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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연구 2013년 가을호, 기획특집 오세영] 반란의 윤리성, 윤리의 반란성: 오세영 초기시의 시사적 위치에 대한 고찰 - 남기혁

신아미디어 2014. 5. 28. 18:18

문예연구』의 기획특집 오세영 시인에 대한 탐구를..... "개인적 실존의 영역에 머물고자 했던 순수하고 자유로운 영혼의 언어에 드리워진 집단의 운명. 시집 『반란하는 빛』, 더 나아가 오세영 시인이 속했던 동시대의 모더니즘 시에 드리워진 시사적인 몫을 이러한 윤리의 영역, 시적 모럴의 영역에서 가늠해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들의 해체적인 언어와 발랄한 이미지, 초현실주의적 기법 역시 이러한 시적 모럴과 관련지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새로운 논의의 몫으로 남겨둔다."

 

 

 

 

 

 

 

 반란의 윤리성, 윤리의 반란성          / 남기혁 
 - 오세영 초기시의 시사적 위치에 대한 고찰

 

 

1. 들어가는 말

   오세영은 역설의 구사에 능한 시인이다. 주지하듯이 그의 시적 언어는 주로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모순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시에서 삶과 죽음, 부재와 현존, 비움과 채움, 내용과 형식 사이에는 긴장과 대립이 상존한다. 그는 이를 대립적 이미지나 모티브로 설정한 후 하나의 문맥 속에 통합하여 새로운 가치,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려 한다. 그런 까닭에 오세영의 역설적 언어는 인간 존재의 숙명적 한계 앞에서 절망하면서도 그것을 초월하려는 화자의 강한 열망과 의지를 그려내게 되는 것이다.
   오세영 시인은 오십 년 가까운 시작 활동 기간 동안  이십여 권의 시집을 상재한 바 있다. 이 시집들에 수록된 수많은 시편들은 시기에 따라 기법이나 정신의 측면에서 매우 다채로운 변화 양상을 보여준다. 그의 시편 중에는 생로병사에 신음하거나 사랑의 상실이나 절대적 대상의 부재로 인해 절망하는 인간, 또는 인간을 그러한 비극적 운명 속에 살아가게 하는 어떤 외적(시대적, 문명적)인 폭력이나 부조리한 운명의 힘에 대한 냉혹한 응시가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경험을 뛰어넘어 어떤 이상적인 정신(혹은 영혼)의 영역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낭만적 초월에 대한 강한 열망도 함께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오세영 시의 변모 과정을 시기에 따라 살펴보면1), 그의 시적 언어는 대체로 철학적 인식과 시적 상상력 사이에서 운동을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수사학적 용어로 표현하자면 은유와 환유 사이를 끊임없이 왕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2) 이런 맥락에서 오세영 시인의 시편에 나타난 ‘역설’의 수사학은 자기동일성에의 열망을 품은 비동일자, 혹은 비동일자의 숙명을 품은 동일자의 내적 한계를 폭로하는 데 바쳐진 제의적 언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시사詩史 혹은 예술사의 전개를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 구심적인 것과 원심적인 것의 교체·반복으로 설명하곤 한다. 이러한 시사 전개의 원리는 한 예술적 영혼의 자기 변모 과정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오세영 시인은 역설의 정신을 중심으로 이러한 시사 전개의 원리를 개인적 차원에서 체현하고 있다는 말이다. 
   오세영 시인이 질서의 파괴와 재구축, 일탈과 회귀라는 상반된 문학적 충동을 하나의 문맥에 수용하려는 경향은 비교적 초기의 시부터 그 실체를 엿볼 수 있다. 이 글은 오세영 시인의 초기시를 대표하는 첫 시집 『반란하는 빛』(1970)에 수록된 작품들을 대상으로, 그의 역설의 정신이 어떤 방식으로 시적 저항의 의미를 형성하고 시적 주체의 정체성 정립에 기여하는가를 밝히기 위한 시론試論의 성격을 지닌다.


2. 언어와 이미지의 해체-『반란하는 빛』이 놓인 자리

   1980년 전후부터 본격화된 오세영의 시적 변모 과정이나 시단에서의 위치를 고려할 때, 오세영 시인의 문학적 출발점에 놓인 시집 『반란하는 빛』의 목소리는 매우 낯선 것이라고 평가된다. 오세영 시의 본령은 동양적·불교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순수(혹은 전통) 서정시의 세계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시집 『반란하는 빛』이 보여준 모더니스트로서의 언어 의식이나 세계관은 오세영 시의 본령과 가장 동떨어진 위치에 있는 것이라고 할 만하다. 실제로 오세영 시인은 『반란하는 빛』의 복간(문학동네, 1997)에 즈음하여, 이 시집이 “모더니스트로서의 상상력과 언어감각을 충분히 습득할 수 있었다.”고 자평하면서 “문학 수업 중 거쳐야 할 하나의 과정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다.”고 고백한 바 있다. “건강하고 철학적이고 감동적인 시를 쓰고자 노력해”왔던 오세영 시인의 이후 시적 실천에 비추어보자면 이 시집에 나타난 ‘무의미’ 지향성, 혹은 언어와 이미지의 극단적인 해체 경향은 당혹스럽기 짝이 없다. 시단 데뷔 시절 그를 이런 언어와 이미지 해체로 이끈 동인動人은 ≪현대시≫ 동인을 비롯하여 당대 시단을 지배하고 있던 모더니즘적 경향의 시쓰기에서 찾을 수 있다.

 

   푸르게 흘러내린
   하늘이
   향 좋은 밀랍으로 고일 때,

 

   등나무를 타고 오르던 시간 위의
   밤에 지던 꽃잎들.
   거기 부서지던 별빛의 무게
   반짝이는 저 사랑의 금속성.

 

   문법의 가지에서 인력을
   벗으면서 나는 새.
   낙엽을 딛고 어휘를 따 모으던
   원정園丁은, 황혼을 어깨에 진 채
   은하 건너 멀리 떠났다.

 

   창백한 날들이 얼굴을 묻으며
   머리칼을 쓰다듬던 거울 앞에서
   검은 드레스를 끌고 가는
   여인의 뒷모습, 창가에 속삭이는
   저 고요의 뒷모습.

 

   밟히는 옷깃에 흐르는 바람은
   빛보다 푸른 불빛을 흐트러놓으면서
   램프와 흔들리는 이마 위에

   밀물처럼 뜨거운 목숨을 밀어
   올린다.

─ 「밤하늘」 전문

 

   오세영의 초기시에서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이미지는 하강과 소멸, 죽음과 부재의 이미지이다. 이 작품의 지배적 심상을 형성하는 ‘흘러내린’, ‘지던’, ‘부서지던’, ‘묻으며’, ‘흩트려 놓으면서’ 등의 시어 역시 하강과 소멸, 죽음의 의미로 수렴이 된다. 화자는 ‘밤’이란 시간이 주는 무거운 침묵을 배경으로 하강과 소멸, 죽음의 이미지를 상승과 생성의 이미지에 대립시킨다. 하지만 그 대립은 이내 소멸되고 만다. 그 대신 한 마리 ‘새’가 대지의 속박을 표상하는 ‘문법’의 ‘인력’을 떨쳐내고 밤하늘을 날아오르고, ‘원정’은 ‘어휘’를 따 모으다 이제는 ‘황혼을 어깨에 진 채/은하 건너 멀리’ 떠나버린다. 하지만 그들이 어떤 새로운 의미에 맞닿게 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언어로부터 일탈하려는 한 마리 ‘새’와 ‘원정’의 움직임을 모더니스트로서 시인 자신의 그것이라고 해석한다면, 결국 언어의 견고한 틀이나 어휘의 일상적 의미에서 벗어나려는 시인의 노력이 어떤 의미 있는 결실을 맺지는 못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사실 이 모든 사태를 바라보는 단일한 시선의 주체가 부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보는 주체로서 화자의 시선에 포착된 모든 사물들은 소멸되어 버리고, 이미지들은 분산되고 있으며, 소멸하는 대상들을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은 방향성을 상실한다. 대상을 통어하는 원근법적 시선이 확보되지 않은 것, 혹은 그러한 모든 사태를 굽어보는 어떤 절대적 시선이 부재하는 것이 이 모든 사태의 궁극적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이 작품의 해체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이 작품에 나타난 해체적 성격은 결코 돌출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1960년대 모더니즘 시, 특히 『현대시』동인들의 시적 문법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오세영 초기시의 해체적 경향은 이런 시사적 맥락 속에서 도출된 것이다.
   일상 언어의 문법에서 일탈하고,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끊임없는 차연差延을 지향하는 시적 문법에서는 극단적으로 시간성의 비전이 모호해지고 시적 경험의 영역이 축소될 수밖에 없다. 등단 후 2년여의 시간이 흐른 후 발표한 「날개」,「풍금」은 앞의 「밤하늘」과 핵심 모티브나 이미지(‘새’, ‘문법’, ‘램프’ 등)가 유사하다. 하지만 이제 오세영 시인은 데뷔작이 지녔던 시적 한계를 상당 부분 극복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그 변화의 핵심에는 대상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이미지를 통어하는 주체로서 ‘나’가 작품의 전면에 부각된 점을 들 수 있다. 이 ‘나’로 인해 오세영의 초기시에서 ‘램프’는 새로운 상징성을 부여받게 된다.

 

   날카로운 바람을 몰고, 한 소절의 아침을 건너
   햇살이 파도치는 바다에서
   인력을 끊고 솟아오른 한 개의 램프.

 

   드디어 타버린 육체의 아픔 위에
   부리로 대낮을 깨면
   내가 쏘아올린 화살은 어느 때
   내 가슴에 와 꽂힌다. 아아,
   빛을 털고 일어서는 한 마리의 새.

─ 「날개」 부분

 

   이 작품의 핵심 소재들은 모두 시쓰기에 대한 은유로 볼 수 있다. ‘파열하는 꽃잎’과 ‘시간의 폭동’을 뚫고 “문법의 가지를 차고”(3연) 날아오르는 ‘새’, 그 새를 향해 화자가 쏘아올린 ‘화살’은 모두 화자가 지니고 있는 시쓰기의 자의식과 관련이 있다. 화자는 자신이 쏘아올린 그 화살이 결국 ‘내 가슴에’ 꽂히게 되는 것을 확인하면서 비로소  그 ‘새’가 “빛을 털고 일어서는” 희유의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여기서 ‘램프’(5연)는 ‘시인’의 자의식을 품은 화자의 내면의식을 비추는 ‘빛’의 상징으로 화한다. 다른 말로 하면 ‘램프’는 화자의 내면의 빛이자 눈인 것이다. 오세영 시인은 이 내면의 빛 혹은 내면의 눈을 절대화함으로써 시인으로서 정체성을 확고히 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새로운 세대의 시인으로서의 자기선언인 셈이다. 그는 이 선언을 통해 시적인 언어와 비시적인 현실 사이에 확고한 경계선을 세우게 된다. 그것은 시를 통해서 비시적인 현실과 대립되는 새로운 삶의 비전과 모럴을 확립하겠다는 의지, 다른 말로 하면 새로운 시적 모럴의 정립에 대한 의지로 이어진다. 이는 오세영의 초기시가 추구했던 ‘반란’의 정신이 나아갈 방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람이여」(1969.4.)에서 화자의 꿈꾸는 비시적 현실에 대한 ‘모반’은 “길고 먼 인식의 눈 내리는 길목에서/ 내 황망히 채찍을 들 때,/몇 개의 모반과 꿈틀대는 파도”, “언어가 부서지는 해안”에 출렁이는 달빛, ‘사나운 폭풍’의 모습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시쓰기의 본질로서 이미지를 길어 올리는 일, 다른 말로 하면 일상적 사물들의 현상 저 너머에 있는 이데아에 대한 ‘인식’에 도달하기 위해 “영상의 그늘 위를 나는 새”(「투망」에서)를 향해 ‘투망’을 하는 행위이자 시를 쓰는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행위이다. 견고한 이미지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이 ‘스피노자’(「소등」에서)적인 회의의 시선은 견고한 것처럼 보이는 비시적 현실이 사실은 참다운 현실이 아니라는 판단에 기초해 있다.

 

   잠든 신의 머리칼을 바람이 달려들어
   하얗게 씻어내릴 때
   녹음은 숲 속에서 꿈틀거렸다.
   보라, 풀밭에 기어가는 몇 줄의
   시간. 발등을 물고 쫓아오는 뱀을,

 

   내가 맨발을 엷은 꿈에 딛고
   안개와 불빛 속에 옷을 벗고 있을 때
   말하라, 사랑이 은유를 타고 왔던가.

  

   지금 내가 던진 투망, 회의에 번득이는
   피를 쏟으며
   거울 위에 꺾인 꽃과 파도.

 

   여름은 대낮보다 밝은 강을 건너서
   뜨겁게 어둠을 열고 있다.

─ 「포구의 닻줄」 부분

 

   화자가 던지는 ‘투망’(마지막 연)은 “모음과 자음으로 짜 올린”(2연) 언어를 가리킨다. 언어 자체에 대한 ‘회의’, 대상을 포획할 ‘이미지’에 대한 회의로 인해 존재는 ‘피’를 흘린다. 하지만 이 ‘피’로 인해 “꽃과 파도”는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거울’ 위에 비추게 되고, ‘시간’(혹은 ‘여름’)은 구체적인 형상을 얻게 된다. “뜨겁게 어둠을 열고” 일상의 제국 너머에 새로운 언어와 이미지로 건설하는 일, 혹은 이러한 시쓰기의 자의식을 견고하게 지켜내는 일은 화자에겐 새로운 시적 모럴을 구축하는 일이라 하겠다. 시집 『반란하는 빛』이 놓인 문학사적인 자리는 바로 1960년대 모더니스트들이 씨름했던 그 언어와 이미지의 문제를 재확인하면서 새로운 세대의 시쓰기로서 시적 모럴을 구축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동시대의 현실에 대한 문명사적인 비판의식에 연결되어 있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3. 내면의 ‘눈’과 시선의 문제

 

   우리들에게 주어진 몇 가지
   사실들이 있다.
   계집에 성실하고 돈을 벌어들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에 탐닉한다.

 

   내 몸에 섞이는 이 계집의 피를 위하여
   굶주린 어린것을 위하여

 

   불면을 지키는 의식마저
   후욱 불을 끄고,

 

   공화국의 조간 위에 쓰레기로 뒹군다.
   광장을 더럽히는 이 정신들이 버린 휴지들.
   성명서와 깡통과 흩어진 수사법들 글쎄,
   신문팔이가 자유를 팔면서 달려간다 이놈, 이 더러운
   놈.

 

   사실을 바라보는 눈이 어찌하여 이다지도
   떳떳지 못한가, 물질과 나를 바라보는
   눈이여,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는 이 외로움
   혹은 정신들에 대하여 말하라,

 

   살이 찌고 분별없이 지껄이고,
   상업에 몰두하는 사나이들,
   아주 헐값이라고 투덜대면서
   팔려간 이 시대에 침을 뱉는다.

 

   내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믿음은 친구를 부를 수 있을 것인가.
   허나 기다리고 배신하듯,
   시대는 결국 계집을 버릴 것이다.
   어리석은 사랑도 잠들 것이다.

─ 「시인들」 전문

 

   「시인들」은 새로운 세대가 지향한 시쓰기의 자의식을 전형적으로 보여준 또 다른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시인이 바라보는 세계의 풍경은 음울하다. ‘계집’과 ‘돈’과 ‘눈에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으로 표상되는 타락한 가치, 일상의 질서는 시인이면 마땅히 지켜야 할 “불면을 지키는 의식”마저 저버리게 한다. 화자는 이를 ‘사실’의 세계로 그려낸다. “광장을 더럽히는 정신들이 버린 휴지들”이 넘쳐나고 “성명서와 깡통과 흩어진 수사법들”이 진정한 ‘자유’를 훼손하는 시대. 이 극단적인 언어의 타락과 가치의 혼란 속에서 과연 어떻게 시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시의 화자는 여기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는” 외로움과 정신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화자는 ‘사실’이 지배하는 ‘시대’의 ‘공화국’에서 결국 ‘배신’을 당할 운명에 처해 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결국 배신을 당할 것임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외로움’과 ‘정신’에 대한 아이러니한 믿음이 없으면 한 줄의 시도 써내려갈 수 없다는 사실을 직감한다. 이제 오세영의 시와 언어는 이런 ‘믿음’을 향해 내기를 걸어야 한다. 그것은 부재 속에 현존하는 ‘잠든 신’(「포구의 닻줄」)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종교적 ‘신앙’ 같은, 시에 대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심미적 이성의 길이다. 자신의 내면에 간직한 ‘램프’의 불빛을 지켜내기 위해, 그 불빛만을 바라보면서 시대의 격랑을 헤쳐 나가는 것. 『반란하는 빛』의 제1부에 수록된 일곱 편의 시는 이 ‘빛’의 반란성, 내면적 모럴의 윤리적 지향성을 살펴보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우선 「반란」이란 작품을 살펴보자.

 

   갈릴리 내해內海에 잠드는 바람
   갈릴리 내해에 눈은 내리고,
   침울한 내장에 세계는 갈앉고,
   차고 매운 발자국들이 수런대면서
   황폐한 의식 위로 몰려간다.
   모든 것은 닫히고 나는 서 있고
   아득한 곳에서 기계가 울고 있다.
   나는 꿈꾼다.
   떨리는 귀에 들려오는 복음을,
   깨어진 공간 위에 식어내린 햇빛을,
   엷은 꿈들 위에 눈은 내리고
   나는 소리치면서
   어리석은 신앙으로 얼고 있다.

─ 「반란」 부분

 

   이 작품에서 화자가 바라보는 세계의 풍경 역시 음울하기 짝이 없다. ‘바람’이 잠들고 ‘눈’이 내리고 ‘차고 매운 발자국들’만이 수런대는 ‘갈릴리 내해’의 풍경은 예수의 죽음과 관련한 기독교적 모티브를 끌어들인 것으로 보이는데, 화자는 이 ‘갈릴리 내해’의 풍경을 통해 자신의 시대를 지배하는 “황량한 의식”을 그려낸다. 여기서 화자는 두 개의 소리 이미지, 즉 ‘기계’의 소음과 기독교적인 ‘복음’을 대립시키는 가운데 그 구원의 목소리를 향한 “어리석은 신앙”을 견고하게 지켜내려 한다. ‘얼어붙은 시간’ 속에서도 갈구하는 한 줄기 ‘햇빛’과 ‘엷은 꿈들’을 지켜낸다는 것은 견고한 일상의 질서 편에서 보자면 하나의 ‘반란’에 해당된다. 사실 오세영 시인에게 있어서 시란, 그리고 시쓰기란 새로운 삶의 지평인 ‘시적 윤리’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반란’의 행위에 다름 아니다. 실제로 이 작품에서 견고한 ‘기계’로 화한 ‘겨울’ 같은 현실을 살아가는 화자가 갈망하는 ‘빛’은 이제 모종의 ‘반란’에 대한 상징으로 화하고 있다. 「불·1」에서 「불·6」으로 이어지는 연작시는 ‘반란’의 다양한 양상들에 대한 변주로 볼 수 있다.
   사실 모든 ‘반란’은 불온하다. 『반란하는 빛』의 제1부에 수록된 여섯 편의 연작시는 각각  불온한 ‘빛’의 여섯 가지 양상을 탐색하고 있다. 우선, 「불·1」에서 화자는 ‘불’의 파괴적 속성에 주목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십 세기”의 불은 “알코올”의 불이자 “물질이 흘린/피”로서 현대 기계 문명에 대한 화자의 묵시록적 비전과 연결된다. 하지만 ‘불’은 ‘죽음’ 혹은 파괴(폐허)의 속성만 지닌 것은 아니다. 화자는 “불타는 서울의 술집”에 대립되는 또 다른 ‘빛’으로서, 우리가 가야할 길을 비춰주는 또 다른 ‘창조의 불빛’으로서 “타버린 정신의 재”를 맞세운다. 이 타버린 정신이야말로 “인간의 숲 속에서” 울고 있을 “아흔아홉 마리의 이리”가 나아갈 길을 밝혀줄 유일한 창조의 불빛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불·1」이 찾아낸 ‘창조의 불빛’은 묵시록적인 비전을 넘어설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반란’의 윤리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불·2」에서 화자는 “스물아홉의 肉의 밑바닥”, “박제된 유년의 깊은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알코올에 적신” 자신의 모습과 대면한다. 자신의 과거를 “잊어버려”라고 부추기는 누군가의 속삭임을 떨쳐내고, 화자는 마침내 “심장에서/우는 벌레, 영혼의 살 한 점”을 들춰낸다. ‘에테르’(마취약)에 취해 여의사에게 빼앗긴 “내 눈의 불” 즉 육신의 불 대신에 내면 의식 저 깊은 심층에 숨어 있던 영혼의 불을 되살려내는 것이다. 이 영혼의 ‘불’이야말로 어떤 마취약이나 메스로도 그 생명을 앗아갈 수 없는 절대적인 창조(혹은 저항)의 불빛을 상징한다고 하겠다. 한편, 「불」 연작시 중에서 가장 문제적인 작품은 「불·3」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화자는 자아의 구축과 해체, 그리고 재구축 등의 일련의 과정을 그려내는 방식으로 시적 주체의 정립 문제를 제기한다. 

 

   불빛을 바라보면서 우리들은
   달려나갔다.
   전라도의 보리밭이 보이고, 황폐한 과거가
   몇 개로 구획되었다.
   먼 황인종의 마을에서 개가 짖고
   칸델라의 불빛이 경험으로 풀려나가고
   지나온 십구 세기가 토막토막 잘려
   자막字幕에 걸리고 있다.
   렌즈를 열고 흰옷의 그가 나온다.
   전라도 사투리로 판소리를 부르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고, 끝끝내
   심청이를 불렀다.
   도무지 갈채를 모르는 사람들의 눈에서
   불이 꺼지고, 헛간에 켜둔 램프가
   의식을 태운다.
   낡아가는 한 시대의 필름.
   어리석은 사내에게 몸을 맡긴 계집은
   밤새워 지나가는 트럭 소리를 듣고 졸린 눈의
   수학數學을 보았다, 결국
   벗을 것인가 이 흰옷, 정지된 자막에
   걸린 채 나는 벌거숭이 몸을 하고
   손에 박힌 못들을 하나씩 뽑았다.
   흔들리는 전라도의 논둑길
   그 불빛 속을 뛰었다.

─ 「불·3」 전문

 

   이 작품에는 두 개의 ‘불빛’이 선명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하나는 계몽의 ‘불빛’이고 다른 하나는 ‘헛간에 켜둔 램프’가 표상하는 의식의 불빛이다. 계몽의 불빛은 ‘우리들’의 질주를 가능케 하는 정신적 지향점인 근대의 표상이란 점에서 우리가 익히 아닌 ‘빛’의 상징과 다르지 않다. 화자는 근대의 시각 문화를 대표하는 영화 ‘자막’(스크린)에 비추어지는 영상 즉 빛의 현상 원리에 비유하여, 계몽의 불빛을 보고 달려온 ‘우리’들의 자화상을 그려낸다. 화자의 자화상에서 ‘우리’는 ‘십구 세기’적인 것과 이십 세기적인 것 사이에서 분열을 일으키고 있다. ‘전라도의 보리밭’과 ‘황폐한 과거’, ‘황인종의 마을’, ‘돌아가신 어머니’와 ‘심청이’가 바로 ‘십구 세기’적인 것, 그러니까 계몽의 불빛에 의해 청산된, 혹은 청산된 운명에 봉착한 전근대를 표상한다. ‘트럭 소리’와 ‘수학’으로 표상되는 근대의 불빛에 비춰진 ‘우리’의 과거, ‘벌거숭이 몸’을 하고 자막에 비추어진 화자의 몰골 사나운 자화상을 벗어던지기 위해서는 새로운 ‘불빛’을 맞세울 필요가 있다. 새로운 세기를 향한 계몽의 열정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눈” 대신에 화자의, ‘우리들’의 “헛간에 켜둔 램프”로 의식을 태우는 것이 그것이다.
   이십 세기적 계몽마저 파탄이 난 그 지점에서 화자는 새로운 세대인 ‘우리’의 질주를 가능케 할 새로운 ‘빛’으로서 내면의 정념, 혹은 새로운 창조의 정신을 앞세우고 있는 것이다. 이 창조의 불빛, 반란의 불빛이 있음으로 해서 화자는, 그리고 ‘우리들’은 “손에 박힌 못들을 하나씩” 뽑아내고 저 “흔들리는 전라도의 논둑길”을 향해 내달릴 가능성을 얻는다. 계몽이 끝난 자리에서, 그 계몽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계몽을 향한 길. 그것은 ‘트럭 소리’나 ‘수학’으로 대변되는 과학적 이성의 길이 아니라 자율적 예술의 이념으로 밑바탕을 이루는 심미적 이성의 길이다. ‘전라도 논둑길’을 비추는 그 ‘불빛’이 ‘반란’의 메타포와 연결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불·4」가 그려낸 ‘불빛’ 역시 위태롭기는 마찬가지이다. 이 시집의 발문을 쓴 박목월 시인은 이를 두고 ‘악마적인 불’이라 평한 바 있다. “마른 번개가 치는” 정유공장의 그 위태로운 장면, 그 장면 속에서 찬연히 피어나는 ‘장미’가 “한 줌의 불”이 되어 바람에 흔들린다. 이 불은 자칫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 수 있는 엄청난 파괴의 불씨를 품고 있다. 하지만 시적 화자는 “축축이 젖은 정신”이 “석유에 젖은 손으로 성냥을” 긋는 이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땅에 떨어진 불씨를”를 입에 물고 전주에 앉는 한 마리 새를 떠올린다. 이 ‘새’로 인해 파괴의 ‘불’은 새로운 창조의 ‘불’(혹은 ‘전기’)로 전환된다. 파괴와 창조의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우리를 매혹시키는 악마적인 ‘불빛’ 앞에서 화자는 일종의 묵시록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묵시록적 비전이 저항의 모럴과 연결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불·5」에서 화자는 ‘불’과 ‘빛’의 상징을 통해 파괴와 저항의 모티브를 극단까지 몰고 간다.  ‘화약’의 폭발성과 파괴성을 앞세워 불길함을 자아내고, 이 불길함을 ‘셔먼 호의 굴뚝을 향한 총’과 연결시켜 ‘외세에 대한 민족의 저항’이란 의미를 이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칼’로 표상되는 근대적 이성(‘판단’) 앞에서 그동안 “동양의 구슬들”을 묶어주었던 ‘줄’들이 완전히 끊어져버린 상황이다. 이는 과거의 모든 인습적 질서나 인륜적 가치가 붕괴될 위기에 봉착한 상황을 암시한다. 하지만 화자는 포기하지 않고 “셔먼 호의 굴뚝을 향해 총을” 겨누는 방식으로 자신의 실존을 선택한다. 이러한 선택이 환기하는 팽팽한 긴장. 그것은 화자가 더 이상 개인적 모럴과 집단의 운명을 분리시키지 않고 통합으로 이끌어냄으로써 새로운 저항의 주체로 거듭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불·6」에 그려진 ‘아궁이’ 속의 ‘불’은 모든 창조와 파괴의 원천인 ‘성’의 모티브에 연결된다. 이 작품에서 파괴해야 할 대상은 “까만 눈이 내리는 저탄장”, “발 없는 말들이 눈길을 걷”고 있는 도시로 그려진 근대적인 삶의 공간이다. 이 죽음으로 가득 찬 그로테스크한 공간을 돌아다니는 “외로운 사나이”는 “저 독의 입맞춤”으로부터 어떻게 자신을 치유해낼 수 있을 것인가? 화자는 본래적 생명의 표상인 ‘성’마저 얼게 만든 저 근대적 이성 대신에 “라이터를 켜들고/ 층계를 하나씩 뛰어내린다.” 그것은 저 깊은 무의식 속에 잠재된 성적 리비도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화자는 이성에 의해 억눌린 저 본연의 ‘성’적 리비도를 되살려내려 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적 리비도가 표상하는 ‘불’ 역시 불온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 ‘불’은 도시의 모든 것을 불태우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저탄장을 빠져나온 ‘열차’가 모든 것이 불타 없어진 ‘빈 도시’를 향해 들어오는 것은 성적 리비도가 지닌 묵시록적인 파괴력과 새로운 생명 창조의 힘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4. 시적 모럴의 토대로서의 ‘사랑’의 윤리성

   시집 『반란하는 빛』의 제1부에 수록된 ‘빛’ 연작 시편들은 시인이 대결했던 산업화 시기의 다양한 억압적 양상들에 대한 정신적 ‘반란’ 혹은 저항의 의미로 수렴된다. 물론 오세영 시인이 도달한 ‘반란’(저항)은 몸의 그것이 아니라 내면에 타오르는 정신의 그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내면적 저항을 실천하는 방식은 관습적인 언어와 근대적 일상의 질서에 맞서 새로운 문법을 앞세우는 것, 낡은 방식의 이미지 조합과 상징에서 벗어나 해체적인 방식으로 언어의 질서를 새롭게 구축하는 것이었다. 이런 심미적 실천의 방식은 상당히 탈정치적이고 탈윤리적인 것이다. 하지만 오세영 시인은 탈정치적인 것의 정치성 혹은 탈윤리적인 것의 윤리성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임으로써 시적 모럴을 완성한다. 다음 세 작품에 나타난 시대성과 한 실존적 인간의 내면의 조우를 통해 오세영 시인이 추구했던 시적 모럴에 한 걸음 다가서 보자.

 

   ① 빗장이 들먹거리고 엷은 불이 찢어지고
   맨발로 어머니가 뛰어나간다.
   황량한 자유의 뜰이 보인다.
   아시아의 뜰을 해병대가 달린다.
   한 사내의 깊고 음침한 오열,
   합중국의 해병대가 달린다.

 

   살려줘요 나는 닷새를 굶주리고
   밤낮을 뛰어왔어요,
   세퍼드가 한 마리 사납게 짖는다.

 

   세퍼드가 문밖에서 행운을 물어
   뜯는다. 쫓기는 친구의 발과,
   차고 여윈 문명의 이마.

─ 「아시아」 에서

 

   ② 적막한 언어의 얼굴 위에서 눈동자는 빛난다.

 

   나로 하여 가엽게 여기는 것들,
   서구인의 한 센텐스 자유와 인민의 빵과
   망설임. 저 보이지 않는 칼,
   죽어간 환경 위에서도 법은 그물을 치고
   추상처럼 쓸쓸히 그들은 누워 있다.

 

   어찌하여 너는 주저하는가
   쳐라, 배신의 싸늘한 목덜미가 보일 때
   쳐라, 식탁 위에 떨어지는 요한의 머리,
   동양의 탁월한 식견 위에서 고려인의 깊은 눈빛 속에서
   그러나 계집은 신앙을 잠재운다.

─ 「저녁 식탁」에서

 

   ③ 폭발하는 박수 속에 십이월
   그믐의 달이 찢긴다.
   십이월 그믐에 경험한 자유의 그림자.

 

   찢어진 달빛 속을 도둑이 뛴다.
   진실의 보드라운 살결이 잡힌다.
   사건이 죽고, 행위가 죽고
   쫓기는 피의자의 아픔이 죽는다.

 

   적막한 두 개의 눈동자를 빠져나와서
   보라, 이 겨울, 폭발하는 박수 속을
   도둑이 뛰고 있다.
   십이월 그믐에 경험한 자유의 그림자.

─ 「극장에서」에서

 

   「아시아」는 서구의 현대문명과 맞닥뜨린 “노후한 아시아”의 비극적 운명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화자는 ‘합중국의 해병대’가 표상하는 20세기의 세계사적 질서 앞에서 전율할 수밖에 없었던 “한 사내의 깊고 음침한 오열”을 통해, 아시아인에 주어진 ‘황량한 자유’란 진정한 의미의 자유에는 미달하는 것임을 고발하고 있다. 물론 이런 고발이 어떤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직접적으로 연결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화자는 “차고 여윈 문명”에 암시된 바와 같이 일종의 문명사적 의식에 바탕을 둔 채 아시아가 직면한 정체성의 위기에 대해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창작된 1970년 무렵의 국제 정세나 한국 현실을 오버랩하면, “닷새를 굶주리고/밤낮을 뛰어”와 “살려줘요”라고 “소리 지르고”(마지막 연) 있는 한 사내의 절규는 단순히 한 실존적 인간의 내면적 고뇌 이상의 정치적 의미를 띤다.
   「저녁 식탁」은 ‘아시아’ 청년의 내면적 고뇌와 저항을 “적막한 언어의 얼굴 위에서” 빛나는 ‘눈동자’의 상징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그의 눈동자는 모두가 외면하는 “모순의 끈”을 부여잡는 “회의”(마지막 연)의 시선을 가리키는 동시에, “동양의 탁월한 식견”과 “고려인의 깊은 눈빛”에 숨겨 있는 ‘신앙’의 시선을 가리킨다. 이 시선은 “가엽게 여기는 것”을 향해 있다. ‘자유’와 ‘빵’을 동시에 갈망하는 ‘인민’을 향해 있는 권력의 “저 보이지 않는 칼” 앞에서, 그리고 ‘법’의 그물을 통해 인민이 ‘추상’으로 전락할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 속에서, 화자의 ‘눈동자’는 유독 빛을 발한다. 이렇게 강렬한 눈빛을 뿜어내는 사랑의 ‘눈’은 타자에 대한 연민에 기초한 것이지만, 그 연민을 촉발한 것은 바로 타자들을 그런 상황으로 내몬 현실에 대한 분노와 저항심이라 하겠다. 이는 같은 시기 발표된 「도둑」의 “저 두려움에 떠는 자유 혹은 떨리는 손”, “오직 깜깜한/ 이 밤을 위하여//너의 왼손에 번뜩이는 살의” 같은 메타포와 동일한 적극적 저항 혹은 반란의 의미망을 형성한다.
   「극장에서」에도 이러한 ‘도둑’의 메타포, 그러니까 “가장 올바르게 죄를 훔”(「도둑」에서)치는 저항적 주체의 형상이 등장한다. 이 작품에서 화자는 “비겁한 자유가 숲을 이루는 기나긴/이십 세기의 밤”(3연)과 “십이월 그믐에 경험한 자유의 그림자”(4연)를 대립시켜, 죽음을 불사하고 “찢어진 달빛 속을” 질주하는 ‘도둑’이야말로 “진실의 보드라운 살결”로 비유되는 참다운 자유에 다다를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12월 그믐”의 그 “음산한 시간”을 전복시키는 도둑의 질주는 한 실존적 인간이 갈망하는 정신적 자유의 최고치를 향한 것이지만, 여기엔 정신적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 당대의 정치적 현실에 대한 우회적 비판의식이 전제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결국 『반란하는 빛』이 그려낸 ‘반란’은 공존재인 ‘이웃’에 대한 사랑을 통해 보다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받는다. 가령 「자동차」는 ‘기계’로 표상되는 도시적인 삶의 현실 속에서, ‘참다운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탐색하고 있다. 여기서 화자가 말하는 ‘사랑’은 “찌푸린 날씨”와 “진리보다 어둔 한낮”으로 암시된 시대의 절망 앞에서 “근심하는 얼굴”들을 향해 있다. 이러한 타자의 얼굴을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에서 ‘사랑’은 시작된다. 레비나스적인 의미에서 타자(성)의 윤리학이 실천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반란하는 빛』 여러 시편에 등장하는 ‘짐승’의 외로움과 흐느낌은 ‘도시’로 표상되는 근대적인 삶의 질서의 주변부로 밀려난 타자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에서 기인한다. 「열차」에 나타난 사랑 역시 이와 동일하다.

 

   이웃들의 넓고 좁은 어깨를 비끼면서,
   달려드는 눈보라도 헤치면서
   떠나가고 있었다. 이 겨울,
   저 욕망의 어둔 이마들.

 

   불이 꺼진 역두에 눈이 내리고 사랑이 조용히
   눈을 들고 있을 때,

 

   이마에 넘치는 반란의 머리칼,
   나는 굶주린 표범, 빈 가방을 들고
   달빛 푸른 기슭을 헤매고 있다.

 

   떠나가라. 흐느끼는 폭풍, 싱싱한 입맞춤은 두고
   밤새도록 타버린 바람의 오열.
   떠나가라, 어둡고 끈질긴 세계, 비에 씻기는 더러운
   저 꽃과 욕망만은 두고

 

   동족에 붙들리면서, 내가 흔들리는 갈대를
   꺾고 있을 때 친구여,
   회상의 차가운 달빛은 네 목을 껴안고
   밤새도록 울었다.

─ 「열차」에서

 

   이 작품에서 화자는 열차가 떠난 ‘불꺼진 역두’에 홀로 서 있다. “욕망의 어둔 이마들”만 번득이는 비정한 ‘겨울’의 도시에서 “이웃들의 넓고 좁은 어깨를 비끼면서” 열차는 떠나가고, 이제 눈 내리는 ‘불꺼진 역두’에서 화자는 진정한 의미의 ‘사랑’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그의 ‘사랑’은 도시의 헛된 욕망과는 명백하게 거리를 두고 있다. 이는 화자의 “이마에 넘치는 반란의 머리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화자는 ‘굶주린 표범’처럼 도시를 헤매는 존재이다. 하지만 그의 굶주림은 “어둡고 끈질긴 세계”의 더러운 욕망(3연)과의 결별을 통해서만 벗어날 수 있다. ‘동족’에 대한,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다른 말로 하면 타자의 얼굴을 내면 깊숙이 끌어안음으로써 비로소 채워질 수 있는 갈망인 것이다.


5. 나오면서

   시적 담론을 정치적, 윤리적 층위에서 읽어내는 것과 그것이 실제로 정치적, 윤리적 담론을 지향하고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이 글은 오세영의 첫 시집 『반란하는 빛』의 시사적 위치를 점검하기 위해, 그의 시편들을 의도적으로 정치적, 윤리적 층위로 전환시켜 살펴보고자 했다. 사실 이 시집에서 시인이 ‘자유’와 ‘사랑’을 동시대의 정치 현실과 직접 연결시켜 사유한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것은 시인 스스로 추구했던 시(예술)의 자율성이란 이념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시집에서 시인이 탐색했던 ‘자유’와 ‘사랑’은 4·19 이후의 사회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구체적으로 새로운 정치 현실이 가능케 한 ‘자유’의 목소리, 즉 개인의 실존적 내면의식과 사회 현실의 마주침 속에서 한 자유로운 영혼의 내면적 고뇌와 절규가 이 시집의 핵심 정서를 이루고 있다. 또한, 한 실존적 인간의 고뇌와 절규가 어떤 저항의 포즈와 연결되는 것, 혹은 새롭게 등장한 현대 도시의 현실 속에서 고뇌의 표정을 짓고 있는 타자들의 얼굴을 발견하고 이들에 대한 사랑과 연대의 가능성을 내비친 것도 사실이다. 이것은 시대와 역사가 한 실존적 개인의 의식에 얼마만큼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만하다.
   개인적 실존의 영역에 머물고자 했던 순수하고 자유로운 영혼의 언어에 드리워진 집단의 운명. 시집 『반란하는 빛』, 더 나아가 오세영 시인이 속했던 동시대의 모더니즘 시에 드리워진 시사적인 몫을 이러한 윤리의 영역, 시적 모럴의 영역에서 가늠해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들의 해체적인 언어와 발랄한 이미지, 초현실주의적 기법 역시 이러한 시적 모럴과 관련지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새로운 논의의 몫으로 남겨둔다.

 

1) 필자는 「전통주의적 시창작과 시간 의식」(『오세영의 시-깊이와 넓이』, 국학자료원, 2002)이란 글에서 오세영 시의 변모과정을 분석한 바 있다. 편집자가 오세영 시 세계 전반을 다루어주기를 요청했지만, 그의 첫 시집에 논의를 한정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이런 관점에서 오세영 시를 논의한 연구로는 최승호, 「서정시의 미메시스적 읽기」,『오세영의 시-깊이와 넓이』, 국학자료원, 2002 참조.

 

 

 

남기혁  -------------------------------------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및 동대학원 수료. 1994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으며, 주요저서로 『한국현대시의 비판적 연구』(2001),『한국 현대시와 침묵의 언어』(2003),『언어와 풍경』(2010) 등이 있다. 현재 군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재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