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문학 2013년 가을호, 이상문 작가 재조명·소설편/작품론] 소설적 사건과 역사적 반복 - 이 호
"이 소설은 어떤 식으로든 역사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더 나아가 (30년 전의 클리셰로 표현하자면) 역사의 피해자, 역사 앞에 무력한 개인들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미나와 미나의 엄마가 1980년 광주의 피해자라면, 이 소설의 화자인 ‘김대성’ 역시 한국전쟁의 피해자다. 그의 아버지는 6.25 동란 중에 북한군에게 부역했다는 이유로 동네 사람들에게 몰매를 맞고 힘든 시간을 보내다가 죽게 된다. 아버지가 죽은 후에 유복자로 태어나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게 된 것이다."
소설적 사건과 역사적 반복 / 이 호
0. intro
2013년에 1992년 발표작 이상문의 〈떠도는 사람들〉을 읽는 일은 자연스레 시차적視差的 관점을 형성하도록 만든다.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발표연도와 엇비슷한 1992년 즈음인 듯하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이 소설에서는 ‘광주 사태’라 칭해지고 있음) 직후 출생한 아이인 ‘미나’가 초등학교(이 소설에서는 ‘국민학교’로 표기되고 있음) 6학년으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는 서울 변두리 지역에서 방범일을 하는 ‘김대성’이라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에서 중요한 인물인 미나 엄마(김추자)나 미나의 상처는 1980년을 기점으로 형성돼 있다. 1980년 광주는 이 소설에서 제거해 버릴 수 없는 상처의 기원이다. 소설은 김방범을 중심으로 하여 그가 신고를 받고 출동한 집 모녀에 얽힌 이야기를 한 축으로 삼고, 자신의 동거녀이자 애인인 ‘미순’과의 일을 또 다른 축으로 이야기를 직조하고 있다.
이 소설은 어떤 식으로든 역사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더 나아가 (30년 전의 클리셰로 표현하자면) 역사의 피해자, 역사 앞에 무력한 개인들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미나와 미나의 엄마가 1980년 광주의 피해자라면, 이 소설의 화자인 ‘김대성’ 역시 한국전쟁의 피해자다. 그의 아버지는 6.25 동란 중에 북한군에게 부역했다는 이유로 동네 사람들에게 몰매를 맞고 힘든 시간을 보내다가 죽게 된다. 아버지가 죽은 후에 유복자로 태어나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게 된 것이다.
어쨌거나, 이 소설은 그렇게 1980년, 1992년 그리고 이 두 시간으로부터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오늘, 지금-여기(hic et nunc) 2013년까지 세 개의 시간대를 소환한다. 이 작품은 여러 가지 생각과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바, 그것은 1980년의 사건이나, 이 소설이 발표된 1992년이라는 시간뿐만 아니라 오늘까지 세 개의 시간대를 연결하는 시차時差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터이다. 따라서 이 작품을 각각 시간들의 결 속으로 파고들면서 다시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역사는 한번은 비극적으로 또 한번은 희극적으로 반복된다고 말했던 칼 마르크스의 아포리즘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그때(들)과 지금이 매우 다른 만큼, 또 그다지 다르지도 않은 것 같으니 말이다.
혹시 누군가 1980년 광주민중항쟁은, 그 용어가 이미 정리되었고, 희생자들에 대한 복권과 유가족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진 것 아니냐고, 이미 다 정리된 지긋지긋한 문제를 왜 다시 끄집어내느냐고 묻는다면, 아직까지 TV에 나와 “광주사태라는 표현이 맞다”는 젊은 보수논객(?)이 판을 치고 있다는 점, 그 사건의 주범이라고 지목된 사람의 재산을 빼앗기 위해 ‘전두환 추징금 특별법’이라는 기이한 법까지 제정하여 추징금 환수 작업에 몰입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 대해 상기해 볼 것을 권한다. 더불어 역사는 정리와 청산의 대상이 아니라 (재)해석과 반복의 문제라는 점까지 추가로 덧붙여 두고만 싶다.
track 1: 호모 사케르
이 작품이 그려내고 있는 상처와 고통의 시간은 일단 1980년 봄으로 치닫는다. 아동학대 신고를 받고 출동해 그 집 모녀를 만나 사정을 듣고 보니 그녀들의 고통은 1980년 광주에서 기인한 것으로 드러난다. 미나의 아버지는 1980년 5월 22일 즈음 광주에서 총에 맞고 죽었다(고 한다). 미나의 엄마는 그때 당시 미나를 배고 있었는데, 총에 맞아 부상을 입고, 뒤이어 국가기관원들에게 끌려가 태중의 아이(미나)를 임신한 상태에서 고문을 당하고 간신히 풀려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미나의 엄마는 정신쇠약증에 걸려 있다.
미나의 엄마가 김방범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미나의 모는 그 때의 일로 정신과 치료를 받았지만 아이 때문에 고생을 한 만큼 아이가 밉고, 아이가 정을 표시해 오면 징그러워서 증오심까지 끓어오른다는 것이다. 정확한 정보가 나타나고 있지는 않지만, 미나의 머릿결 속에 상처가 있다는 점, 모녀가 유도를 하기는 하지만 유도를 통해 아이를 사정없이 다루어서 문제라는 표현으로 볼 때, 미나의 모친 김추자가 정상적인 상태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런 정신적인 상처, 흔한 말로 트라우마 때문에 이들은 가는 곳마다 주변 사람들에 의해 이곳저곳으로 쫓겨나 이사를 다니는 형편에 있다. 소설의 제목인 〈떠도는 사람들〉이란 지난 과거 역사 때문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리 저리 떠돌아다니는 일종의 유민들인 셈이다.
화자 김대성 역시 한국전쟁과 한국현대사 속에서 힘겹게 자라 동네 파출소에서 방범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고, 그가 잠시 만나 돌보게 되는 미나 모녀도 1980년 광주의 희생자들(더 정확히 그 사건으로부터 남겨진 사람들)이다. 주인공-화자가 미나나 미나의 모친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이유도 은연중에 그들 모녀나 자신이 같은 역사의 피해자라는 공감대에서 형성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 소설의 줄거리를 따라가노라면, 이 작품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나 상황의 기원인 1980년 광주로 관심을 옮기지 않기는 어렵다. 사람들은 1980년 광주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들을 내놓는다. 커다랗게 두 가지 계열의 해석들이 있다. 그 사건이 발생한 원인, 당시의 정황들이나 시국의 흐름, 그 비극적 사건에 내재된 여러 가지 의미들을 해석하는 일은 주로 그 사건의 원인과 의미를 전유하는 것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그곳에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오해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그건 알 수 없다. 인간은 날 것으로서의 실재(the Real)를 파악할 수 있는 존재(자)가 아니다. 그것을 언어로 포착하려 하면, 이미 그것은 날 것 그대로의 실재가 아니라는 것은 우리 시대의 상식이지 않은가. 인간은 해석학적 동물이지, 실재를 파악할 수 없다. 가능한 것은 해석뿐이며, 실재는 언제나 네거티브한 방식으로 지시될 수 있을 뿐, 그것을 낚아채는 데는 늘 실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그때 거기서 누군가가 무참히 죽어갔다는 사실이다. 1980년 광주 지역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그것은 일종의 ‘예외상태’에 해당한다. 예외 상태는 벌거벗은 생명(blosse Leben)을 생산한다. 우리들이 주권자 앞에서 일종의 벌거벗은 생명 상태에 놓여 있었다는 것, 그때 광주만이 아니라 국가의 어느 곳에서든지 그러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었다는 것 말이다. 조르지오 아감벤은 예외상태를 선포할 수 있는 자가 주권자이며, 죽일 수는 있지만 희생물로 바칠 수는 없는 존재를 벌거벗은 생명, 즉 호모 사케르(homo sacer)라 명명한다. 현대 대부분의 국가는 최고통수권자가 유사시에 국가비상상태를 선포할 수 있는 법을 가지고 있다. 국가법은 모든 법이 일시적으로 정지될 수 있다는 ‘예외상태’를 포함하고 있으며, 일상의 법은 이 예외상태에 기반을 두고 성립된다는 것이다. 아감벤은 우리가 항시 호모 사케르일 뿐임을 증명했다. 유사시 계엄이 선포될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역시 1980년 5월 벌거벗은 생명으로 취급되었던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잠재적인 호모 사케르 상황에 놓여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더욱 황당한 것은 1980년 광주에 대해서 가장 많은 진실을 보유한 사람이 그 사건 발발의 책임 체계의 최상층에 위치했던 사람, 오늘날까지도 서울 연희동에서 철통 경호를 받으며 추징금을 차압하러 온 사람들에게 “수고가 많다”고 격려말을 보내는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가해자가 사태나 상황에 대해 가장 많은 진실을 소유하고 있다는 역설. 이것은 추리소설의 상황과도 일치한다. 추리소설에서 범죄가 발생하면, 그 사건에 대해 가장 많은 진실을 소유하고 있는 자는 단연코 가해자이다. 피해자가 사체가 되어 감추어진 증거(기호)를 지시한다 해도 범행 동기나 살해 방법, 발생 상황에 대해 가장 많은 진실을 소유한 자는 범죄자-가해자이다. 그 감춰진 진실에 육박해 들어가는 ‘탐정-수사관-기자’가 진실을 찾아 나서는 행위자이다. 이 계열들에 작가 역시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서사 안에서(서사를 통해서) 진실을 찾아 나서며, 독자에게 진실로 안내하는 매개자들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감춰지고 은폐된 진실에 접근하고 그것을 드러내(려)는 사람이다.
소설 형식 자체가 추리소설과 구조적 동형성을 갖고 있다는 것, 소설이란 결국 진실을 찾는 서사라는 것을 잊지 말자. 모든 소설과 글쓰기는 진실에 도달하려는 몸부림의 흔적으로 남겨진 문자들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이상문의 〈떠도는 사람들〉 역시도 광주 사건의 진실을 추적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이 소설이 천착하는 진실의 차원은 사건 발생의 진실이나 가해자의 범행동기가 아니라 피해자의 차원이다. 상대적으로 이 소설은 사건의 발생이나 역사적 차원의 판단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1980년 광주의 (실재적인 차원의) 진실이 무엇인지 단언하기 어렵다고해도 또 한 가지 분명한 건, 그 사건으로 인해 남겨진 사람들, 고통 속에서 남겨진 시간을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 소설은 바로 그 지점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역사의 타자에 대한 서사로 읽힌다.
그때 거기서 왜, 어떻게 모종의 일이 발생했는지 잘 알 수는 없지만 그로 인해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벌거벗은 생명 상태에의 발견, 그것은 1990년대를 살아가는 또 다른 차원의 유민들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일제 강점기 하의 유민들로부터 시작해 산업화로 인해 고향으로부터 이탈된 사람들, 그리고 역사의 피해자로 이곳저곳으로 내몰리는 사람들의 형상은 단지 땅과 고향으로부터 뿌리 뽑혀 이탈된 사람들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1980년을 기점으로 호모 사케르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인식시켜주는 소설적 사건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듯하다.
track 2: 상황 속의 개인
이 작품이 1992년의 작품임을 잊지 말자. 1992년은 한국 사회의 분위기가 문화적 트렌드의 차원에서 일대 혁신을 맞이하던 시기였다. 정치적으로 군사정권이 막을 내리기 일보 직전이었고, 서태지가 등장했으며, 압구정동에서는 이미 오렌지족과 낑깡족까지 등장했었다. 80년대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 속에서 개인의 욕망이 자유로이 분출되고, 후기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심화되던 시기였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리라. 이 시기에 미시적이고 내성적인 서사들이 대거 등장했다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다.
홍희담의 〈깃발〉을 위시해 이미 1980년대에 광주 문제를 제기하는 작품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식으로 안전거리를 확보한 상황에서 기회주의적으로 사태의 진실을 추적하는 작품인가?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먼저 광주 문제를 직접적이고 전면적으로 다루지 않으며, 그 사건의 피해자들의 떠도는 삶을 추적하는 정도이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이 소설의 중요한 요소인 ‘김방범’이라는 인물의 성격 때문이다. 이 인물은 6.25의 피해자, 더 정확히는 역사 앞에 무력한 개인으로서의 면모를 갖춘 인물이다. 이 소설은 비루하고 나약한 개인, 소시민을 발굴해 내고 있다.
이 소설이 흥미로운 것은 광주와 그 사건의 피해자를 다루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소시민이라는 인물을 화자로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신세대적 감성의 대표자도 아니며, 90년대적 인물도 아니다. 오늘날의 시점적 독해이긴 하겠지만, 1992년 상황을 고려하면 이 인물은 좀 다르게 읽힌다. 이 화자는 방범일을 하면서 카페 ‘바르셀로나’의 여급일을 하고 있는 미순이라는 여자와 동거중이다. 그렇다면 그의 문제는 무엇인가?
그의 주된 관심사는 미순에게 임신을 시키는 일이다. 화자는 홀어머니로 지내는 그의 어머니에게 손주를 안겨 주기 위해서 미순을 임신시키고 싶어 한다. 그러나 카페 여급이라는 일의 특성상 미순은 임신을 회피하려 한다. 콘돔을 반드시 착용시키는 미순에 맞서 화자는 콘돔에 구멍을 뚫어두는 등 나름의 전략들을 실행한다. 콘돔에 구멍이 난 것을 들키자 화자는 미순에게 수면제를 먹이고는 자신의 정자를 미순에게 심는데 성공한다. 그 일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미순은 자신이 동침한 손님의 아이인줄 알고 화자로부터 떠나간다. 소설의 말미에 미순의 도주를 확인하게 된 화자는 “아니야! 아니야… 그건 내 씨야. 그건 내 애기였다고! 그건 그 개새끼의 씨가 아니었다고…. 씨팔! 세상에 무슨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있어…중략…이런저런 일들이 정말 어쩌지 못하는 일들인가? 씨이팔! 정말 좆같은 세상이야!”라고 한탄조의 절규를 내뱉는다.
화자는 자신의 소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나름의 전략을 짜고 그것을 실행하려 하지만, 그의 한탄이 내뱉듯 상황은 그를 배반하고, 그의 계산을 넘어선다. 여기서 우리는 개별자의 한계성, 상황 앞에서 무력한 하나의 개인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개인은 다소 아둔하고 어리석은 면모를 갖추고 있다. 카페의 여급으로 일하는 애인이 밤늦게 영업을 하고 돌아다니는 데도 그것을 문제 삼지 않는 것은 “이 세상 어느 놈도 나한테 살침을 놓을 수 없다는 거야”라는 미순의 말을 어느 정도 믿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꾀를 써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미순에게 임신을 시키려 하지만, 상황은 엉뚱한 쪽으로 흘러가 버린다. 임신한 미순이 대성의 아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고 다른 남자의 아이인 것으로 생각하며 그를 떠나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단편소설 특유의 극적 반전과 소설적 아이러니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상황을 통제하지도 예측할 수도 없는 개인의 무력성이 더 도드라진다. 전체 상황을 인식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 눈앞에 펼쳐지는 사태에 대응하기에 급급한 사람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일컬어 (30년 전의 클리셰로) ‘소시민’이라고 일컬었다.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도 이들을 쫓아내는 주민들 역시 소시민의 이기심을 반영해 주고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이런 종류의 님비현상 또한 오늘날까지도 지속 반복되는 현상이기도 하다.
힘겹게 살아가는 모녀를 보고는 동정심이 생겨 미나에게 용돈을 주면서 자신의 전화번호를 적어 주기도 하며, 나이도 어린 허경사가 반말을 하면 언짢아하고, 애인의 임신(생식 본능)에 집중하고, 먹고 살아가기 위해서 하루를 살아가는 인물들. 그것이 소시민이라면 오늘 우리들의 삶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에 모골이 송연해진다. 먹고 살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것, 그것을 혁신이니 가치를 창출하느니 라는 말로 포장한다 해서 사태의 진실이 바뀌는 건 아니다. 우린 그렇게 먹고 살(아 남)기에 연연하며 살아가고 있다. 어떤 점에서 이 허탈한 소극은 그들 자체의 생존본능과 모럴 해저드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이들은 돈만 벌어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면 나머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식의 사고를 자신도 모르게 하고 있다. 결말의 파국도 이런 사고의 귀결이라고 볼 수 있다.
“봐요, 대성 씨. 난 대성 씨 꺼야. 대성 씨 말고는 이 세상 어느 놈도 나한테 살침을 놓을 수 없다는 거야. 그래, 좋다. 허벅다리·유방·히프? 이거 좀 만지고 주무르면 어때? 택시 미터기도 아니잖아. 미터기처럼 요금 올라가는 것도 아니야. 또 올라가면 어때? 옆으로 탁 꺾으면 0원이잖아. 없어져 버린다구. 깨끗하게. 그 대신 우리 적금 통장에는 돈이 쌓이지. 집도 사고 땅도 사고, 빌딩도 올릴 수 있는 자금이 마련되잖아. 안 그래?”
화자의 역사 의식 부재, 소시민적 한계로 자기 책략의 함정에 빠진 것이든, 상황은 언제나 예측의 범위 바깥에서 돌출하기 때문에 그것을 운명이나 팔자라고 명명하든 상황과 사건의 우발성 앞에서 개인은 한낱 피해자의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다는 독법은 무력한 개인의 한계와 그렇게 멀리 떨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독해는 문제가 있다. 이쯤 되면 광주라는 역사적 사건의 피해와 김대성이 마주친 생활적 사건의 우발성은 동궤선상에 위치하게 되어 광주는 한낱 역사적 우발성의 사건이 되고, 개인적 사건도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과 상황의 압도로 읽히게 된다.
비극은 상황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맞서지 못하는, 맞설 수조차 없는 개인적이고 소시민적인 의식의 한계에 있다는 것도 더불어 발견된다. 시간 속에서, 역사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일개인으로서 상황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인간의 한계와 상황의 부조리함으로 읽어야 할 것인지, 역사의식의 부재나 운명에 맞서는 차라투스라적 운명애(amor fati)를 그려내지 못했다고 비판해야 할지는 해석자의 몫으로 남겨질 뿐이다.
소설의 전반부에서 카페 여급인 애인의 외도 사실을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애매하게 넘어가고 있는 화자는 〈날개〉의 화자를 연상케 하고, 미순을 잃고 허탈해 하는 모습은 〈운수 좋은 날〉을 떠올리게도 한다. 상황 앞에서 철저히 무력한 개인의 모습은 한국현대사와 동궤를 그리는 소설의 주인공으로 익숙한 형상이며, 그것은 1992년의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우리는 언제나 상황과 역사의 전개 앞에서 늘 개인적 책략을 세워 살아남기를 기획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인가.
track 3: 사건과 반복
그렇다면 이제 오늘의 시간대에서 1992년의 작품을, 1980년대에 배태된 아픔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리고 있는 소설을 읽는다는 건 무슨 의미가 있는가에 대해 답할 차례다. 답은 하나다. 1980년대와 1992년과 지금이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말하자면 동일한 상황이 여전히 되풀이 되고 있다는 데 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나오고, 소셜미디어가 생활패턴을 바꾸고, 사람들의 벌이와 살이가 많이 달라졌다고,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고 떠들지만 세상은 차이 없는 반복이 재생산될 뿐이다. 상황이 바뀌고 테이블 위에 소품들이 바뀌어도 여전히 그 판은 지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해 아래 새 것이 없고, 우리는 여전히 헛바퀴를 도는 삶을 살고 있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이 소설을 읽었다는 말인가? 그럴 수는 없으리라.
광주는 과연 사건인가, 아니면 단지 불행한 사고였는가. 사건이라고 하기에 그 발생 과정이 너무 비극적이고, 사고라고 하기엔 희생자들의 죽음을 단순하게 처리하는 것 같아 불편하다. 그것을 사건으로 생성하기에는 많은 시간이 어정쩡하게 흘러버린 것인가. 그것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일정한 규범적 해석 안에 자리 되었고, 그와 관련한 사후처리도 형식상에서는 마무리된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어쩌면 광주는 여전히 우리들의 인식과 실천에 비식별역으로 남아 있는 그 무엇, 아직 우리의 해석을 기다리고 있는 잠재적 사건은 아닐까. 그것을 사건으로 생성해내는 것은 광주 이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몫일 터이다.
이와 더불어 사건과 사고를 구분하는 것은, 사건 이후를 살아가는 자들의 충실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알랭 바디우에 따르면, 사건이란 그것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살아갈 수 없게 만드는 일이라고도 한다. 바디우는 반대하겠지만, 사건이란 어쩌면 후사건적 충실성에 의해 소급적으로 구성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건이 도래하고 그 사건에 충실하려는 사건후적 충실성의 주체들의 삶이 그 다음에 펼쳐지는 순차적인 문제가 아니다. 사후적인 해석과 그것의 의미를 살려는 주체에 의해 사건이 사후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라면 어찌할텐가.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반복일 것이다. 이미 일어난 일이 또다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동일 계열의 사건들에 일련의 넘버를 붙이거나 각각의 사건에서 동형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일을 지금-여기서 의미로 충만한 사건으로 재구성해내는 일 말이다.
그러므로 반복과 생성은 결코 동떨어진 개념이 아니다. 생성은 반복이라는 개념과 엄밀히 상관적이다. 반복은 새로운 것의 출현과 전혀 대립적이지 않다. 진정으로 새로운 그 무엇은 오직 반복을 통해서만 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복이 반복하는 것은 과거가 사실상 그러했던 방식이 아니라, 과거에 내속하며 과거에 현행화되면서 배반당한 잠재성이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새로운 것의 출현은 과거 자체를 변화시킨다. 즉 그것은 현행적 과거를 소급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우리는 공상과학 소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과거 내에서 현행성과 잠재성 사이의 균형을 소급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에게 반복은 “역전된 기억”이고, 앞을 향한 움직임이고, 오래된 것의 재생산이 아닌 새로운 생산이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은 반복의 운동과 가장 강하게 대조된다. 따라서 반복은 새로운 것의 출현(양태들 중 하나)이다는 것만이 아니다—새로운 것은 오직 반복을 통해서만 출현할 수 있다.1)
한 번 일어났던 것이 여기서 다시 일어나게 하는 것, 그것을 어떤 이들은 혁명이라고 불렀고, 어떤 이는 총괄적 갱신(ricapitolazione)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우리가 과거를 기억하고 새롭게 해석하며 사건을 소급적으로 형성하기에 오늘 우리의 삶은 너무 바쁘고 상황의 벽은 언제나 완고하며, 우리들은 김방범처럼 개인의 안위를 걱정하며 주어진 일들을 처리하기에 너무 급급하다.
1) 슬라보예 지젝/김지훈 외 옮김, 《신체 없는 기관》, 도서출판b, 2006. pp.34~35.
이 호 --------------------------------------------
문학평론가, 1969년 충남 예산 출생, 200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으로 등단.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박사수료. 미국 EAST-WEST CENTER 연구원 역임. 주요논문으로 〈소설의 변화와 이야기의 꿈〉, 〈주체의 자유 혹은 탈주의 언어〉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