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 2013년 12월호, 이 작가를 주목한다] 줄과 줄 사이 - 민명자
"문득 돌아보니,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줄들이 사방에 그물처럼 얽혀 있다. 포식자의 거미줄일지 구원의 동아줄일지 모를 줄을 단단히 움켜쥔 무리들이 서로 ‘내가 줄’이라고 우기며 그 안으로 들어오라고 부른다.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건, 줄과 줄 사이에서의 고독한 배회, 그 얼룩의 더께를 더하는 시간들을 축적해가는 일일지도 모른다."
줄과 줄 사이 / 민명자
백화점에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해외명품대전’을 한다는 정보였다. 삭제를 하려다 보니 이름만 대면 알만한 해외명품상표들이 줄줄이 명함을 내밀었다. 아무리 싸다 한들 그 가격이 만만치 않을 거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새해 처음’, ‘일 년에 단 두 번’, ‘30~80% 세일’이라는 광고 문구들이 톡톡 튀면서 유혹의 도돌이표를 그렸다. 더구나 딱 3일간만 한다지 않는가. 상품권 행사까지 한다니 안 가면 손해를 보는 건 아닐까, 혹시 턱없이 비싼 명품을 턱없이 싸게 사는 횡재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마음이 흔들 그네를 탔다.
세일 첫날은 그럭저럭 무심한 듯 보냈으나 이틀째 되는 날 결국 백화점의 부름에 못 이겨 집을 나섰다. 개점 시간은 10시 반, 개점하자마자 들어가는 건 왠지 민망할 것 같아 조금 느긋하게 간답시고 11시쯤에 당도할 수 있게 시간을 맞췄다.
지하철에서 내려 백화점 방향으로 나가는데 앞에서 여자 몇이 뛰어갔다. 어딜 저렇게 급하게 가지? 설마 백화점으로 가는 건 아니겠지. 그러나 내 예상은 여기서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모퉁이를 돌아서니 그녀들은 저만치 앞에서 백화점 문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마음이 급해져 나도 뛰고 싶었지만 겉으로는 최대한 품위를 지키며 느긋하게 걸었다. 뭐 그렇게 사람이 많을라고?
이벤트 홀에 도착했다. 예상은 다시 한 번 빗나갔다. 안에서부터 시작된 줄이 면세점과 연결되는 홀 입구까지 이어져 있고 홀 안에는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북적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은 개점 30분 전부터 백화점 밖에서 기다렸다가 입장을 했단다. 줄을 서야 홀에 들어갈 수 있나 보다 생각하면서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나보다 나중에 온 사람 몇 명이 잽싸게 내 앞에 섰다. 나도 줄을 놓칠세라 얼른 그 뒤에 섰다. 그렇게 잠시 기다리는데 정장 차림의 남자직원이 ‘여기는 ○○○ 판매 줄’이라고 소리치며 꽤 알려진 수입가방 이름을 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팻말을 든 직원들이 군데군데 서 있고 그 뒤마다 구불구불 줄이 이어져 있었다. 우아하게 이곳저곳을 돌며 내 맘에 드는 물건을 고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부터가 오산이고 세상 물정 모르는 소치였다. 갑자기 전의戰意를 상실한 병사처럼 맥이 탁 풀렸다. 악착같이 기다려 물건을 고를 엄두도 나지 않았다. 나는 슬그머니 줄에서 빠져나왔다.
이왕 나온 김에 구경이나 하고 가자. 사람들 사이를 이리저리 비집고 안쪽으로 갔다. 가방이 쌓여 있는 네모난 매대로 통하는 입구와 출구만 남기고 나머지 둘레에는 접근을 금지하는 청색 헝겊테이프가 둘러쳐 있었다. 입구에서는 고객을 20명 단위로 끊어서 매대 쪽으로 입장시켰다. 큰 공간에서 또 하나의 작은 공간을 구획하는 줄은 입장을 한 사람과 하지 못한 사람의 경계를 강고하게 갈랐다. 아웃사이더가 된 나는 줄 밖에서 인사이더들을 바라보며 섰다. 그때 또 다른 직원이 줄 안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지금까지는 10분씩 시간을 드렸는데 이제부터는 5분씩만 드리겠습니다. 빨리빨리 보시기 바랍니다.”
5분, 그 시간을 지키려면 물건을 꼼꼼히 따져 볼 겨를도 없이 무조건 골라잡아야 한다는 말로 들렸다. 한 여자가 크기와 디자인이 조금 다른 가방 두 개를 높이 쳐들고 전쟁터에서 전리품을 획득한 병사처럼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출구 쪽으로 돌아서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가격이 궁금했다. 내 옆에 서 있던 여자도 같은 심정이었나. 가려운 데를 긁어주듯, 나를 대신하듯, 호기 있게 큰소리로 물었다.
“그거 얼마나 해요?”
“네, 89만 원이에요.”
줄 안의 여자가 줄 밖에 있는 우리에게 가방 하나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럼 두 개엔 얼마? 아둔한 두뇌도 그럴 땐 순환이 빨라지게 마련이다. 가방 두 개 값이 재빨리 숫자로 환산됐다. 그녀는 돈을 번 걸까, 쓴 걸까. 백화점 판매직원들은 평소에도 ‘비싼 물건 싸게 파는 거니까, 사면 돈 벌어 가시는 거예요.’라는 말을 자주했다.
‘명품가방이 무슨 소용이랴, 사람이 명품이 되어야지.’ 이런 생각은 그 물결의 와중에서는 안 어울린다. 진부하고 도식적이다. 내심으론 은근히 명품 갖기를 소망하면서 겉으로는 아닌 척하는 거라면 먹고 싶은 포도를 딸 수 없어 ‘저건 신포도’라고 돌아서는 여우에 지나지 않을 뿐이고, 인간명품이 되지도 못하면서 명품인 척 흉내만 내는 거라면 허위의식을 드러내는 퍼포먼스에 불과할 뿐이다. 소비 공간에 발을 들여 놓기로 작정했으면 차라리 자신의 욕망을 순순히 인정하는 게 더 솔직하리라. 그 정도 아수라장쯤은 예견할 줄도 알았어야 했다. 가난해서 배고픈 아이들이나 노인들에 대한 알량한 연민 같은 건 지워버리고, 내가 가진 화폐의 위력과 즐거움만 만끽하는 것, 그것이 그 물결에 편하게 합류하는 방식의 하나였을지 모른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복잡해지던 심사는 뭐란 말인가.
홀 안에 있는 거울에 내 모습이 비쳤다. 소비자본주의 사회의 욕망을 대표하는 공간에서 이도저도 아닌 채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나, 짝퉁이 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헤실헤실 헛웃음이 자꾸 났다. 누가 보면 실성했다 할라. 나는 겨우 웃음을 참으며 홀 안을 바람처럼 돌아 나왔다.
적당한 소비는 나라 경제를 돕는 미덕이라 했던가. 그러나 광풍 부는 물질의 바다에서 표류하던 그날, 한 푼 미덕도 발휘하지 못한 나는 그렇게 어느 쪽에도 편입되지 못한 채 줄에서 이탈하고 말았다.
문득 돌아보니,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줄들이 사방에 그물처럼 얽혀 있다. 포식자의 거미줄일지 구원의 동아줄일지 모를 줄을 단단히 움켜쥔 무리들이 서로 ‘내가 줄’이라고 우기며 그 안으로 들어오라고 부른다.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건, 줄과 줄 사이에서의 고독한 배회, 그 얼룩의 더께를 더하는 시간들을 축적해가는 일일지도 모른다.
민명자 ------------------------------------------------
민명자님은 수필가, 평론가, 《계간수필》로 등단. 저서 《김구용의 사상과 시의 지평》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