래 지르는 소리는 안 들은 것으로 하고, 추석날 많이 먹고 즐겁게 보내세요.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정호경 ------------------------------------------
정호경님은 수필가,《수필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까마귀야 까마귀야》, 《오늘도 걷는다마는》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