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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 2013년 12월호, 다시 읽는 좋은수필] 군밤 장수 - 정범모

신아미디어 2014. 8. 10. 16:58

"집 대문에서 초인종을 누르고 기다리는 동안, 외투 속에 쥐고 있는 군밤 봉지가 손에 유난히 따뜻했고, 내가 행여 찬 군밤을 먹게 될까 봐 걱정스러워한 군밤 장수의 정겨운 마음씨가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대문 열어주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몰아치는 추운 바람 속에서도 흐뭇하고 훈훈했다. 얼굴에 가벼운 미소도 지었을 것이다."

 

 

 

 

 

 

 군밤 장수        /  정범모

 

   어느 추운 겨울 저녁, 버스에서 내려서 매서운 삭풍을 거슬러 가면서 집으로 종종걸음을 재촉했다. 집에 닿으려면 한 10분은 더 걸어가야 하는데, 집 방향으로 길을 꺾어 들어서자 군밤 냄새가 확 풍겨왔다. 겨울밤 삭풍 속 군밤 냄새는 아주 매력적인 유혹이다.
   길모퉁이에서 군밤 장수가 좌판을 벌이고 앉아서 가물거리는 호롱불 밑에 밤을 굽고 있었다. ‘군밤 한 봉지 천 원’이라는 서툰 글씨의 딱지 간판을 옆에 세워 놓았다. 나는 천 원짜리를 내밀면서 “아저씨, 한 봉지 주세요.” 말을 건넸다.
   그 아저씨는 신문지로 만든 봉지에 ‘방금 구운 밤’이라고 말하면서 주섬주섬 군밤을 담았다. 다 담고 나서 그 봉지를 마무리기에 나는 받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 군밤 든 봉지를 나한테 건네지 않고 두 손으로 꼭 쥔 채 내게 물었다.
   “집이 어디세유?”
   순박한 충청도 사투리였고, 그저 지나가는 말로 하는 인사치레가 아니라 진지하고 심각한 표정이었다. 나는 ‘이 사람이 왜 남의 집이 어딘지를 심각하게 따지나?’ 속으로 의아했으나, 어디 어디 근처라고 대답했다.
   “여기서 얼마나 돼유?”
   “한 10분은 걸릴 거예요.”
   “아이고, 그러면 안 되겠네유. 한두 봉지 더 겹으로 싸야겠네유. 식지 않게 두 봉지 더 덮어 싸드릴 테니 외투 주머니 속에 넣어서 꼭 쥐고 얼른 집으로 뛰어가세유. 군밤은 식으면 맛이 없시유.”
   확실히 그것은 손님을 끌려는 장삿속의 겉치레 말이 아니었다. 혹시라도 내가 찬 군밤을 먹을까 봐 정말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면서 행여 식을까 두 손으로 꼭 쥐면서 그 군밤 봉지를 내게 건넸다. 나는 무슨 불가항력의 명령이나 받은 사람처럼, 그의 말대로 군밤 봉지를 외투 주머니에 깊이 넣고 꼭 쥐고 집으로 달려갔다.
   집 대문에서 초인종을 누르고 기다리는 동안, 외투 속에 쥐고 있는 군밤 봉지가 손에 유난히 따뜻했고, 내가 행여 찬 군밤을 먹게 될까 봐 걱정스러워한 군밤 장수의 정겨운 마음씨가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대문 열어주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몰아치는 추운 바람 속에서도 흐뭇하고 훈훈했다. 얼굴에 가벼운 미소도 지었을 것이다.
   하찮은 근 3, 40년 전의 에피소드다. 그러나 내가 그 장면을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추운 삭풍 속 호롱불 옆의 그 순박한 군밤 장수의 작은 따듯한 정이 퍽이나 크게 인상에 남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걱정스러워하는 얼굴은 명백히 장삿속이 아니었다. 틀림없이 그 아저씨는 일상생활의 모든 장면에서, 좀 거창하게 말한다면, 인간의 희로애락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예측하는 인자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정범모  ---------------------------------------

   정범모님은 교육학자,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전 충북대학교 총장. 저서 《가치관과 교육》, 《미래의 선택》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