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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12월호, 사색의 창] 물레 - 정종부

신아미디어 2014. 6. 17. 00:06

"물레를 돌리는 일은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일은 아니다. 물레는 변화에 굼뜬 나를 일깨우고 있다."

 

 

 

 

 

 물레        -  정종부


   골동품 가게로 따돌린 물레는 서먹서먹한 표정을 하고 있다. 낯선 자리가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아 보인다.
   세월의 때가 묻은 골동품들을 보다가 새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노인들의 초조한 모습이 떠올랐다. 어떤 주인, 무슨 직업으로 새로운 인연과 맺어질지 모르는 막연한 나날이다. 물레는 본래 하던 일을 잃고 낡은 골동품 가게에서 낡은 세월을 보내고 있다.
   나는 물레와 마주 앉았다.
   물레는 둥근 테두리 안에 네 칸을 질렀고, 그중의 한 칸은 다시 작은 네 칸으로 이루었다. 앙증맞은 꼭지마리가 붙어 있고 가락토리를 잡아주는 괴머리는 물렛줄로 연결돼 있다. 줄에 쓸리어 속살이 군데군데 드러난 물레는 세월을 품은 채 말이 없다. 멀리 떠나간 세월을 끌어와 마주앉는 느낌이다.
   모처럼 만난 물레를 두고 나는 물레의 추억을 가다듬었다. 뒤쪽에 벽을 세우고 물레 양 옆으로는 방문과 봉창을 달았다. 어머니는 물레를 잦고 계신다. 어머니 곁에서 그림자놀이를 하던 나는 막 잠이 들었다. 식구들이 잠든 겨울 밤, 떨리는 문풍지 소리와 댓잎에 눈 내리는 소리, 물레 돌아가는 소리를 어머니는 당신의 그림자와 단둘이 듣고 있다. 어릴 적 풍경이 눈에 삼삼거리는 가난한 풍경을 떠올리는 순간 생각은 어느새 옛집에 잠겨 있다.
   시대적 요구나 깊은 계산에서라기보다 가족을 위한다는 일념으로 숙명처럼 어머니는 물레를 돌리셨다. 내 할 일은 내가 하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긴 자연에 순응하는 삶이었다. 헝클어진 솜뭉치에서 실이 뽑아져 나오듯 자식들의 앞날이 순탄하길 바라는 마음이 있어 피곤하고 지루한 줄도 모르는 어머니셨다.
   물레는 어머니의 삶이었다. 겉모양은 둥그스름하지만 물렛줄은 팽팽했던 것처럼, 당신은 순순하게 사셨지만 속은 늘 물렛줄 같은 긴장감에 차 있었다. 가족들의 건강을 도우면서 자신의 영화는 돌아볼 틈조차 갖지 못하셨다. 라마교의 마니차도, 물레방아도 자신을 돌려 누군가를 위하는 삶이지 않는가. 물레를 돌리면서 어머니는 식구들을 위해 노래하듯 주문이라도 외지 않았을까. 때로는 절망스런 마음도 둥글게 다스리려 애썼을 것이다.
   변함없이 살아온 것도 잘못일까. 남을 위해 평생 붙박이로 살아온 물레는 정작 자신은 변화하지 못한 채 길가 골동품 가게에 멍하니 나앉은 신세가 되었다. 변화는 생명이라는 말도 들린다.
   물레는 여인들의 애환이 깃든 혼자 궁실거리는 민요 같은 노래를 기억한다.
   친정어머니를 여읜 친구를 찾아보고 돌아오는 남해고속도로. 초록바다에 물길 같은 도로를 시원하게 달려왔다. 갈 때 보지 못했던 백일홍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무덤가에 붉게 피었다. 환생을 염원하는 망자의 마음이 저토록 붉게 어리었나 보다. 저승꽃이라 부르기도 했던 어린 날의 기억 때문일까. 백일홍은 아직도 무덤가에 피는 꽃의 상징으로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골동품점이나 박물관에 가야 볼 수 있는 물레다. 물레를 두고 옛 여인들의 삶을 만화영화로 만들었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예를 익히는 좋은 교육 자료로 활용할 수 있으리라. 우리들에게 옷을 입혀주던 물레 아닌가. 감동적인 이야기로 엮은 만화영화를 보여주는 것은 조급하고 모나기 쉬운 젊은 마음속에 은근과 끈기를 심어주는 일이 될 것이다.
   물레를 돌리는 일은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일은 아니다. 물레는 변화에 굼뜬 나를 일깨우고 있다.

 

 

정종부  -------------------------------------------------

   ≪수필과비평≫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