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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 2013년 10월호, 신작수필16인선] 인생은 아름다워 - 정연순

신아미디어 2014. 5. 8. 23:52

"산다는 것은 인연을 가꾸는 일인지도 모른다. 사람과는 물론이요 시절도 그러하고 다른 생물과 무생물까지도 ‘나’를 중심으로 관계를 맺는다. 인연을 잘 가꾸어나가고 싶은 것은 본능이지 싶다. 그래야 행복하니까. 그럼에도 말처럼 그리 여의치도 않고 단순하지도 않은 것이 또한 인연이다. 더욱이 부부의 인연은 얼마나 오묘한 섭리인가." 

 

 

 

 

 

 인생은 아름다워       정연순

 

   가깝게 지내는 젊은 부부가 있었다. 듬직하고 쾌활한 남편과 부지런하고 정이 많은 아내는 언제 보아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그들은 이웃에도 그렇고 성당에서도 궂은일을 마다치않고 봉사라면 두 팔 걷고 나섰다. 초등학생인 두 아들은 소문난 개구쟁이지만 미사를 드릴 때는 의젓한 복사여서 우습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였다. 
   그 부부가 ME(Marriage Encounter)1) 주말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런데 그들을 환영하는 자리에서 사단이 났다. 그가 말했다.
   “아내가 한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뜻밖의 폭탄선언 같아서 아연했다. 그는 복받치는 듯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검게 탄 얼굴이 상기되었다. 그녀가 울면서 밖으로 뛰쳐나가고 다른 부부들이 뒤따라가고 하는 바람에 다들 충격과 혼란에 휩싸였다. 그가 애써 다시 말을 이어갔다.
   “사랑한다고 말은 쉽게 하면서도 아내의 아픔이 뭔지도 모르고 살았던 게 너무 부끄럽고 애처로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결혼한 지 12년 됐는데 그동안 누구한테 말도 못하고 제일 가까운 나한테까지 티 안내고 사느라 얼마나 힘들었을지, 진짜 마음이 아픕니다. 저한테 그 말을 하면서 참 많이 울더군요. 그 순간만큼 아내가 사랑스러웠던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진짜 어떤 영화배우보다 더 예쁘더라고요. 껴안고 같이 막 울었어요. 서로 미안해, 미안해, 하면서요.”
   숙연해졌다.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한숨을 내쉬기도 하고 고개를 푹 수그린 이도 있었다. 
   “저는 제가 아내를 제법 사랑한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이번에 확실히 깨달았어요. 제가 아내를 제대로 잘 사랑하지 못했다는 거, 순전히 내 중심이었지요. 또 아내가 저를 진심으로 믿어주고 사랑하는 것을요. 저절로 ‘ 감사합니다!’가 나오더라고요. 눈물이 다른 때보다 더 뜨거운 거예요. 눈물도 온도차가 있더라고요.”
   그녀도, 뒤따라 나간 이들도 돌아오지 않았지만 방안 가득 감동이 여울졌다.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나름 어루만지고 있는 것 같았다. 환영 모임은 그렇게 끝이 났다.
   다음 날 오후 그녀에게 전화를 넣었다. 반기면서도 이내 젖어드는 목소리였다. 찻물을 올리고 다과를 준비하는 사이 그녀가 왔다. 둘이서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제는 창피해서 죽는 줄 알았다면서 글썽거렸다. 약지에 낀 18금 실반지가 닳아서 한몸처럼 보였다. 그 남편의 약지에서도 늘 보던 같은 것이었다. 마디 굵은 그녀의 손이 우직한 표정으로 찻잔을 들어올렸다.
   한국동란 때 고아가 된 그녀는 휴전선 근처 먼 친척 집에서 부엌일과 농사일을 하며 자랐다. 학교가 원체 멀어서 굳이 가난을 핑계삼지 않아도 다들 그러려니 했다. 일 잘하고 싹싹한 처녀로 소문이 난 그녀가 전방 부대에서 장교로 복무하던 지금의 남편을 만나 사랑하게 되었다. 맏이가 태어나고 천주교에 입교를 하고 영세식과 함께 혼인식을 올렸다. 아이들이 한글을 깨칠 때 배워볼까도 했으나 용기를 내지 못했다. 이야기를 하면서 글썽이기도 하고 미소짓기도 하는 그녀가 새 잎을 내는 4월 느티나무 같았다.  
   며칠 후에 전화가 왔다. 그날 남편이 초등학교 일학년이 쓰는 네모 칸 공책을 열 권이나 사 들고 퇴근했더란다. 아이들에게 엄마의 사연을 말하고는
   “이제부터 아빠는 엄마의 선생님이다. 아빠는 엄마를 세상에서 제일로 사랑한다! 너희들은 그다음이고.”
   선서처럼 선언을 하더란다. 아이들이 싱긋 웃더라고 했다. 
   그리고 김장철 즈음 부부가 우리 집에 왔다. 모습이 환하다. 석 달 만에 한글을 마스터했고 내친 김에 중학교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단다.
   “이 사람이 머리가 좋아요.”
   “공부가 재미있어요. 신문을 읽으니까 눈도 귀도 트이는 것 같아요. 아직 멀었지만요.” 
   저녁마다 아빠 엄마가 상을 펴고 공부를 하는 바람에 아이들도 TV를 포기해서 그런지 성적이 쑥 올랐다고 싱글벙글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고등학교까지는 마치겠다면서 결의에 찬 눈길을 주고받는다.
   그들을 배웅하고 왠지 설레서 별을 더듬는다. 산다는 것은 인연을 가꾸는 일인지도 모른다. 사람과는 물론이요 시절도 그러하고 다른 생물과 무생물까지도 ‘나’를 중심으로 관계를 맺는다. 인연을 잘 가꾸어나가고 싶은 것은 본능이지 싶다. 그래야 행복하니까. 그럼에도 말처럼 그리 여의치도 않고 단순하지도 않은 것이 또한 인연이다. 더욱이 부부의 인연은 얼마나 오묘한 섭리인가. 

 

 

정연순  ----------------------------------------

   정연순님은 수필가, 《수필문학》으로 등단. 한양수필문우회 회장. 한국수필문학상, ME문학상 수상. 수필집 《파래소를 그리며》, 《수필같은 하루》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