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비평 2014년 5월호, 제151호 신인상 수상작] 소금 장수 - 호병준
"지난날 짐자전거에 소금 자루를 싣고서 간밤에 내린 비로 물이 불어난 개울 길을 용을 쓰면서 끌고 올라가던 내 모습이 주마등처럼 아련히 떠오른다."
소금 장수 - 호병준
유난히 무덥고 길었던 여름을 먹은 벼농사가 풍작이란다. 무엇보다 배추농사가 풍작이라 오히려 과잉생산을 걱정할 지경이다. 소금을 팔아먹고 사는 처지인지라 배추농사에 관심이 끌린다. 배추와 양념 등속이 잘 되어야 값이 안정되고 서민들이 김장을 넉넉히 담글 수 있다. 소금 소비도 덩달아 많아진다.
김장철이 보름이나 남았지만 소금 소비를 염두에 두고 작업을 시작하기로 하였다. 창고에서 작업장소로 천일염을 운반하고 호이스트로 다섯 포(150킬로)씩 들어 올려 탈수기 안에 부착한 여과포에 쏟아 붓는다. 모터의 버튼을 누른다. 순간 탈수기가 굉음을 지르면서 힘차게 회전한다. 3분 30초 만에 소금 안에 함유된 간수가 말끔히 빠져나가고 보송보송한 소금 알갱이가 백옥같이 빛난다. 여과포의 소금을 다시 선별함에 쏟아 붓는다. 일꾼들의 재빠른 손으로 티 갈이를 마친 깨끗한 소금을 크고 작은 포장지에 담는다. 비로소 상품이 완성된다.
소금과 함께하면서 소금의 정신을 배우며 살았다. 썩지 않는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소금의 가르침을 몸에 새길 수 있었다. 소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세상의 소금이 되라는 말씀을 성경에서도 읽는다.
젊었을 때 첫 직장을 잡은 곳이 당진 구지염전이었다. 그 염전에서 말단 감독 직책을 받아 천일염이 태어나는 과정을 익히게 되었다. 소금 직매소가 청주에 삼화상사라는 간판을 내걸고 개설되어 업무사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소금 장수라는 이름표를 달고 소금 판로 개척에 나섰다. 충청북도 일원을 시작으로 경북 영주와 안동을 거쳐 대구까지 판로를 개척하였다. 그리고 강원도 동해와 강릉·삼척까지 범위를 넓혀 나갔다. 부지런히 뛰어다닌 결과 당진소금이 딸려서 서산염전 소금까지 구매해야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천일염에 관한 자신과 실력을 쌓을 수 있었다.
홀로서기를 해야 삶의 보람을 더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월급쟁이 사원 10년 만에 삼화상사에 사표를 던졌다. 아내를 데리고 무작정 천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 낡은 셋집을 구하여 전화기 한 대만을 놓고 염업사를 차렸다. 달리 무엇을 생각하고 궁리할 처지도 아니었다. 젊은 혈기에 정직과 성실, 이것이 밑천이었다. 사람은 어디서 뭘 하거나 성실하게 남을 대하고 신용을 바탕으로 어려운 환경을 뚫어나갈 때 길이 트인다는 생각이 나를 일어서게 했다. 다행한 일은 믿어주는 거래처가 있어 고마웠다.
개업인사를 받은 분들이 대체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었다. 거래처에서 첫 주문을 받고 8톤 트럭을 염전에 보냈다. 해 질 무렵에서야 소금차가 도착하였다. 색대로 몇 포를 찔러 본 다음 목적지인 단양으로 보냈다. 며칠 후에 소금값을 보내왔기로 즉시 염전에 가서 사례하고 대금을 치렀다. 변함없는 신용이 밑천이다. 주문을 받으면 상대에게 품질 좋은 소금을 보내야 한다. 어느 사업이든 작은 이익을 노려 상대를 속일 경우 얼마 가지 못하고 실패한다.
거래처가 점점 넓어지고 규모도 커졌음으로 동해안 지역은 30톤에서 40톤 화차로 보내게 되어 전남 목포까지 가서 천일염을 구해서 실어 보내곤 했다. 천안으로 이사한 지 10년 만에 원성동 길가에 단독주택을 살 수 있었다. 오랫동안 소원하던 내 집을 마련하고 ‘영진염업사’ 란 간판을 내걸었다. 내심 뿌듯했지만 여전히 짠 소금이나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처지에 지나지 않았다.
간수가 찐득찐득 번져 나오는 50킬로짜리 소금은 먹힐 때가 아닌 것을 예감하고 핵가족 시대에 알맞은 소포장 고급소금을 만들어서 공급해야 했다. 사회의 변화를 읽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건 비단 소금장수만은 아니었다. 간수 제거를 연구하던 중에 세탁기에서 솟구쳐 나오는 물줄기를 보고는 ‘아! 바로 이것이다.’ 하고 손뼉을 쳤다. 어렵사리 공업용 중형 탈수기를 구하여 설치한 다음 천일염을 넣고서 동력전기 스위치를 누르니 굉음을 내면서 힘차게 회전하였다. 탈수기에 연결한 호스에서는 간수가 찰찰 흘러나오지 않는가. 순간 나도 모르게 ‘만세’를 외쳤다. 품질 좋은 소금을 만들 수 있는 길이 틔어 뛸 듯이 기뻤다.
국내 최초로 탈수천일염 생산에 성공한 셈이다. 부랴부랴 살던 집을 헐고 아래층을 공장으로 2층은 살림집으로 개조하였다.
처음에는 중포장 10킬로를 한 다음 5킬로, 3킬로, 1킬로 단위로 품목을 다양화하였다. 시장 개척은 형제들이 맡았다. 서울 여의도 아파트 상가를 시작으로 서초동의 은마, 무지개 아파트촌으로 파고 들었다. 생각 이상으로 히트를 쳐서 몇 년 만에 전국 대형 식품 매장에는 ‘영진탈수염’ 상품을 볼 수 있게 되었을 정도로 급속히 팔려 나갔다. 공장도 따로 규모 있게 지어야할 만큼 성장하였다.
지금은 두 아우가 서산과 신안에 각각 대규모 공장을 짓고 다양한 품목을 개발하여 해마다 상당한 매상을 올리고 있다. 성실하고 정직하면 산다는 말이 입에서 절로 터졌다.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우직스러울 정도로 한 우물만 파며 살아온 보람이겠다.
새해에는 ‘소금 장수 50년’을 마감하고 자녀들에게 물려줘야겠다. 오랜 세월 함께 배우고 애를 썼으니 잘하리라 본다. 인터넷이나, 전자상거래 등 나날이 늘어나는 택배 주문판매는 젊은이의 몫이지 싶다.
소금자루를 이고 마을길을 돌며 소금을 팔던 때도 있었다. 아내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그 노력이 열매를 맺어 아쉬우나마 오늘에 이르렀다. 외손자가 곧 초등학교 학생이 된다.
‘영진염업사’ 가 이웃과 사회에 작은 빛이 되어 영진永進 하는 날을 그려본다.
지난날 짐자전거에 소금 자루를 싣고서 간밤에 내린 비로 물이 불어난 개울 길을 용을 쓰면서 끌고 올라가던 내 모습이 주마등처럼 아련히 떠오른다.
호병준 --------------------------------------
충남 당진 출생. 영진염업사 영진그린식품 대표.
당선소감
봄인가 싶었는데 성큼 초여름 날씨로 치닫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세태에 순환하는 계절도 어리둥절한 모양입니다.
만학의 꿈이 영글도록 독려해 주신 이웃들과 당선의 영광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특히 멀리서 수필문학의 심지에 불을 지펴준 벗에게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이제 늦었다는 자책을 버리고,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마음가짐으로 부지런히 읽고 쓰는 것을 노후지락으로 삼겠습니다. 지난날이 호구지책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를 잊고 살아왔다면, 이제 남은 시간은 어떻게 사는 것이 보람 있는 생인가를 수필작품 속에서 따져가며 여생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쓰고 지우며 글을 다듬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