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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12월호, 월평] 미완의 시간,회한의 글쓰기 - 허상문

신아미디어 2014. 8. 7. 18:05

"작가들은 현재의 시간에서 과거의 시간을 되돌아보고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시간 속 망각과 기억의 순간을 끄집어내어 현재와 연결한다. 작품 속 화자들은 과거의 어느 한 때의 지나간 시간이 현재의 자아와 존재의 모습에 어떻게 작용하고 영향을 미쳤는지를 말해준다. 작가에 의해 포착되는 과거의 시간은 그저 일상 속의 한 부분이었을 수도 있고, 기억에서 사라져도 괜찮았을 일이라고 생각되지만, 그것은 언제나 우리들의 의식 속에 살아남아 있다. 우리들이 회상하는 그 일들은 어둡고 아득한 닫힌 문 뒤에 존재하는 비밀이면서 이야기되지 못한 회한이다."

 

 

 

 

 

 

미완의 시간,회한의 글쓰기        -  허상문


   또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지구촌 곳곳에서 갈등과 대립과 자연재앙이 세상을 뒤집어엎을 듯 난리를 부려도 어김없이 다가왔다 물러가는 것은 시간이다. 서산으로 한 해의 태양이 지면서 우리들의 시간도 저물어 간다. 구세군의 종소리가 울리는 거리에서, 눈꽃이 장식된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서, 엄숙한 미사가 이루어지는 교회나 성당에서, 사랑의 숨결이 피어나는 가정에서 저무는 한 해를 아쉬워하면서 사람들은 망년과 신년의 모임을 가진다. 생각해보면, 지난 시간 속에서 얻은 것보다는 잃은 것이 많고 만족한 것보다는 부족한 것이 더 많은 듯하다. 그럼에도 완성되지 못한 시간은 흘러가고 새로운 시간은 다시 다가온다. 이 미완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망각해야 할까. 기억해야 할 것도 망각해야 할 것도 없다면 시간의 잔에 무엇을 채워야 할까.
   우리들은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기억과 망각에 대하여 그리고 흘러가는 시간의 의미에 대하여 수많은 질문을 던져왔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보여주는 기억은 우리들이 일상에서 필요로 하는, 이를테면 휴대폰에 저장해두었거나 메모지에 기록해둔 것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프루스트에게 기억은 의도적으로 유도할 수 있는 의식의 과정이 아니라 그것은 아무런 예감도 없이 우연히 발생하고 갑자기 떠올라 우리들의 감각과 인식을 자극하는 것이다. 우리들 곁을 지나가는 여인의 매혹적인 향기나 아름다운 정원에서의 라일락의 냄새 혹은 썩어가는 생선의 악취와 부도덕한 정치적·상업적 거래와 같은 모습을 통해 기쁨과 슬픔, 아름다움과 추함과 같은 일련의 연상 작용을 시작하면서 예측하지 못했던 내면의 지평을 연다. 기억은 기억을 체험하는 사람을 새로운 정신적 자극 속으로 몰아넣어서 정신을 밝게 하거나 어둡게 하는 혹은 기쁘게 하거나 슬프게 하는 정신의 특성이다. 그리고 그것은 작가들에게 예술적 영감이 되기도 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르셀은 어느 날 밤 무의식적 기억의 소생에 의하여 과거의 추억에 잠기게 되고, 그의 기억은 소년 시대를 보낸 고향, 스완 가의 아름다운 아가씨 질베르트를 향한 동경, 첫사랑의 추억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러한 잃어버린 시간 속으로의 여행이 프루스트를 불멸의 작가로 만들었다.
   주지하는 대로 문학작품이 드러내는 세계는 작가의식의 산물이다. 문학작품을 통해 표출되는 작가의식의 내면에는 시간적·공간적 무의식의 배경이 깔려있다. 이때의 시간은 일상생활에서 체험하는 바와 같은 자연적인 흐름으로의 시간이 아니라 의식 경과의 내재적 시간을 의미하며, 인간이 경험하는 내적 시간의 지향성으로 정신적 체험을 구성하는 근거가 된다. 오랜 세월 동안 철학자들과 작가들이 시간에 대한 탐구를 멈추지 않는 것은 인간의식의 원초적 구조가 시간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작가의 자전적 존재의 탐구를 중요하게 여기는 수필문학은 본질적으로 시간의식을 내포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이해는 작가의식에 대한 이해와 직결된다. 많은 수필에서 작가의 시간의식을 통하여 수필의 방법론을 추동하는 것도 시간은 한 개인의 존재나 세계관과 밀착되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수필과 시간의식은 운명적으로 혈연관계이다.
   우리들의 시간이 미완으로 남는 것이라면 우리들의 글쓰기도 항상 미완에 대한 회한으로 이루어진다. 잃어버린 시간인 과거는 회한의 대상과 표현으로 새롭게 되살아난다.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은 연결되거나 재구성될 수 있으되 완전히 결합하거나 융합될 수 없다. 현재와 과거, 주체와 객체, 인간과 세계의 완전한 융합은 원천적으로 가정될 수 없다. 과거의 시간으로부터 두려워 아무리 도망가려 해도 회한은 거듭 일어나고, 그것은 죽지 않는 한 소멸될 수 없을 세계이다. 과거의 시간 속에는 언제나 아쉬움과 그리움이 남게 되듯이 그에 대한 우리들의 글쓰기도 회한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흔히 작가는 왜 글을 쓰는가라는 질문을 되풀이해서 받게 된다. 사람마다 다른 대답을 하겠지만 가장 간단하고 흔한 대답은 ‘쓰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작가들의 ‘쓰고 싶은 것’에 대한 욕망은 기본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한 미완의 시간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이라는 회한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인간의 시간관이 삶의 실존적 기초를 결정한다는 실존주의자들의 관점과 같이 실제로 많은 작가들은 존재의 자각 측면에서 시간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지향하는 모습을 보인다. 철학자 하이데거의 어법을 빌려 ‘현존재’는 세계 내적 존재, 즉 시간 내적 존재라는 ‘존재의 피투성被投性’으로 조건 지어진다고 할 때, 그것은 항상 실존의 비극성과 연결된다. 말하자면 세계 내의 존재라는 자각에 있어 현존재를 규정짓는 시간은 현재이지만 모든 현재는 과거로 흘러감으로써 소멸되고 그 소멸된 자리에 알지 못하는 불만과 슬픔이 싹트게 되는 것이다. 시간을 하나의 흐름으로 파악하면 이 세상에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부정적인 시간관을 갖게 하며, 이런 관점에 의하면 우리들의 삶과 존재는 수많은 고뇌와 슬픔으로 가득하다. 김명자의 <내 숟가락>, 이금영의 <이름값>, 배정순의 <생명의 불꽃>과 같은 작품을 살펴보자.

 

   i) 나이 들면서 느슨해지고 여러 사람들과 부딪치고 상처받으면서 세월의 파도에 모가 깎여지고 둥그러진 것 같다. 힘이 빠져 느긋해진 것인지, 알고도 모른 척하고 참아주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숟가락에도 조금씩 여유를 가지고 적응함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를 내려놓는 것과 유사한 건 아닐까. 긴 세월 쉼도 없이 나를 살리기 위해, 내 지시에 따라 밥을 날라다 준 숟가락의 물기를 닦는다.

-김명자의 <내 숟가락>에서

 

   ii) 그렇다면 나는 어떠한가? 부모와 자식이란 명제에서 자식의 도리에 어긋남이 없었는가. 어머니 먼 길 떠나시던 날, 잘못할 일들이 회오리바람이 되어 가슴을 할퀴었다. 지금도 아물지 못하고 열려있는 상처는 얼만큼 더 살아내야 하는가. 사람은 내리사랑이라고 했던가. 내 아이들에게 부모노릇을 한다고 수없이 많은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좋은 부모, 지혜로운 부모가 되는 길은 멀고도 아득한 것만 같다. 가을이 무르익는 이 계절에 전화기 저편에서 “엄마” 하고 부르면 엄마라는 가슴 벅찬 이름에 순간을 돌아본다.

-이금영의 <이름값>에서

 

   iii) 병실로 들어와 침대에 누워 깊은 상념에 잠겼다. 내 생명은 과연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예측할 수 없는 운명 앞에 걱정과 두려움이 앞서지만 모든 생명체는 언젠가 본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만고의 진리가 아닌가! 더 이상 평정심을 잃지 말자고 다짐했지만 허허로운 마음은 가눌 길이 없었다.

-배정순의 <생명의 불꽃>에서

 

   위에서 예시한 I) ii) iii)의 작품들은 모두 지나간 시간 속에서 사라져 간 사람이나 사물들에 대한 기억을 통하여 현재의 나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 수필들이다.
   김명자는 <내 숟가락>에서 ‘숟가락’이라는 상징적 기제를 통하여 지난 시간 동안에 자신이 집착했던 삶의 고정관념과 무의식의 세계를 되돌아본다. “젊은 시절 동안 숟가락에서 냄새난다고 까탈부리던 어린 나는 단체생활을 하고 성인이 되어 외식을 하게 되면서 조금씩 숟가락에 너그러워지고 있다.”라는 진술대로, 화자는 나이 들어가면서 점점 삶에 관대해지고 여러 사람들과 “부딪치고 상처받으면서 세월의 파도에 모가 깎여지고 둥그러진 것”을 느낀다.
   이금영의 <이름값>은 해 저물 즈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남루한 할머니에게서 산 사과를 통하여 어머니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작품이다. 우리는 모두 부모를 모시거나 여의지만 정말 그들을 위해 ‘이름값’을 제대로 하는 것일까. 부모라는 이름으로 자식이란 이름으로 제대로 역할을 하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어머니 먼 길 떠나시던 날, 잘못한 일들이 회오리바람이 되어 가슴을 할퀴었다.”라고 작가가 말하듯이, 부모와 자식이란 명제에서 자식의 도리에 어긋남이 없었던가 하는 회한은 비단 이금영의 <이름값>에서만 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배정순의 <생명의 불꽃>은 병원에서 긴박하게 돌아가는 환자들의 모습과 그러한 상황을 통하여 자신의 현재와 과거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작품이다. 실제 우리네 인생은 들판에 핀 한 송이의 꽃과 같아서 지고 나면 그 있던 자리도 사라져버리는 것인지 모른다. “떨어지는 나뭇잎도 고운 단풍으로 마지막을 장식하듯이 내 인생의 끝자락도 마지막 잎새 처럼 추하지 않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떠났으면 한다.”라는 작가의 소망은 인생의 마지막 끝자락에 닿아야 젊음의 찬란함과 생명의 소중함을 인식하게 되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흔히 문학작품은 과거와 미래를 현재화하는 과정을 통해서 인간과 삶의 모습을 새로운 형태로 부각시킨다. 또한 부정적 현실에 대한 도피로서 현실을 초월한 시간과 환상세계로의 진입을 시도한다. 위에서 우리가 살핀 수필들은 모두 현재를 기점으로 과거와 미래의 시간을 현재화한다. 과거의 일을 현재처럼 허구적으로 재현하거나 미래의 전망을 현재처럼 허구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작가들은 현재의 주체가 처한 비극적이고 절망적인 상황을 효과적으로 극대화한다. 이것은 과거 시간의 불우한 기억은 현재에 지속되며, 마찬가지로 미래의 시간 역시 과거나 현재처럼 부정적으로 예기된다. 이를 위하여 작가들은 흔히 불우한 지난 과거의 기억을 통하여 과거를 현재의 시점에서 다시 구축시키거나 현재의 의식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한다. 과거의 불우한 기억은 현재에 더욱 악화되어 현재의 실존적 비극성을 더욱 절실하게 부조한다. 미래의 시간도 과거의 기억이나 현재의 의식에서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전망은 비극적으로 예기된다. 미래의 노년과 죽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작가의 비극적인 세계관을 더욱 뚜렷하게 부각한다. 그리하여 위의 i) ii) iii)의 작품에서 보듯이 현재의 시간 속에서 영원의 본질적 시간과 무시간성으로 진입하는 양상이 나타난다. 이런 인식은 작가의 부정적인 시간의식과는 무관하게 보다 보편적인 진리와 본질적인 세계를 제시한다. 과거와 미래 시간의 현재로의 진입은 우리에게 실존적 고통과 절망 그리고 삶의 허무와 회한을 드러내는 하나의 문학적 방식으로 재구성되는 것이다.
   시간의식을 통하여 현재와 과거의 삶의 허무와 회한을 드러내는 것이 장소에 따라 다를 수 없다. 아니 낯설고 물 선 외국에서의 삶의 체험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이 같은 회한은 더욱 강하게 나타날지도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문인협회 워싱턴지부 특집’을 위한 초대수필에 실린 작품들은 흥미롭다. 특집에 실린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의 하나는 한국의 토속적인 풍물과 인물에 대한 향수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고향을 떠난 사람들에게 향수를 자아내게 하는 ‘지게’ ‘된장’ ‘아버지’ ‘어머니’ ‘언니’와 같은 소재들이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일 터이지만, 이것이 단순히 과거의 시간에 대한 그리움이나 아쉬움을 위해 기여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들의 작품에서는 현재에서 과거로 혹은 미래의 시간이 현재나 과거로 역행하는 가역적 시간의식이 나타난다. 이런 가역적 시간의식 속에서는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시간도 함께 혼효되어 공존한다. 또한 그로 인해 한국적 정서를 지닌 소재들은 현실세계에서 과거의 시간을 현재로 이어주고 현재의 시간이 미래로 연결되는 장치가 되고 있다. 다시 말해 현대적 의미에서의 포스트모던적 시간의식으로 분석하면, 특집에 실린 수필들은 어느 한 시점에 고정된 것이 아닌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고 유동하면서 연결되는 시간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흡사 현대소설에서 흔히 보이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연상시키는 이런 포스트모던적 시간의식은 현재적 삶 속에서 과거의 삶에 대한 그리움과 회환의 과정을 거치면서 동시에 자아의 내면세계를 효과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이런 범주에 놓일 수 있는 작품들을 살펴보자.

 

   i) 당시엔 운송 수단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게 지게였다. 요즘에야 길도 잘 닦여 있어서 자동차가 그 구실을 하지만, 아직도 외진 산길이나 언덕, 냇물을 건널 때, 지게는 여전히 편리하고 유용하게 쓰인다. 늘 무엇인가를 담고 다니는 부지런함과 저보다 훨씬 많고 무거운 짐들을 불평 없이 받아들이며 고스란히 돌려주는 정직함. 지게에서 말없이 무던하게 살아가고 있는 소시민들의 삶을 본다. 어릴적 고향집의 지게를 떠올리고 보니, 가족들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던 아버지의 바싹 마른 어깨도 겹쳐 보인다.

-문갑연의 <지게>에서

 

   ii) 때마침 바닷속으로 꼬리를 감춘 태양 뒤에 남겨진 노을이 그런 우리 부부와 닮아 보였다. 부부의 사랑이란 오랫동안 숙성한 구수한 된장 맛이라고 한다. 그럼 이제껏 앞만 보고 달려와 삶의 마지막 장 앞에 서 있는 우리는 과연 어떤 맛을 내는 사람들일까? 50여 년을 함께 해 온 아내, 친구이자 동지인 아내는 지금 내 옆에서 함께 노을을 바라보고 있다.

-문희동의 <황혼의 된장 맛>에서

 

   iii) 소슬바람이 일어 재가 마당에 흩어졌다. 어머니를 모시고 왔던 버스가 저녁이 되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우리가 왔던 도시로 다시 데려다 줄 버스에 오를 준비를 하던 우리 자매들은 검은 상복을 입고도, 어머니의 장독대에 남아 있던 간장이며 된장을 나누어 담았다. 시간은 흘러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어머니 생각만 났다. 특히 전화기를 볼 때마다 눈물이 났다.
   이제는 더 이상 어머니께 전화를 걸 수 없다는 것이 너무 슬프다.

-정동순의 <된장이 억울하다>에서

 

   iv)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메기 같이 앉아서 놀던 곳. 언니와 곧잘 부르던 노래다. 나지막하게 노래를 흥얼거리는데 자꾸 목이 멘다. 뒤돌아보니 오십여 년의 세월이 한순간이다. 그때 언니의 초점 없는 눈동자에 맺혀 있던 눈물이 떠오른다. 그토록 결혼을 반대했던 이유를 비로소 깨달았던 걸까, 아니면 세월의 속절없음을 한탄한 것이었을까, 그 눈물의 의미를 이젠 알 길이 없다.

-정봉춘의 <언니>에서

 

   위 작품들이 일관되게 보여주는 것은 시간 속의 환고향還故鄕의식이다. i) 문갑연의 <지게>에서 “어릴적 고향집의 지게”와 “가족들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던 아버지의 바싹 마른 어깨”, ii) 문희동의 <황혼의 된장 맛>에서 “오랫동안 숙성한 구수한 된장 맛”과 같은 부부 사랑, iii) 정동순의 <된장이 억울하다>에서 전화기를 볼 때마다 “이제는 더 이상 어머니께 전화를 걸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슬픔, iv) 정봉춘의 <언니>에서 오십여 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 깨닫게 되는 언니의 눈물의 의미에는 모두 지나간 시간에 대한 아픔의 기억과 회한이 담겨 있다.
   사실 지우고 싶지만 지워지지 않으면서 우리에게 뜬금없이 다가오는 이런 기억들은 우리들이 한두 개씩은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느 날 문득 떠올라 추억이라 이름 붙여 즐거워하며 만나고 싶은 기억이 아니라, 때로는 잊어졌으면 하는 고통의 흔적으로 우리의 가슴에 남아 있는 기억들이다. 일상적 삶 속에서 일어났던 일들 중에서도 기쁘고 즐거웠던 일들은 쉽게 망각되지만, 슬프고 아팠던 일들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그 순간을 아쉬워하고 후회하게 된다. 특히 외국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고향에서 이루지 못한 일들은 모두 회한의 덩어리이다. 그들에게 고향에서의 지나간 시간에 대한 기억은 아득하게 사라진 시간 속으로의 항해이며, 이것은 현재의 시간에서 과거의 시간으로의 회항이다. 의식 속에서 순환하고 수렴되는 시간은 ‘지금 여기’로 다시 되돌아오지 못하는 불귀不歸의 시간에 대한 회한의 표현으로 남고자 한다. 그 시간 속에서 작가들은 자신이 되고 싶어 하는 모습으로 되돌아가고자 하고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세상에 드러나고자 하는 페르소나가 되고자 한다. 페르소나는 마음의 옷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이 바로 자신이 드러내고 싶은 이미지를 표현하듯이, 페르소나는 자신과 머나먼 이국땅이라는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작가들은 현재의 자아와 아득한 시간의 심연 속에 떨어져 있는 또 다른 자아 사이를 왕래하면서 자신의 슬픔과 회한을 표현하고자 한다.
   인간의 시간관이 삶의 실존적 기초를 결정하게 되고 작가들의 경우 그것이 문학적 표현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앞서도 시사한 바이다. 작가들에게 시간의식은 풍부한 사유와 맞물리면서 다양한 변화 양태를 보인다. 작품 속 시간의식은 작가의 의식이나 사고의 접목을 통해 절망에서 희망으로, 억압에서 해방으로, 추상에서 구체로 운행한다. 오늘날 이러한 변화를 이끄는 대표적인 문학적 키워드의 하나는 ‘생명’이나 ‘생태’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많은 작가들은 생명과 사랑을 구현해 줄 원형을 자연에서 찾고자 한다. 작가들이 그러한 인식을 두드러지게 나타내는 것은 후기자본주의사회의 과도한 소비 욕망과 도시중심의 삶의 양태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현대적 삶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존재와 부재, 생명과 죽음, 공존과 고립, 안과 밖이 별개로 존재하는 시대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죽어서도 변함없이 살아있는, 비어서도 오히려 가득 차 있는 곳은 바로 자연이라 할 수 있다. 인간존재는 자연 속에서 무궁무진한 생명력을 되찾게 되고 죽어도 결코 죽지 않는 길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이제 작가들도 자연으로 귀의하고자 하고 자연 속에서 생명과 사랑을 찾고자 한다.

 

   i) 사람이 자연을 가까이하면 자연을 닮는다고 한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란다. 올가을은 멀리 가지 않고도 우리 집 뒷산에서 가을 이야기를 듣는 기쁨을 누리면서 나도 산을 닮고 싶다는 철이 든다. 감히 산을 닮을 수는 없지만 산처럼 서로 어울려 사는 것이 아름답다는 걸 조금 느낀 것이다.
   내 속의 불평과 욕심과 또 내가 모른 여러 가지 좋지 않은 것들을 좋은 것으로 바꾸어야겠다는 야무진 생각이 쳐들어온 것이다. 아까 그 부부도 꼭 그러기를 빌면서 다시 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김새록의 <뒷산에 오르다>에서

 

   ii) 텃밭은 대화의 끈을 이어주는 공간이다. 새 식구가 된 며느리하고 사위, 또 잘 풀리지 않는 사람들과 대화를 트기에 적합한 장소다. 할 말이 없다고 무심히 지낼 수도 없는 것이 새 식구들이다. 우리가 남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싶을 때, 대화가 필요할 때 문득 밭으로 간다. 오늘은 오이꽃이 피었구나. 오늘은 호박이 열렸네. 토마토가 익었단다. 옥수수는 이렇게 생겼다네. 고추 꽃을 본 적 있는가? 이게 고추 꽃이야. (…) 고추 꽃은 처음 보는데 예쁘네요. 까톡 까톡 하면서 답신이 날아든다. 낚시는 성공적이다. 대어다. 그럼, 그럼 이걸 누가 다 먹나. 이 사람들아, 얼른 와서 먹어주면 고맙겠네. 텃밭에서는 소리 없는 말의 성찬이 강을 이룬다. 사랑이 충만한 텃밭.

-김수자의 <텃밭 통신>에서

 

   iii) 산행이 시작된 것이다. 친구와 함께 주말이면 산을 오른다. 자연이 어머니의 품이라면, 산은 희망을 주는 등대요 친구라고나 할까. 자연은 기진맥진 힘들어하는 이를 도닥이며 품어 안는다. 봉우리로 솟은 산은 희망을 심어주고 졸졸 흘러내리는 계곡물은 갈증을 없애준다. 나무와 풀꽃은 반갑다 손짓하고 새소리 바람소리는 환영의 노래를 연주한다. 자연은 인간 삶의 터전이며, 마음의 고향이다.

-오승휴의 <친구야, 고마워>에서

 

   자연 속에서 작가들은 충만한 ‘생명’과 ‘사랑’을 본다. i) <뒷산에 오르다>에서 작가는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고 느끼며 자연과 어울려 살아야 한다는 생태적 인식을 이루게 되고, ii) <텃밭 통신>에서 작가는 텃밭은 사람들 사이의 대화의 끈을 이어주는 사랑이 충만한 공간이 된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iii) <친구야, 고마워>에서 작가는 주말마다의 산행을 통해서 정신적 고통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연은 인간 삶의 터전이며, 마음의 고향이다.”라는 사실을 새삼 인식케 된다.
   작가들은 현재의 시간에서 과거의 시간을 되돌아보고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시간 속 망각과 기억의 순간을 끄집어내어 현재와 연결한다. 작품 속 화자들은 과거의 어느 한 때의 지나간 시간이 현재의 자아와 존재의 모습에 어떻게 작용하고 영향을 미쳤는지를 말해준다. 작가에 의해 포착되는 과거의 시간은 그저 일상 속의 한 부분이었을 수도 있고, 기억에서 사라져도 괜찮았을 일이라고 생각되지만, 그것은 언제나 우리들의 의식 속에 살아남아 있다. 우리들이 회상하는 그 일들은 어둡고 아득한 닫힌 문 뒤에 존재하는 비밀이면서 이야기되지 못한 회한이다.
   과거의 시간 속에 담겨있는 망각과 기억이 지금 우리 삶에 어떻게 남아 있는가. 글쓰기란 바로 우리들의 가슴속에 미처 치유되지 못한 채 남아 있는 회한을 끄집어내어 다시 더듬어가며 살펴보는 행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에토스가 하나의 텍스트 자체에 반영된 화자의 성격이며 독자를 향한 영향력 있는 정서라고 정의한 적 있지만, 말의 진정한 의미에서의 문학적 에토스는 우리가 지속의 시간을 힘들게 살아내면서도 고통과 회한에 눈감지 말고 그것을 응시하라는 것, 그리고 나와 타자의 고통의 연대를 형성하라는 것, 그것이 지금 당장 무엇을 해결할 수 있을지는 가늠할 수 없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최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이란 어차피 조금씩 사위어 가는 시간의 과정이 아니던가. 제야가 소용돌이치는 이 아득한 미완의 시간 속에서, 보속補贖을 기다리며 덩그러니 놓여있는 무수한 아픔과 슬픔의 회한을 꺼내어 서럽지 않은 등불에 매달아 주자.

 

 

허상문  ----------------------------------------------
   문학평론가. 영남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문학평론집: ≪문학과 변증법적 상상력≫, ≪현대문학비평론≫. 영화평론집: ≪우리시대 최고의 영화≫. 산문집: ≪시베리아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실크로드의 지평에 서서≫, ≪바람의 풍경≫ 등 다수의 저서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