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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연구 2013년 가을호, 이 계절의 문학/시평] 육체, 그 흔적과 균열의 시간 - 주영중

신아미디어 2014. 8. 4. 12:58

"육체는 시간의 뒷자락을 따라가며 변화를 거듭한다. 무언가 변형되는 것, 그것은 욕망에 의한 것일 수도, 의지에 의한 것일 수도, 혹은 그 어떤 알 수 없는 것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변형이 어떤 형태로 일어나건 언제나 변형 속에는 시간의 흔적이 아로새겨져 있다. 시간은 변형을 일으키고 지켜보고 그리고 지나쳐간다. 시간은 변형의 향배를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시간은 흐르고 또 그 무엇인가를 변모시킬 뿐이다. 시간이 덜컥거릴 때-그건 아마도 인간의 판단에서만 그러할지 모르지만, 시간은 균열을 만든다. 시간이 시간 속에 균열을 아로새긴다. 그때 생겨나는 균열을 우리는 사건이라 칭한다. 평평한 시간 속에서 돌출되는 시간이 바로 균열의 시간이고 시간의 균열이다."

 

 

 

 

 

 

 육체, 그 흔적과 균열의 시간        /  주영중

 

   멀리 혹은 가까이, 육체를 바라본다. 바라본다는 것은 자신의 육체 혹은 타인의 육체를 바라보는 행위를 포함하지만, 우리는 그 바라보는 행위에 일종의 거리 감각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주체가 자신의 바깥에 있는 타자의 육체를 바라보는 행위에도 거리 감각이 작동하지만, 또한 동시에 주체 안의 육체를 바라보는 행위에도 역시 거리 감각이 작동한다고 할 수 있다. 이때 주체는 자신의 육체를 타자화된 육체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의 육체는 단지 피와 살로 이루어진 물질로서의 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육체는 존재 자체를 내재화한다. 그렇게 육체는 주체나 타자의 존재 자체로서 주체 앞에 현시된다.
   육체는 생명과 죽음이 교차하고, 주체와 타자가 겹쳐지는 일종의 터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육체를 누군가 바라보고 있다고 가정하자. 이때 바라보는 행위 주체는 육체를 통해 많은 것들이 교차하는 것을 본다. 때로 생멸生滅을, 때로 고락苦樂을, 때로 자타自他를. 다시 말하자. ‘(바라)본다’의 말이 시각의 일률성에 대한 혐의를 지닌다고 한다면, 그러한 혐의를 지우기 위해, 그 범위를 넓혀 ‘느낀다’ 혹은 ‘사유한다’의 의미를 추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육체를 보고, 느끼고, 사유할 수 있다. 거리를 완전히 무화시킬 수는 없더라도, 이러한 행위 속에서 우리는 육체와 거리를 최대한 좁힐 수 있는 여지를 지니게 된다. 비록 사라진 육체라 하더라도 그 흔적을 간직하거나, 때로 흔적조차 사라진 자리에 새롭고도 낯선 육체가 태어나는 것을 목도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육체는 시간의 뒷자락을 따라가며 변화를 거듭한다. 무언가 변형되는 것, 그것은 욕망에 의한 것일 수도, 의지에 의한 것일 수도, 혹은 그 어떤 알 수 없는 것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변형이 어떤 형태로 일어나건 언제나 변형 속에는 시간의 흔적이 아로새겨져 있다. 시간은 변형을 일으키고 지켜보고 그리고 지나쳐간다. 시간은 변형의 향배를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시간은 흐르고 또 그 무엇인가를 변모시킬 뿐이다. 시간이 덜컥거릴 때-그건 아마도 인간의 판단에서만 그러할지 모르지만, 시간은 균열을 만든다. 시간이 시간 속에 균열을 아로새긴다. 그때 생겨나는 균열을 우리는 사건이라 칭한다. 평평한 시간 속에서 돌출되는 시간이 바로 균열의 시간이고 시간의 균열이다.
   육체의 균열은 우리에게 일종의 사건이다. 주체가 이러한 육체의 변화를 바라보고 느끼고 사유하는 순간은 바로 사건을 지각하는 일이다. 사건을 바라보는 주체 또한 사건으로의 진입을 통해 타자 혹은 타자화된 주체의 육체와 관계 맺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건은 최소한 깨어있는 상태 속에서만 도래한다. 깨어 있지 않을 때, 그것은 그저 무상한 시간처럼 흘러간다. 더 이상 균열을 일으키는 사건이 되지 못한다. 벼락같이 닥쳐온 균열의 시간을 그저 무심히 지나치는 한, 시간은 우리에게 단지 껍데기의 시간만을 제공할 것이다. 그저 모든 게 의미 없이 지나갈 뿐이다. 자신의 행복과 안온에 둘러싸여 자기 향유의 시간에 빠져 타자의 시간을 읽어낼 수 없을 것이다. 향유 속에 있기만 한 삶은 그러므로 한없이 깊은 잠 속에 빠져 있는 아니 빠져 있고 싶은 삶과 다르지 않다.
   누군가에게 불현듯 나타났다 사라지는 번개의 시간은 다른 누군가에게는 도저히 떠나보낼 수 없는 것이 되기도 한다. 떠나보낼 수 없을 때, 그는 흘러가는 시간의 끝자락을 붙잡기 위해 그 시간의 뒷자락을 붙들어 여기 이 자리에 주저앉히기 위해 온 힘을 다할 것이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의 집중력으로. 그러면 가끔 시간은 그 안간힘의 행위에 못 이기는 척 느린 속도로 흘러가는 시혜를 베풀기도 한다. 그 느려진 시간 속도 속에서, 육체의 흔적과 미지의 시간은 잠시 각인의 가능성을 열어 놓게 된다.
   여기, 시들이 만든 균열의 통로를 따라 느린 흔적을 따라 쓴다. 육체가 육체에 이끌리듯. 그러므로 이 글은 그저 이끌리기만 하기로 한다. 주체의 육체가 타자의 육체로 변환되는 균열의 시간, 타자의 죽음과 주체의 생명이 교차하는 시간, 타자화된 육체로서의 주체의 분열적 시간, 사유의 카오스 속에서 떠올라오는 육체의 시간.

 

이건 몸에 쓰이는 후기 혹은 가장 오래 이어진 필사여서
아프기 전에 이미 아픔의 절정을 알고 마는 참어
같은 증세로 저녁의 구름은 노을을 옮겨 적는다
꽃내음은 바람을 적시고 바람은 멀리 한 계절을 끌고 간다
그러니까 나는 네게 복제된 증상이다
비접촉으로도 너의 고통과 결합하는 방식
물들기 쉬운 내력을 앓고 있었으므로 너는 다시 내가 불러낸 처음
어느 살점 속에 말없이 뿌리 내리다 떠나가는 유목은 흔적을 남기지 않지
치명적이더라도 내게만 머물기 바라는 난치의 기억
내게서 자라나다 내 안에서 죽어야 하는 너라는 병
전이의 경로를 따라가 보면 달처럼 맴돌았다는 진단이 나올 것이다
한때 월식이 있었고 해독하기 힘든 천문이 새겨졌을 것이다
온몸으로 퍼지는 불온한 증여를 들여다본다
여기에 어떤 병명을 갖다 붙여도 가령
빗방울에 스민 구름 냄새라든가
단풍나무가 머금은 햇볕의 온기라든가
어쩌면 네게서 너무 멀어져 알아내기 힘들지라도
나는 지금 징후와 후유증 사이의 중간계를 통과하는 중이다
나는 아프기도 전에 감동했다는 것이며
물들었으므로 닮아가야만 하는 의례를 따라
그리하여 면역이라는 영역에 들어설 때까지

- 윤의섭, 「感染」(『현대시학』, 2013. 7월호)

 

   육체에서 육체로 아픔이 전이된다. 주체는 아픈 육체가 겪었을 징후와 후유증 사이에 있다. 이미 사태를 경험해버린 자의 독백처럼 이 시는 존재한다. 육체의 흔적과 균열 속에서 ‘온몸으로 퍼지는 불온’의 감각이 주체에게 증여된다. 주체는 ‘아프기 전에 이미 아픔의 절정’을 느낀다. ‘너’라는 타자와의 어떤 접촉도 없이 타자의 아픔과 결합하며, 또한 그 증상이 주체에게 복제된다. 타자에게 물드는 이 균열의 시간은 주체가 시간의 금제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시간이다. 그 자유로워진 시간 속에서 지나간 시간과 다가올 시간은 하나가 된다. 그 순간은 오로지 ‘너’라는 타자를 향해 있는 시간이다.

 

   살아서 더운 피를 뿜어낸 것들의 살은 질기다 피를 쏟아낼 때의 안간힘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피는 살을 뚫고 비명보다 먼저 솟구치고 목숨보다 늦도록 흐른다 아버지는 단칼에 내리친 기다란 오리목을 움켜잡고 피를 받았다 어린 열병을 앓고 난 내게 오리 피를 들고 왔던 건 아버지였다 눈 딱 감고 마셔라 보름달처럼 환한 눈동자가 동동 떠 있었다

 

   살아서 더운 피를 담고 있던 것들의 살은 연하다 숨을 끓이고 눈물을 끓이는 피는 살을 쇳물처럼 비리고 묽게 한다 일요일 새벽이면 아버지는 마장동 도축 시장에서 갓 잡은 소의 뜨끈한 핏덩이를 사 왔다 사춘기 빈혈을 앓던 내게 생간 생지라를 잘라 소금에 찍어 먹게 했던 것도 눈을 부릅뜬 아버지였다 씹지 말고 삼켜라 입을 벌릴 때마다 피꽃이 피었다

 

   살아서 더운 피가 살 속에서 터진 것들의 살은 달다 터질 만큼 터진 피가 살에 밴 탓이다 피와 살은 수시로 서로가 된다 한솥밥 먹던 누렁이를 냇가 오동나무에 매달아 몽둥이로 때려잡았던 아버지, 스무 살 결핵을 앓던 나를 ‘숙이네 집’에 데려가 장국 속 고기만을 골라 건네곤 했다 꼭꼭 씹어라 산초 가루에서는 아버지 겨드랑이 땀 냄새가 났다

 

   너를 먹고 내가 살고 있다 이렇게

- 정끝별, 「육식에의 추억」(『세계의 문학』, 2013. 여름호)

 

   이 시의 육체는, 육체와 육체가 아주 먼 비접촉의 방식으로 감염되는 현상과는 다르게, 접촉의 방식으로 다른 육체와 하나 되는 것을 시화한다. 다른 육체가 주체 속으로 들어와 뜨거운 육체가 된다. 연약한 생명을 뜨거운 열기로 가득 채우는 육체들. 하나의 생명이 또 다른 생명으로 전이되는 것이다. 한 생명의 죽음이 한 생명의 삶으로 변모하며, 한 생명의 힘이 또 다른 생명의 힘으로 육화되고 있는 것이다. 피를 쏟으며 사라져간 육체가 주체 안에서 여전히 들끓고 있다. 그 속에는 하나의 죽음과 하나의 생명의 끈이 각인될 뿐 아니라, 아버지라는 존재의 지극한 사랑이 각인되어 있다. 그러므로 다른 육체로서의 피와 살은 다름 아닌 아버지의 사랑이기도 하다. 죽음이라는 시간의 균열이 주체의 모자란 삶을 연장시키고 있다.

 

무릎이면 끝나요
무릎으로 완성되는 거예요

 

내 손금은 굴렁쇠
나의 미래가
여린 균형이 보여요

 

내가 나를 골랐을 때
나는 납이었는데
금속성金屬性으로
당신과 스치는 금속성金屬聲으로
착착 조립되는 기분
심장부터 바닥에 눕혀지는 기분
차분하게 부위를 구분하면서
몸을 입힌 그림자처럼
젖은 옷에 달라붙은 사이즈처럼
모형틀에서
나의 전부를 숨기기로 한 선택,

 

꼭 감은 눈의 색깔을 보고 있어요
내가 고르지 않은 나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기 좋아하고
몸의 얼굴이 될 뿐
얼굴의 몸이 되지 않을 부분들이 완성되기 전에
무릎은 녹아서 흘러버려요
흐름은 고여서 무릎이 돼요
눈썹에 겹쳐진 인조 눈썹들처럼
가장 무른 연필심으로 쓴 단어가
탄산의 것인 것처럼

 

무릎이면 알아요
무릎으로 걸어보는 거예요
뼈와 피부가 같은 감촉일 텐데
내가 고르지 않은 나는 여린 성별의
미래의 태풍의 이름

 

내가 나를 골랐을 때
나는 내 배를 갈라
따뜻한 밑바닥을 가져요
불을 상상하려고 볼과 볼을 비벼요

- 안미린, 「납 인형」(『현대시』, 7월호)

 

   시간은 타자의 육체의 흔적을 주체의 육체 속에 각인시키기도 하지만 또한 주체의 육체의 흔적들을 주체 앞에 진열하기도 한다. 주체는 시간의 균열 앞에서 자신의 또 다른 육체들과 대면하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 주체의 또 다른 육체가, 그리고 또 다른 육체가 존재한다. 그렇게 또 다른 육체들을 주체는 선택하기도 하고 선택하지 않기도 한다. 그 육체들은 금속성의 납 인형의 형상으로 주체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추상적 공간 안에서 행해지는 이 기이한 행위와 몽롱한 주체의 감각이 낯선 풍경을 만들고 있다. 주체는 그 추상적 공간 속에서 자신이 선택한 금속성의 육체와 겹쳐지는 느낌 속에 들기도 하고, 선택하지 않은 금속성의 육체와의 부조화를 경험하기도 한다. 자신이 선택한 육체와의 안쓰럽고도 뜨거운 겹침을 경험하는 주체는 그것만이 자신의 시간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또 다른 육체 또한 미래의 자신의 육체임을 지각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태풍처럼 다가올 미래의 육체임을. 주체는 지금 불안 속에 잠겨 선택과 비선택의 기로에 서 있지만, 선택하든지 선택하지 않든지 그 또 다른 육체들이 자신의 존재 유지를 위한 육체가 될 것임을 예감한다. ‘모형틀’에 자신을 끼워 맞추고 있는 자신의 모습 속에서, ‘인조’ 육체에 자신이 끼워 맞춰지리라는 예감 속에서, 주체는 묘한 안정감과 균형감을 얻는다. 불안과 불균형, 그것이 현재의 주체의 이름이라면, 주체 앞에 놓여 있는 가깝고도 먼 시간 속의 육체는 안정과 균형이라는 미래의 주체의 이름인 것이다. 설령 미래의 주체에 대한 예견이 안정과 균형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현재의 주체가 원하는 미래의 상은 아니기에, 오히려 그 또 다른 육체들에 대한 예감은 현재의 주체가 지니고 있는 불안과 불균형의 감각을 강화시키고 현재의 주체의 슬픔을 강화시킬 뿐이다. 무릎으로 걷고 무릎으로 자신의 또 다른 육체를 대하는 방식은 자신의 현재와 미래에 대하는 연약해질 대로 연약해진 방식이다. 자기 앞에 펼쳐진 시간의 균열 속에서 주체는 시간과 시간이 늘어서 있음을 느끼고 보듬고 안쓰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퇴근길에 보는 어둠은 거대한 동굴 같다.
불행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는 생각,
차도로 뛰어드는 아이처럼
단 한 걸음이면 우리는 벌써 도착한다.

 

도로와 함께 내려앉은 차량의 탑승자도
별일 없이 이 구덩이를 통과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응 지금 거의 도착했어 어쩌면 휴대전화로
오 분 뒤의 도착을 알리는 중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갑을 놓고 와 되돌아가는 짜증스러운 오 분 탓에
누군가는 덧없이 덫을 피해 갔는지도.

 

여름의 하굣길 오후에 우리는 저수지로 뛰어들곤 했지만
물주름이 사라지면 산과 하늘이 깔리던 그 자리가
통로가 될 거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어느 날
저수지의 봉인을 풀자 갇혀 있던 아이 하나가 끌려 나왔다.
들어갈 때와 다른 얼굴이었다.

 

있던 것이 사라진 자리가 구멍이다.
다시 단단해진 거울 위, 산을 소금쟁이가 지우며 지나가고
어린 네가 물이 들어간 귀를 털면서 뜀뛰던 고갯마루에
지금은 스핑크스라는 술집이 들어서 있다. 거기서

 

퇴근길에 그대로 가라앉아버리는 사람들도 있고
이 골목을 소금쟁이처럼 지나간 사람도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삯이 있어야 한다.
이 수수께끼 같은 삶을 무슨 대가를 지불하며 건너고 있는 건지
가야 할 길은 멀고 남은 시간이 없다고 생각될 때의 목마름,

 

퇴근길에 보는 어둠은 거대한 짐승의 아가리 같다.
내가 들어갈 그 아가리를 보다가 나는 잠시 구멍이다.

- 이현승, 「씽크 홀」(『문학과사회』, 2013년. 여름호)

 

   여기, 또 하나의 균열이 있다. 타자의 육체(어쩌면 타자화된 자신의 육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어쨌든)가 겪었던 굴절을 보면서, 또 하나의 주체가 사유하고 있다. 삶이 수수께끼 같을 때, 어둠 속으로 금방이라도 빨려들 것 같을 때, 운명의 괴물에 가로막혀 운명과 대면할 때, 그래서 다짜고짜로 운명과 한판 겨루어야 할 때, 알 수 없는 시간의 질문과 맞닥트릴 때, 우리는 일상의 시간에서 벗어나 낯선 시간으로 진입하도록 강요받는다. 주체를 포함한 퇴근길의 사람들이 지금 바로 그렇게 어둠과 같은 운명 속으로 질주하고 있다. 마치 덫과도 같은 거대한 동굴 같은 어둠 속으로. 거대한 동굴-짐승의 아가리-구덩이-저수지-덫, 어둠의 다른 이름들을 호명하며, 주체는 마치 불행을 향해 뛰어드는 사람처럼, ‘씽크 홀’을 향해 뛰어드는 사람을 내재화한다.
   저기 저, 저수지에서 봉인을 풀자 끌려나오는 이상한 아이. 저수지에 들어가기 전과는 전혀 다르게 변형된 이상한 아이. 죽음으로서만 가능한 완전한 변형을 주체는 본다. 이때 현시되는 육체는 이제 사라지기 전의 육체와 사라진 후의 육체와 새로이 생성되고 변형된 육체, 혹은 돌아온 낯선 육체의 시간이 겹겹이 쌓인 터가 된다. 주체는 시간의 균열 속에서 그러한 것들을 보고, 느끼고, 사유한다. 그리고 그 균열된 시간에 감염된 주체는 그 자체로 균열이며, 구멍이 된다. 시간의 균열과 함께 찾아온 한껏 느려진 시간 속에서 시간의 구멍이 된다.

 

 

주영중  ----------------------------------------------------
   2007년 『현대시』로 등단. 저서 『현대시론의 역학적 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