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 2013년 11월호, 다시 읽는 좋은수필] 청춘의 가능성 - 구상
"이 대화 속에서 인간의 삶의 가능성과 인간의 삶의 진실이 어떻게 해서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이 교묘하게 표현되어 있다. 즉 저 크리스토프처럼 인간의 가능성을 과시하려고 들고 자기 욕망에 몸부림쳐 보지만 고트프리트의 말대로 결국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요,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깨닫고 이를 수행하는 사람만이 인생에 있어 참다운 삶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청춘의 가능성 / 구상
누구나 청춘은 무한한 가능성의 시대라고 한다. 이 장밋빛 말에 젊은이들 자신이 도취하기 쉽지만 실은 먼저 이 말이 지니는 참된 뜻을 밝혀내야 하고 실제 삶의 진실한 모습을 깊이 살펴보아야 한다.
하기야 청춘기는 모든 가능성에 넘쳐 있는 시절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첫째, 그 ‘가능성’이라는 말이 문제인데 이것은 ‘무엇이나 할 수 있다.’든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고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능력’과 ‘시간’이라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더러는 무엇이나 잘 해내는 사람이 있어 만능이라는 표현을 쓰기는 하지만 그것은 역시 ‘올 마이티’는 될 수가 없는 것이므로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고 보통 인간이 수명을 다 누려야 70년, 그 속에서도 젊음의 시간이나 어떤 일이 한몫을 해내는 시간이란 참으로 짧다 하겠다.
그런즉 청춘의 무한한 가능성이란 말 속에 있는 저러한 인간의 한계성을 올바로 인식하지 않으면 자칫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주제넘은 자신이나 헛된 욕망을 일으키게 하기가 쉽다.
한편 우리가 날마다 산다는 것은 선택과 결단의 되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우리가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를 가지고 개인적인 일상생활에서부터 사회적인 것, 또한 정신적 세계에까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여러 가지 가능성 속에다 자기의 상황이나 조건을 고려해 넣고 행동으로서의 선택을 하고 있다.
그런데 저러한 무수한 생활 속에서의 선택의 범위가 중년이 되었을 때나 늙었을 때보다 젊었을 때가 더 넓은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어떠한 선택의 상황이나 조건이 인생의 연륜을 거듭할수록 좁아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른바 청춘의 가능성이란 이러한 인생 제반의 선택 폭이 넓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앞서도 말했듯이 인간의 능력이나 시간과 같은 한계성의 고려도 없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결국 하나밖에 없는 것이다. 이 하나를 선택할 때에 청춘에는 많은 가능성, 즉, 선택의 자유에 광범한 진폭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세상에는 가다가 무엇이든지 다해 보겠다는 탐욕의 사람이 있지만, 이는 어쩌면 아무것도 이루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 인간의 재간이나 능력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또 거기에는 피나는 노력이 따라야 한다. 어떤 일에 자신의 전 능력을 기울여가며 10년, 아니 전 생애의 노력을 바치고 있을 때 비로소 자기의 일이나 그 길에 대한 선택의 보람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인간 성공이니, 완성이니 하는 것은 저러한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서 자기가 선택한 어떤 일이나 길을 한 일, 두 일, 한 걸음, 두 걸음 익히고 밟아 나감으로써 단련되는 것이며 그것이 곧 가능성이요, 거기서 한 인생이 형성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스스로가 자신의 힘으로써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렇듯 자기가 자기의 가능성을 휘어잡았을 때 처음으로 인생의 자신이라는 것이 생겨난다. 그것은 가능성이 헛된 욕망이나 환상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어 무엇이 가능한가를 몸소 실천, 확인하는 데서 오는 자기 충족의 기쁨이요, 자기 자신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여유에서 오는 마음이다. 로맹 롤랑의 소설 《장 크리스토프》에는 그 주인공 크리스토프가 그의 백부인 고트프리트와 대화하는 이런 장면이 있다.
“가능성이 없는 것에 마음을 썩여 무엇하나? 인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해야만 한다네.”
“그것만으로 저는 성이 안 찹니다.”
크리스토프는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고트프리트는 인자하게 웃으며 말을 계속한다.
“그렇듯 이루지 못할 많고 큰 것을 바라는 것은 오만이야! 네가 보통 말하는 영웅이 되려는 것도 그것이지! 그것은 어리석은 짓이지. 영웅, 영웅이 무엇인지 나는 잘 몰라도 내 생각으론 영웅이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해내는 사람이 아닐까. 영웅이 아닌 사람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도 안 하고 있으니 말이야!”
“아아!” 하고 크리스토프는 한숨을 쉬면서
“그러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합니까. 애써 사는 보람이 무엇입니까? 원하는 것은 주어진다는 주장도 있지 않습니까?”
고트프리트는 다시 너그럽게 웃으면서
“그들은 거짓말쟁이들이지! 만일 그들의 말이 허튼소리가 아니라면 그들은 위대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야.”
이 대화 속에서 인간의 삶의 가능성과 인간의 삶의 진실이 어떻게 해서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이 교묘하게 표현되어 있다. 즉 저 크리스토프처럼 인간의 가능성을 과시하려고 들고 자기 욕망에 몸부림쳐 보지만 고트프리트의 말대로 결국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요,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깨닫고 이를 수행하는 사람만이 인생에 있어 참다운 삶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상에서 내가 말한 것은 젊은이들의 무한한 꿈의 날개를 처음부터 펼치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꿈과 능력을 하나로 집중시켜 고트프리트의 말대로 위대하고 영웅적인 일과 삶을 이룩하도록 하기 위한 간절한 염원에서인 것이다.
구상 ----------------------------------------
구상님(1919~2004)은 시인. 함경남도 문천 출생. 시집 《초토의 시》, 《까마귀》, 《유치찬란》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