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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11월호, 지상에서 길찾기] 나무 아래 선다 - 이순남

신아미디어 2014. 3. 5. 13:13

"초록은 뜨거운 햇빛을 몸으로 막으며 산길을 타는 사람의 헉헉거리는 숨소리며 땀을 식혀준다. 정열의 꽃이라고 말하는 빨간 장미꽃은 금방 피었다 떨어지고 만다. 그러나 나무는 푸른 잎으로 차일을 치고 활활 타오르는 대지를 시원하게 보호한다. 그렇게 보면 나무는 모성을 갖는다. 나는 나무 아래 가서 선다."

 

 

 

 

 

 나무 아래 선다      이순남

   봄에 피는 꽃이 무지갯빛 같다면 녹음은 에메랄드빛 꽃이라고 하겠다. 먼 산을 보고 있으면 에메랄드빛 꽃송이가 떠오른다. 장미 개나리 벚꽃 등은 눈부시도록 환한 얼굴을 하고 사람들을 유혹한다. 마음을 흔들어 놓고는 며칠 사이에 꽃비처럼 흩날린다. 심술궂은 비가 내릴 때면 꽃잎은 애처롭게 떨어진다. 자연의 섭리에 순응한다. 그런가 하면 녹음은 여름 내내 건강한 모습으로 산과 들을 터줏대감처럼 차지한다.
   여릿한 봄볕에 피어나는 꽃은 어린이의 살갗처럼 부드럽다. 부드러운 잎을 만지면 생채기가 날까봐 조심스러워진다. 그러나 녹음은 건강한 장년처럼 강인하다. 굵은 힘줄이 툭툭 튀어나올 듯하다.
   신록은 비바람에도 아랑곳없이 뭉텅뭉텅 기운을 뻗는다. 바람이 불면 바람과 함께 몸을 흔들어 푸른 물결을 짓는다. 힘이 넘쳐 보인다. 때로는 도포를 입은 선비처럼 너그러운가 하면 어엿한 자태가 엄숙하기조차 하다. 비바람과 역경을 막아주는 버팀목과도 같은 녹음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절로 든든하다.
   무더운 삼복에도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묵묵하게 푸른 잎을 하늘거리는 활엽수도 있다. 옆에 있는 나무더러 푸른 잎으로 무더위를 시원하게 날려보자고 하는 것 같다. 이런 나무일수록 생기가 팔팔하다. 조급하게 서둘지도 않는다.
   더위에 짜증을 부리는 조급한 사람들과는 딴판이다. 여름이 한철이라며 내리쬐는 햇볕을 마다않고 몸을 가꾸느라 분주하다. 주변의 나무들에게도 여름을 이겨나가는 수법을 말하는 듯 잎을 흔들어 뭔가를 말하고 있다. 그런 나무가 부러워 여름내 나무 아래 자리를 깔고 나무가 하는 은밀한 이야기를 들으려 한다.
   여름 한낮의 햇볕은 대장간의 후끈한 쇳덩어리마냥 따갑다. 그러나 그 뜨거운 것이 들판의 곡식과 과일나무를 더욱 성숙하게 한다. 과일 속에 단맛이 고이도록 더 뜨거운 햇볕을 받아들이고자 한다. 녹음인들 어찌 다를 수 있겠는가. 다가올 가을의 단풍을 울긋불긋하게 치장하는 법을 햇볕 아래에서 익힌다. 또한 겨울을 맞이하기 위해 폭염으로 단단한 몸을 만든다. 그런 나무를 보고 있으니 대장간의 풀무질 소리, 담금질을 하는 일손이 나뭇잎에 보인다.
   ‘나는 산소를 만들어 내는 녹색식물이야. 산소를 만들려면 뜨거운 태양을 많이 받아야 돼. 그래서 여름이 되면 많이 바쁘단다. 내 몸을 옮길 수는 없지만 바람이라는 친구가 찾아와서 내 몸을 흔들흔들 즐겁게 춤추게 해준단다. 가려운 곳은 새들이 찾아와 긁어주지, 갈증이 날 때는 소낙비가 와서 시원하게 뿌려주기도 하지.’ 때로는 너무 많이 와서 낭패를 당할 때도 있지만, 한낮의 땡볕을 녹음은 어엿하게 한 몸으로 받으며 턱하니 버티고 서서 보호자마냥 시원한 그늘을 준다. 몸을 쉬게 할 수 있는 그늘이 그지없이 고맙다. 살아오면서 누군가를 위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땀을 식히도록 그늘을 내려준 적은 있는가. 또는 누군가를 위해 편히 쉴 수 있는 그늘이 되었던가 나 자신을 뒤돌아보게 한다. 숲이 버팀목과 그늘과 같은 삶이 되기를 넌지시 일깨워 주는 듯하다.
   숲 속에 들어 있으니 몸은 시원하고 상쾌하다. 숲은 땀방울을 씻어주는 서늘한 손이다. 나무 사이로 스쳐오는 바람은 녹음의 짙은 나무 냄새와 꽃향기를 끌어온다. 햇살이 숲의 빈틈을 파고들어 번득거리는 나뭇잎이 싱그럽다. 산속을 걸어가면 꽃송이 속을 걸어가는 것 같다. 꽃과 같이 숨을 쉬고 호흡하며 맑은 공기를 마신다. 큰 꽃 밑에서 여유를 즐기는 야생화가 환하게 웃으며 발걸음을 붙잡는다. 뭐라고 지저귀는 새들의 노랫소리에 장단 맞춰 숲 속의 푸른 환희를 따라 산을 오른다. 녹음에서 품어내는 향기가 온몸을 초록으로 물들인다.
   초록은 뜨거운 햇빛을 몸으로 막으며 산길을 타는 사람의 헉헉거리는 숨소리며 땀을 식혀준다. 정열의 꽃이라고 말하는 빨간 장미꽃은 금방 피었다 떨어지고 만다. 그러나 나무는 푸른 잎으로 차일을 치고 활활 타오르는 대지를 시원하게 보호한다. 그렇게 보면 나무는 모성을 갖는다. 나는 나무 아래 가서 선다.

 

 

이순남  -------------------------------------
   ≪수필과비평≫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