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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12월호, 나의 대표작] 똥을 누려고만 해도 - 남호탁

신아미디어 2014. 6. 4. 20:56

"그날 이후로 나는 깨달았다. 지탱해주는 것 하나 없이 허공에 매달려 똥을 누자면 그것도 만만한 일이 아닐진대, 하물며 사람이 비빌 언덕 하나 없이 달랑 맨주먹으로 살아가자면 얼마나 버겁고 힘에 부치는 것인가를. 그날 이후로 나는 보게 되었다. 기대고 의지할 발판 하나 없이 그야말로 알몸뚱이 하나로 버티며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임을."

 

 

 

 

 

 똥을 누려고만 해도       -  남 호 탁

   얼마 전 연예계니 연극계는 말할 것도 없고 종교계까지도 학력위조 문제로 나라가 떠들썩하던 때가 있었다. 이름깨나 알려진 연예인이나 연극인이라면 빵빵한 배경보다는 오히려 초라한 학력이나 보잘것없는 배경이 자랑이 되면 됐지 굳이 감추려들거나 허위로 조작할 이유까지야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인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닌가 보다. 돈 없고 빽없이 성공을 일궈낸 사람이야말로 많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아 마땅하고, 어찌 보면 이런 이들이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데 이미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이들이 굳이 학력을 속이고 위조하는 것이라니, 나로서는 쉬이 납득할 수가 없다. 큰맘 먹고 연예인이나 연극인 등은 그럴 수 있다고 눈감아주더라도 나는 성직자들이 학력을 속이고 위조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눈곱만 한 동정조차 보태고 싶은 마음이 없다. 성공이니 명예니 하는 것들을 좇는 이들이라면 이미 성직자라고 할 수 없는 게 아닐까. 어쩌면 신神을 따르고 도道를 구하는 길은 ‘나’라는 자아를 허물고 부인해 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자아를 부정해야 할 사람들이 굳이 학력이니 경력 같은 누더기를 걸치려 기웃대는 것이라니……. 불쾌하다. 성직자로 살아가는 게 그토록 고달프고 만만치 않은 것이라면 진즉에 속세로 나올 일이지. 나 같은 범인凡人도 속이 상하고 울화가 치미는 것인데, 하물며 하나님이나 부처님은 얼마나 속이 타실까. 이리도 나라가 어수선한 건 왕왕 이 나라에 본이 되는 어른이 없기 때문이라고들 한다. 따를 스승이 없기 때문이라고들 한다. 성직자들까지 학력을 위조하는 판이니, 흉흉하고 팍팍한 세상을 이해 못할 것도 없다.

 

   남을 속여 가면서까지 그럴싸한 배경을 만들려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을 향한 나의 증오심은, 그 일을 겪고 난 이후론 적잖이 누그러졌다. 누그러진 정도가 아니라 아예 동정이 듬뿍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게까지 되었다.

 

   언젠가 미국을 여행 중에 일이 급해 화장실로 달려 들어간 적이 있다. 볼일을 보려고 허둥지둥 바지를 내리고 척하니 변기 위에 걸터앉아 힘을 주는 것인데, 어찌된 영문인지 나는 당최 아랫도리에 힘을 줄 수가 없었다. 대장大腸에선 빨리 내보내달라고 아우성인데 속수무책이라니. 세상만사 모든 일이 그렇듯 똥을 누려고만 해도 나름대로의 순서가 있는 법이다. 똥을 누자면 우선 아랫배나 항문 괄약근에 힘이 들어가야 하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날따라 평소 그렇게나 쉽게 일사천리로 진행되던 동작들이 도무지 이루어질 생각을 않는 거였다. 당장에라도 쏟아져 나올 듯 뒤는 무지근하고 마음은 급하기만 한 것인데, 정작 변기 위에 앉아서도 밀어낼 수 없는 것이라니, 그야말로 난감하고 황당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르고 거듭 용을 써보았지만 감감무소식, 나는 여전히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슬슬 걱정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거지?’
   ‘웬 변비?’
   다른 건 몰라도 변비만큼은 내게 있어 생소하고 낯설기만 한 용어였다. 변비는 내게 치료받는 환자나 남의 얘기는 될 수 있을지언정 평소 나와는 하등 인연이 없는 어휘였다. 평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아침에 일어나 물 한잔만 마셔도 쪼르르 화장실로 달려가기 바쁘지 않았던가. 물 한잔만 들어와도 화들짝 놀라 호들갑을 떨며 자신들의 역할을 충직하게 수행하기 바쁜 게 나의 위와 창자였다. 이런 내가 변기 위에 걸터앉아서도 좀처럼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삐질삐질 땀이나 흘리고 있는 것이라니, 그야말로 기가 찰 노릇이었다. 평소 변비가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똥이 마려운 느낌(변의便意)을 수시로 무시하고 화장실에 가는 것을 서너 차례 미루다 보면 볼일을 보는 데 있어서 어려움을 겪을 수가 있다. 똥이 장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으면 있을수록 수분을 빼앗겨 굳어지기 때문이다. 평소 나는 약간만 기미가 있어도 머뭇대지 않고 화장실로 달려가는 편이라, 똥이 돌처럼 굳어질 까닭 또한 희박했다.
   ‘사십 년 넘게 물마시듯 수월하게 해 오던 동작을 할 수 없는 것이라니, 도대체 무슨 이유로…….’ 똥을 누지 못하는 것도 못하는 거였지만 그래도 명색이 대장항문전문의사인 나는 원인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 화장실이란 게 참으로 해괴하다. 문 밑 이삼십 센티미터 정도는 뻥 뚫려 있으니 말이다. 굳이 밑을 터 지나다니는 사람의 발이나 화장실에 앉아 볼일을 보고 있는 사람의 두 발이 보이게끔 한 저의를 모르겠다. 예민한 사람의 경우 이와 같이 낯설고 신경이 쓰이는 환경에서 볼일을 볼라치면 애를 먹을 게 뻔하다. 혹시 내가 변기 위에 앉아 끙끙대기만 할 뿐 똥을 누지 못하는 게 그런 이유 때문에…….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내가 그런 이유로 똥을 누지 못한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나는 미국에 자주 왔다 갔다 하는 편이었고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미국에서 1년 정도 산 경험도 있었기에, 밑이 터진 화장실에서 볼일을 본다는 게 그다지 낯설고 생소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거지?’
   이유를 몰라 전전긍긍하던 나는 돌연 나의 두 발이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그리고 보니 내가 앉아 있던 변기는 여느 미국 화장실과 달리 제법 높이가 돼, 나는 두 발을 지면에 고정시키지 못한 채 변기 위에 걸터앉아 있는 꼴이었다. 변기가 높다 보니 나는 발가락 끝만 지면에 간신히 걸칠 수 있었다.
   ‘혹시 이게 원인이 되어…….’
   나는 변기에서 엉덩이를 뗀 후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서는 아랫배와 항문 근처의 근육으로 힘을 모아봤다. 똥을 시원스레 쌀 수만 있다면 민망한 자세쯤은 문제가 아니었다. 두 발의 뒤꿈치가 든든히 지면에 고정되자 나는 어렵잖게 항문 주변으로 힘을 모을 수가 있었고,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평소마냥 수월하게 볼일을 볼 수도 있었다. 이런 경험을 한 후 나는 인터넷을 뒤져 혹여 이와 관련된 논문이 있나 검색해보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닌 끝에 두 편의 논문을 찾을 수 있었다. 논문에는 발뒤꿈치를 지면에 단단히 고정시키고 있어야 항문 주변이나 아랫배에 힘을 줄 수가 있어 똥도 시원스레 눌 수 있다고 또렷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후 정말 그런 것인가 하여 나는 확인 차 부러 변기 위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실험을 해보기도 했는데, 어김없는 사실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깨달았다. 지탱해주는 것 하나 없이 허공에 매달려 똥을 누자면 그것도 만만한 일이 아닐진대, 하물며 사람이 비빌 언덕 하나 없이 달랑 맨주먹으로 살아가자면 얼마나 버겁고 힘에 부치는 것인가를. 그날 이후로 나는 보게 되었다. 기대고 의지할 발판 하나 없이 그야말로 알몸뚱이 하나로 버티며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임을.

 

 

남호탁  -------------------------------------------
   의학박사. 일반외과 전문의 예일병원 원장. 저서 : ≪대장항문병의 이해≫, ≪똥꼬의사≫, ≪똥꼬이야기≫, ≪수면내시경과 붕어빵≫, ≪똥은 기똥차다≫.

 

 

작 가 메 모

 

   먹는 것에 관한 한 나는 까다롭지 않다. 아니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이지 싶다. 된장찌개 속에 둥둥 떠 있는 비곗덩어리도, 넓적한 쟁반 위에 놓여있는 물기 머금은 풋풋한 채소도 내게는 둘 다 그저 맛난 음식일 뿐이다. 육류는 멀리하고 온갖 색깔의 채소를 곁들여 먹어야 직성이 풀리고 마음이 편해지는 식습관 또한 하나의 취향이듯 나의 취향은 가리지 않고 아무 음식이나 넙죽넙죽 받아먹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내 식탁에는 일정한 규칙도 없을뿐더러 메뉴 또한 즉흥적이고 산만하기만 하다. 혹여 친한 친구나 귀한 손님이 찾아온다고 해도 별반 달라질 거라곤 없다. 내놓고 자랑할 만한, 대표할 만한 귀한 음식 같은 거야 있을 턱이 없으니, 별난 것을 내놓으라는 이를 탓할밖에.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미안한 마음에 허기나 채우고 가라며 너저분한 식탁이나마 차려볼밖에.

 

   밤새 술을 퍼마시다 아무렇게나 차 안에 꾸겨져 집으로 향하는데 저만치 앞에서 꽤나 낯선 차가 피곤한 바퀴를 굴리고 뒤뚱대고 있다. 번쩍거리는 주황색 띠를 엉성하게 단 점퍼차림의 두세 명의 남자를 꽁무니에 매단 채. 이내 뒤로 처지는 청소차를 무거운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다 나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슬그머니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만다. 내게 직장암 수술을 받은 팔순 노모의 약을 타기 위해 오십대 초반의 키 작은 남자는 거르는 일 없이 규칙적으로 병원을 방문한다. 뒤뚱뒤뚱 버스에 올라타고, 다시 위태위태하게 버스에서 내려 사십 분 남짓 걸리는 거리를. 사고로 무릎 아래의 양다리를 절단한 그로선 버스를 타고내리는 것조차 힘든 노역이다. 하지만 투병 중인 노모를 떠올리면 그저 죄송스럽고 미안할 따름이라며 매번 눈시울을 적신다. 운동한답시고 어쩌다 일찍 일어나 가까운 야산이라도 오를 양으로 아파트 현관문을 나서는데 노란 복장의 야쿠르트 아줌마가 눈에 들어온다. 별 생각 없이 지나치려는데 무언가가 내 무딘 눈길을 사로잡는다. 앳돼 보이는 호리호리한 몸매의 젊디젊은 여인. 야쿠르트를 실은 손수레를 움켜쥐고 잰걸음을 옮겨놓는 그녀 옆으로 자그마한 그림자 하나가 바싹 붙어 애처로운 발걸음을 옮겨놓고 있다. 잘해야 서너 살이나 되었을까? 잠에서 채 깨어나지도 않은 저렇듯 어린 딸과 함께 춥고 어두운 새벽을 헤맬 수밖에 없는 처지라니. 하다못해 불구의 남편이라도 있다면 어린것을 맡겨두고 그나마 홀가분한 마음으로 새벽노동에 뛰어들 수 있었을 것을. 빈손, 알몸, 눈물, 한숨……. 숱한 시린 몸뚱이들! 지탱해주는 게 없으면 똥 누는 것조차 버거운 일인데 하물며 저들이야! 따뜻한 방 안에 앉아 식곤증에 시달리며 글을 끼적대는 지금, 누군가는 달랑 몸뚱이 하나로 삶이라는 무거운 수필을 처절하게 써내려가고 있는 것이니……. 그만 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