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작가 2013년 창간호, 다시 읽는 기행문] 금강산 기행 - 이광수
"위대는 평범이외다. 나는 이에서 평범의 덕을 배웁니다. 평범한 저 바위가 평범한 봉두峰頭에 앉아 개벽開闢 애래 몇 천만년千萬年을 말없이 있건마는, 만인이 우러러보고 생명의 구주救主로 아는 것을 생각하면, 절세絶世의 위인偉人을 대하는 듯합니다."
금강산 기행 / 이 광 수
우리는 점심을 먹고 이럭저럭 한 시간이나 넘게 기다렸으나, 이내 운무雲霧가 걷히지를 아니합니다. 나는 새로 두 시가 되면 운무雲霧가 걷으리라고 단언斷言하고, 그러나 운무중雲霧中의 곤로봉毘盧峰도 또한 일경一景이리라 하여, 다시 올라가기를 시작했습니다.
동東으로 산령山嶺을 밟아 줄 타는 광대 모양으로 수십보數十步를 올라가면, 산이 뚝 끊어져 발 아래 천인절벽千仭絶壁이 있고, 거기서 북으로 꺾여 성루城壘 같은 길로 몸을 서편으로 기울이고 다시 수십고를 가면 뭉투룩한 봉두에 이르니, 이것이 금강金剛 만이천봉萬二千峰의 최고봉인 비로봉두毗盧峰頭이외다. 역시 운무雲霧가 사색四塞하여 봉두峰頭의 바윗돌밖에 아무것도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 바윗돌 중에 중앙에 있는 큰 바위를 배바위라 하는데, 배바위라 함은 그 모양이 배와 같다는 것이 아니라, 동해에 다니는 배들이 그 바위를 표준으로 방향을 찾는다는 뜻이라고 안내자가 설명을 합니다. 이 바위 때문에 해마다 여러 천 명의 생명이 살아난다고, 그러므로 선인船人들은 멀리서 이 바위를 향하여 제祭를 지낸다고 합니다. 이 안내자의 말이 참이라 하면, 과연 이 바위는 거룩한 바위외다.
바위는 아주 평범하게 생겼습니다. 기묘한 산령山嶺에 어떻게 평범한 바위가 있나 하리만큼 평범한 둥그러운 바위외다. 평범 말이 났으니 말이지 비로봉두毗盧峰頭 자신이 극히 평범합니다. 밑에서 생각하기에는, 비로봉이라 하면 설백색의 검침檢針 같은 바위가 하늘을 찌르고 섰을 것같이 생각되더니, 올라와 본즉 아주 평평하고, 흙 있고 풀 있는 일편一片의 평지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거기 놓인 바위도 그 모양으로, 아무 기묘함이 없이 평범한 바위외다. 그러나, 평범한 이 봉峰이야말로 만2천萬二千 중에 최고봉이요, 평범한 이 바위야말로 해마다 수천數千의 생명을 살리는 위대한 덕을 가진 바위외다.
위대는 평범이외다. 나는 이에서 평범의 덕을 배웁니다. 평범한 저 바위가 평범한 봉두峰頭에 앉아 개벽開闢 애래 몇 천만년千萬年을 말없이 있건마는, 만인이 우러러보고 생명의 구주救主로 아는 것을 생각하면, 절세絶世의 위인偉人을 대하는 듯합니다.
더구나, 그 이름이 문인·시객文人·詩客이 지은 공상적·유희적空想的·遊戱的 이름이 아니요, 순박한 선인船人들의 정성으로 지은 ‘배바위’인 것이 더욱 좋습니다. 아마 이 바위는 문인·시객文人·詩客의 흥미를 끌만하진 못하겠지마는, 여러 십리 밖 만경창파萬頃滄波로 떠다니는 선인船人의 표적標的이 됩니다.
배바위야, 네 德이 크다.
萬丈 峰頭에 말없이 앉아 있어
滄海에 가는 배의
標的이 된다 하니,
아마도 聖人의 功이
이런가 하노라.
萬二千峰이
奇로써 다툴 적에
毘盧야 네가 홀로
凡으로 높단 말가.
배바위 이고 앉았으니
더욱 기뻐하노라.
이윽고 두 시가 되니, 문득 바람의 방향이 변하여 운무雲霧가 걷히기 시작하여, 동에 번쩍 일·월출봉日·月出峰이 나서고, 서에 번쩍 영랑봉永郞峰의 웅혼雄渾한 모양이 나오며, 다시 구룡연九龍淵 골짜기의 봉두峰頭들이 백운白雲 위에 드러나더니, 문득 멀리 동쪽에 심벽深碧한 동해의 파편破片이 번뜻번뜻 보입니다.
그러다가 영랑봉永郞峰 머리로 고고杲杲한 7월의 태양이 번쩍 보이자 운무雲霧의 스러짐이 더욱 속速하여, 그러기 시작한 지 불과 4, 5분 후에, 천지는 그물로 씻은 듯한 적나라赤裸裸한 모양을 드러내었습니다.
아아, 그 장쾌壯快함이야 무엇에 비기겠습니까? 마치 홍몽중鴻濛中에서 새로 천지를 지어 내는 것 같습니다.
“나는 천지 창조를 목격目擊하였다.”
또는
“나는 신천지新天地의 제막식除幕式을 보았다.”
하고, 외쳤습니다. 이 마음은 오직 지내 본 사람이어야 알 것이외다. 흑암黑暗한 홍몽중鴻濛中에 난데없이 일조광선一條光線이 비취어, 거기 새로운 봉두峰頭가 드러날 때, 우리가 가지는 감정이 창조의 기쁨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나는 창조의 기쁨에 참여하였다.”
하고 싶습니다.
鴻濛이 剖判하니
하늘이요 땅이로다.
滄海와 萬二千峰
新生의 빛 마시울 제,
사람이 소리를 높여
創世頌을 부르더라.
天地를 創造하신 지
千萬年가 滿滿年가.
蜉蝣같은 人生으로
못 뵈옴이 恨일러니,
이제나 咫尺에 뫼셔
옛 모양을 뵈오니라.
진실로 大自然이
莊嚴도 한저이고
萬丈峰 섰는 밑에
萬頃波를 놓단 말가.
風雲의 不測한 變幻이야
일러 무삼하리요.
참말 곤로봉두毘盧峰頭에 서서 사면四面을 돌아 보면, 대자연의 웅대·숭엄雄大·崇嚴한 모양에 탄복歎服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봉峰의 고高는 겨우 육천 구척六天 九尺에 불과하니 내가 오척 육촌五尺 六寸에서 이마 두 치를 감減하면, 내 눈이 해발海拔 6천 14척 4촌에 불과하지마는, 첫째는, 이 봉이 만이천봉 중의 최고인 것과, 둘째의 봉이 바로 동해 가에 선 것 두 가지 이유로 심히 높은 감각을 줄 뿐더러, 그리도 아아峨峨하던 보이던 내금강內金剛의 제봉諸峰이 저 아래 2천척 내지 3, 4천척 밑에 모형지도 모양으로 보이고 동으로는 창해가, 거리는 40리가 넘지마는, 뛰면 빠질듯이 바로 발 아래 들어와 보이는 것만 해도 그 광경의 웅장함을 보려든, 하물며 사방에 이 봉 높이를 당할 자가 없으므로, 환계가 무한히 넓어 직경 수백리의 일원을 일시에 부감하니, 그 웅대하고 장쾌하고 숭고한 맛을 실로 비길 데가 없습니다.
毗盧峰에 올라서니
世上 萬事 우스워라.
山海 萬里를
一眸에 넣었으니
그 따위 萬國都城이
蟻垤에나 比하리요.
金剛山 萬二千峰
발 아래로 굽어보고,
滄海의 푸른 물에
하늘 닿는 곳 찾노라니,
淸風이 白雲을 몰아
귓가으로 지나더라.
< 다음 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