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비평 2013년 11월호, 지상에서 길찾기] 설산투쟁雪山鬪爭 - 이종전
"자신을 돌아본다. 인간을 바라본다. 과연 인간은 녀석들과 무엇이 다른가? 만일 내가 그 상황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은 어떤 것이었을까? 어쩌면 녀석들보다 더 비겁한 행동은 하지 않았을까? 그래도 녀석들은 서열을 인정하고 인간보다는 순수하게 경쟁을 했다. 한 자리에서 싸우지 않았다. 다른 녀석을 해코지를 하지 않았다. 그저 피했을 뿐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정당한 경쟁이었다."
설산투쟁雪山鬪爭 - 이종전
겨울의 품에 안기고 싶어 행장을 챙겨 길을 나섰다. 목적지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는 순간 나를 기다리고 있는 계방산은 두꺼운 눈을 덮은 채 깊은 겨울을 품고 있었다. 생명의 기운을 느끼지 못할 만큼 차갑다. 유난히 춥고 눈이 많았던 때문일까, 눈이 깊다. 하지만 멀리 능선에서 능선으로 이어지는 설산의 자태는 어서 그 품에 안기고 싶은 마음에 설레게 한다.
부지런한 사람들이 열어준 눈길을 따라서 오르기 시작했다. 발걸음이 쉽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오랜만의 등산은 벅찼다. 얼마나 올랐을까, 숨이 차서 더 이상 걷는 것은 무리라고 느낄 무렵 삭풍을 온몸으로 맞고 있는 큰 소나무에 잠시 기대어 쉼을 얻어야 했다.
그때였다. 무엇인가 눈앞을 휙! 지나친다. 헛것을 보았나 했지만 다시 살피니 동고비 한 마리가 눈앞에서 어른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 겨울 눈 덮인 산에서 먹이를 찾을 수 없는 녀석은 사람을 만나자 먹이를 구하고 있는 게다. 겨울산행에서 자주 만나는 전경이다.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져서 과자부스러기를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녀석은 안절부절 망설이면서 눈치를 보더니만 포기할 수 없었던 게다. 얼마나 굶주렸으면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폴짝 날아와 한 입 물고는 나뭇가지로 줄행랑을 쳤다.
녀석이 먹이를 보는 순간 좋아서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친 때문일까. 주변 어딘가에서 먹이를 찾고 있던 박새 한 마리가 날아와 동참했다. 두 녀석들의 울음소리에 또 다른 새, 곤줄박이를 불러들였다. 세 마리가 모여서 내 손바닥에 있는 과자부스러기를 차지하기 위해서 경쟁을 벌이는 상황이 되었다. 제일 먼저 왔던 동고비는 이내 먹어치우고 다시 다가왔다. 그런데 내 손에는 이미 박새가 앉아있었다. 그러나 동고비는 거침없이 날아들었다. 그러자 박새는 줄행랑을 쳤다. 동고비는 재빠르게 과자부스러기를 입에 물고 다시 나뭇가지로 옮겨갔다.
그러던 중 곤줄박이가 다시 덤벼들었다. 녀석이 날아오자 동고비도, 박새도 근접하지 못한 채 나뭇가지에서 속을 태우고 있다. 결국 손바닥은 곤줄박이의 차지가 되고 말았다. 녀석도 먹이에 대한 욕심은 있지만 사람의 손바닥 위에 머무는 것은 두려운 게다. 먹이를 문 채 다시 나뭇가지로 옮겨갔다. 그 사이에 동고비가 잽싸게 다가왔다. 손바닥에 발을 딛지도 못하고 먹이만 물고 다시 날아간다. 동고비가 날아드는 것을 본 곤줄박이가 돌진해 오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에 박새는 애만 탄다. 감히 날아들지는 못하고 주변을 맴돈다. 그러다 틈이 생기면 순간적으로 날아들어 먹이를 겨우 챙겼다.
그러한 숨바꼭질을 하는 동안 손바닥의 과자부스러기는 줄어들었다. 그리고 이내 바닥이 났다. 녀석들은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주변 나뭇가지에 앉아 빈 손바닥을 주시하고 있을 뿐이다. 얼마나 기다려도 더 이상 먹이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안 곤줄박이가 먼저 자리를 떴다. 이어서 동고비, 그리고 조금밖에 챙기지 못한 박새도 아쉬운 표정으로 어디론가 떠났다.
설산에서 만난 녀석들이 보여주는 생존경쟁은 치열했다. 그것이 생태계의 질서인 것도 깨닫게 했다. 그것이 생존을 위한 것임도 분명했다. 그러나 녀석들의 행동을 아름답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절박했고, 질서라고 하기에는 약자인 박새가 너무 안쓰러웠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먹이를 차지해야 하기에 두렵기만 한 인간의 손바닥으로 날아들어야 했던 녀석들. 먹잇감이 다 없어지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차지해야 했기에 상대를 물리쳐야 했다. 녀석들은 인간에 대한 두려움도 뒤로하고 오직 먹이에만 집착하고 덤벼들었다. 녀석들의 행동은 오직 먹이를 얻기 위한 것이지 할 일 없이 춤을 추고 노래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평소에는 아름답게만 보였던 녀석들인데 생존경쟁을 위해서 돌진하는 행동은 나를 당황하게 했다. 아니 감상적으로만 보았던 자기중심적 시야가 어리석었음을 고백하게 했다. 녀석들 사회에 현존하는 생존경쟁을 위한 서열은 누가 인정하는 것과 관계없이 처절한 것이었다. 그것은 생명을 담보로 경쟁하는 것이기에 양보란 있을 수 없다. 어떻게 해서든지 먹이를 차지해야만 하기에 오금이 저려도 먹이를 향해서 돌진해야 했다.
자신을 돌아본다. 인간을 바라본다. 과연 인간은 녀석들과 무엇이 다른가? 만일 내가 그 상황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은 어떤 것이었을까? 어쩌면 녀석들보다 더 비겁한 행동은 하지 않았을까? 그래도 녀석들은 서열을 인정하고 인간보다는 순수하게 경쟁을 했다. 한 자리에서 싸우지 않았다. 다른 녀석을 해코지를 하지 않았다. 그저 피했을 뿐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정당한 경쟁이었다.
하지만 인간들의 경쟁은 신사적이지 않다. 아니, 겉으로는 신사적인 것처럼 하면서 다른 사람을 절규하게 만든다. 자신이 차지하지 못하면 비겁한 방법으로라도 다른 사람도 차지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인간이 아니던가. 인간은 지혜와 도구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넘보지 못하게 한 번에 다 가져갔을지 모른다.
차라리 녀석들의 경쟁이 비열한 인간의 경쟁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하면서 씁쓸한 마음으로 정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종전 --------------------------------------------
≪수필과비평≫ 등단. 수필집: ≪서 있는 바람≫, ≪철없는 백로≫, ≪위험한 동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