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비평 2013년 11월호, 사색의 창] 조필문弔筆文 - 김문억
"나는 지금껏 만년필을 쓰지 못하고 있다. 국산품을 비롯하여 이름 있다는 수입품까지 몇 차례 다른 만년필을 잡을 기회가 있었지만 도대체 내 손에 들어오지를 않는다. 내가 밀쳐내지 않으면 만년필이 내 손을 뿌리쳤다. 나의 비둘기는 오직 한 마리뿐 아무리 찾아도 닮은꼴이 없었다. 굵거나 가늘거나 아니면 잉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만나는 것마다 음치처럼 노래 솜씨가 젬병이었고 나의 문방필우文房筆友 비둘기만 못했다."
조필문弔筆文 - 김문억
벌써 삼십 년 전 일이다.
어느 날 내가 지는 해를 부둥켜 안고 크게 소리쳐 통곡한 후에 만년필萬年筆 한 자루를 샀다. 우리 동네 작은 문구점에서 산 뿔로 된 국산품이다. 말하자면 어떤 삶의 의미를 잡지 못하고 세월에 떠내려가고 있는 내가 한없이 한심스럽다는 인식으로 깊은 자아에 빠져들던 날이다. 그 날부터 무작정으로 문학 수업을 시작했던 것이다. 쉬지 않고 읽고 쓰기를 무작정 반복했다. 집에서는 물론 밖으로 나갈 때도 먼저 그 만년필을 챙겼으니 수족처럼 따라다녔다. 보는 것 생각한 것들을 꼼꼼하게 저장 했다.
그때는 김밥 한 덩어리를 싸 들고 도봉산으로 들어가서 종일 시를 쓰고 나올 때였다. 아침에 잉크를 잔뜩 넣고 글을 쓰다가 보면 저녁나절 잉크가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으니 작품이 되든 안 되든 무작정 무언가를 하루 종일 써댔다.
만년필을 즐겨 썼던 이유는 글씨를 쓸 때에 손가락에 힘을 주지 않아도 쓰고자 하는 모양대로 획이 잘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년필 끝을 잡고 쓰기보다는 중간쯤 허리를 감아쥐고 써야 마음대로 큰 획을 그을 수 있다. 약간의 힘이 필요한 볼펜보다는 훨씬 부드럽고 편하다. 더구나 그때는 컴퓨터가 없던 시절이고 세로쓰기를 하던 시절이어서 원고지 칸을 따라 아래로 죽죽 써 내려가면 글씨 폼이 볼 만하던 때다.
글씨 쓰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필의 굵기란 것을 그때에 알게 되었다. 어쩌다가 선물로 들어온 다른 만년필을 잡아보면 처음 택한 조강지처에 비해서 허리둘레가 굵거나 가늘어서 마음먹은 대로 잡고 돌릴 수가 없다. 때로는 잉크가 술술 나오지 않아 글씨가 깨지는 바람에 주둥이를 박박 긁는 짜증을 부리게 되었다. 끼어든 샛님은 내 짝이 아니었다. 아! 지금 문득 생각이 나네, 그 만년필 이름을 비둘기호라고 명명했던 기억이 문득 떠오른다. 추억도 더듬으면 잡히는 것이 있구나. 그래 참 비둘기호라고 이름 지어 부르면서 늘 함께했던 진홍색 내 만년필.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쓰되 비겁하거나 굴하지 말고 바른말만 쓰라는 생각에서 평화의 상징으로 비둘기호라고 명명했던 것이다.
붉은색 원피스를 입고 은회색 모자를 썼던 그 비둘기는 허리를 감아 잡으면 알맞게 내 손 안에 감겨왔다. 매끄럽고 가볍다. 내장은 아무것도 없이 오직 물만 먹는 나의 필우筆友 비둘기는 벌컥벌컥 물 한 사발을 들이켜고 나면 무당이 사설을 뽑듯, 소리꾼이 창을 뽑듯 신들린 가락을 쉬지 않고 쏟아냈다. 해학과 풍자가 운무처럼 난무하고 분수로 솟구쳤다가 폭포로 내리붓는 운율 속에서 내를 이루고 강물 흐르는 장대한 판소리 사설 한마당을 펼쳐 놓기도 한다. 평가해 보면 작품이야 별 볼일 없었겠지만 내 글에 내가 취하던 때다. 문학 신입생이 선무당 노릇을 하며 그때는 사설시조에 관심을 갖고 창작판소리를 쓰던 때다.
내 손은 남자치고 작은 편이다. 사람들과 악수를 하게 되면 언제나 우악스럽게 잡히는 편이었지 맞상대 되는 악수를 해 보지 못한다. 하지만 날씬한 허리를 내 손에 잡힌 비둘기는 온갖 품사品詞를 밟고 너울너울 돌아간다. 명사名詞 형용사形容詞에 각가지 부사副詞를 밟으면서 생각이 복잡할 때는 느린 템포의 블루스를 추다가 문맥文脈의 줄을 잡았을 때는 지르박으로 돌아간다. 중모리 중중모리 휘모리다.
문장의 구비마다 휘감아 도는데 너울거리는 모습만 보일 뿐 거친 숨소리 한 번 안 들린다. 기어가는 벌레가 종이를 갉아 먹는 소리다. 썰물로 나간 모래밭에 새끼게 한 마리가 모래성을 쌓는 소리다. 생각의 골짜기를 파고 들어가는 팽팽한 긴장 속에서 부리로 먹이를 쪼아대는 소리만 백지 위를 기어간다. 사각사각 찍고 긋고 돌고 지우면서 신명껏 흘러 간다.
가냘픈 허리하며 꼿꼿한 기상으로 스스슥 스스슥 부리 끝으로 원고지를 찍는 소리의 파장이 방안 가득 넘치고 나면 갓 태어난 사설 한마당이 핏덩이인 양 생명의 울음보를 터뜨렸다. 그리고 우리는 희열 속으로 빠져들어 벅찬 행복을 느꼈다.
문단에 오른 후에 첫 시집을 만들던 해였다.
글밭에 신명이 나서 원고를 정리하다가 비둘기가 책상 위에서 땅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는 바람에 아뿔싸, 그만 비둘기 몸에 금이 가고 말았다. ‘이를 어쩐담?’ 대사大事를 눈앞에 두고 벌어진 예기치 못한 부상 앞에서 참으로 난감하기만 했다. 급한 김에 테이프로 금간 부분을 감아주고 다시 쓰기 시작했다. 부상 투혼이었다. 대타代打라는 것이 없다. 월드 컵 대회에서 피 흘리는 머리를 싸매고 뛰었던 황선홍이었다.
비둘기는 그렇게 투혼을 발휘하면서 나의 첫 시집 ≪문틈으로 비친 오후≫를 완성했다. 도중에 몇 번 더 떨어지고 넘어지면서 부상을 당한 비둘기는 만신창이가 되어 갔다. 금 가고 부러진 전신을 깁스한 채 고통스러운 몸으로 임무에 충실했다.
우리는 오직 처음 만나 맘에 쏙 들었다는 조강지처의 의리 하나로 중환重患이면서도 서로가 지팡이가 되었다. 책상 위에서 마주칠 때는 거룩한 전사였고 역전의 용사였다.
시집뿐이 아니다. 습작 때는 독자들의 감상문에 일일이 답신을 써 보냈기 때문에 엄청난 양의 편지를 쓰게 되었다. 편지라고 하지만 딱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모두 문장력을 키우는 작업이었다. 어느 것은 긴 글로 남고 어느 경우는 쓰던 중에 시 한 편을 건지는 일이다. 때로는 길을 가다가 무릎을 탁 칠 만한 짧은 글을 쓰는 경우도 있지만 긴긴 밤을 꼬박 새우면서 만리장성을 쌓는 경우도 있다.
하필이면 내가 처음 글을 쓰던 때는 재수 옴붙게스리 군사정부가 들어선 팔십 년대였다. 비둘기는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로운 촉을 갖고 있다. 비둘기의 부리는 칼보다 강하고 활보다 뾰족했다. 정의와 평화를 위해 부정과 위선을 쪼아댔다.
연일 아픈 몸을 끌고 노동 현장으로 뛰었다. 그때처럼 많은 양의 글을 쓴 적이 없다. 호소문 결의문 대자보 성명서 따위가 모두 비둘기가 토해 낸 핏덩이였다. 비둘기도 나와 함께 집으로 퇴근하지 못하고 쫓기면서 외쳤다. 피 흐르는 몸으로 피를 찍어서 쓰는 형국이다 보니 붉은 글씨가 난무했다.
그때는 또 입 벌리는 문인들을 마구 잡아가던 때다. 첫 시집을 만들면서 출판사에 갈 때는 솔직히 쪼들리는 마음에 성당에 가서 기도를 하며 다녔다. 졸아드는 마음에 이 작품은 빼자고 하면 김동환 사장님이 힘을 주었다. 그분도 몇 번 불려 다닌 강골이었다.
아픈 몸을 이끌고 근 십여 년 동안 청춘을 바쳐 희생한 비둘기는 처참한 형용이 되었다. 더 이상 일어설 기력을 상실했다. 결국 자신의 관처럼 내 설합 속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말았다.
오호통재嗚呼痛哉라, 나의 벗 비둘기여! 고이 잠들라.
무식한 용기와 못 말리는 패기로 시작된 나의 문학 수업은 그렇게 목숨 바쳐 순절한 비둘기의 헌신이 함께했다.
그 후로 나는 지금껏 만년필을 쓰지 못하고 있다. 국산품을 비롯하여 이름 있다는 수입품까지 몇 차례 다른 만년필을 잡을 기회가 있었지만 도대체 내 손에 들어오지를 않는다. 내가 밀쳐내지 않으면 만년필이 내 손을 뿌리쳤다. 나의 비둘기는 오직 한 마리뿐 아무리 찾아도 닮은꼴이 없었다. 굵거나 가늘거나 아니면 잉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만나는 것마다 음치처럼 노래 솜씨가 젬병이었고 나의 문방필우文房筆友 비둘기만 못했다.
그런 사유로 오래도록 볼펜을 사용해왔고 지금은 정보화 시대를 맞아 컴퓨터로 처리하고 있으니 만년필의 추억도 시대의 흐름 속으로 묻혀가고 말았다.
김문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