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비평 2013년 11월호, 지상에서 길찾기] 도둑 이야기 - 김한분
"<개그 콘서트>는 세상을 보는 눈이 별나서 재미있다. 얼뜨고 착한 형사들이, 도둑 하나를 잡아 놓고 눈물 콧물을 쏟으며 애통해한다. “저놈 놓아주자. 저놈 불쌍해, 불쌍해도 너무 불쌍해!” 형사도, 도둑도, 보는 이를 따듯하게 한다. 제발 도둑이 없는 세상, 있더라도, 달밤에 남의 집 담 구멍을 파면서 내심 죄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그런 도둑만 있는, 착한 세상을 그려본다."
도둑 이야기 - 김한분
북촌으로 가다가 ‘정독서실’을 끼고 소격동 길로 향한다.
몇 년 전부터 이곳에는 한옥을 개조한 예쁜 상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주머니가 가벼운 젊은 디자이너들이 하나둘 모이더니 이제는 제법 유럽풍의 멋과 품격이 보이는 패션상가(?)가 형성된 것이다.
저마다 개성 있게 통통 튀는 옷이며 액세서리, 모자, 가방, 구두 등을 내놓아 둘러보는 재미가 있고, 젊은이들 속에 섞인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워 가끔 찾는 거리다.
오늘따라 화창한 날씨에 사람들이 붐비고 진열대엔 물건들이 넘쳐 보인다. 갑자기, 젊은 여자 하나가 내 앞을 질러가더니 ‘휙!’ 진열대의 옷을 낚아채 간다. 순간 나는 그 여자의 눈을 보았다. 그 여자도 나를 쳐다본다. 여자는 비릿하게 웃는다. ‘일러 봐, 소리라도 질러보지 그래!’
여자의 눈 속엔 그렇게 쓰여 있었다. 나는 공포에 질려 눈을 내렸다.
여자는 별일 아니라는 듯 길가에 있던 승용차를 타고 유유히 골목을 빠져나간다.
“너도 보았지. 저 여자 도둑인 거 맞지.” “설마, 멀쩡한 대낮에.” 옆에 있던 딸도 내 말을 믿지 않는다. 나를 혼돈에 빠지게 한다. 그 여자의 당당했던 눈빛이 지워지지 않는다. 평생 처음 목격한 영화 같은 장면이었다.
이른 아침, 창밖에서 어른들의 두런거리는 소리가 잠을 깨웠다.
“몹쓸 것들, 남의 집 담 구멍을 뚫느니 그 힘으로 들에 나가 땅을 팔 일이지 쯧쯧.” “쌀독을 보니 서너 말은 족히 퍼갔네요. 한동안은 잘 먹겠지.” 할머니와 어머니의 음성이다. 간밤에 우리 집에 도둑이 들었던 것이다.
어린 나는 겁이 나서 이불을 뒤집어썼다. 담을 뚫고 있는 도둑의 표정이 당장 보이는 것 같아 눈을 감는다. 우리 집 담은 보통 담이 아니다. 찰진 황토 흙에 볏짚을 썰어서 반죽한 두껍고도 단단한 토담이다.
어느새 우리 집 소문은 이웃들을 불러 모았다. 목소리 크고 웃기기 잘하는 임씨 아주머니는 “담 구멍만 뚫고 퍼갔으니 그놈은 양반이네.” 누구네 집은 밤손님이 들어와서 쌀은 쌀대로 자루에 담아 담 너머로 넘겨놓고, 부엌에 들어가 고이 덮어둔 쌀밥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는 문 앞에 변便을 한 보자기나 싸놓고 갔다는 얘기를 푸짐하게 늘어놓는다. 변을 남기는 것은 도둑들의 풍습이고, 잡히지 않기 위한 그들만의 예방책이라고 했다.
“도둑놈들!” 아침신문을 보고 있던 남편이 혼자 중얼거린다.
세상엔 ‘도둑놈’ ‘소매치기’ ‘강도’ 가 있다고 했다. 도둑에도 등급이 있다는 말이다. 열심히 일해도 먹고 살기가 어려워 어쩔 수 없이 저지르는 생계형은 그저 도둑이고, 자기 지능이 남보다 뛰어나다고 믿고 습관처럼 남을 해치는 군群을 소매치기라 하고, 힘으로 남을 제압하고 약한 사람의 피를 빨아 먹는 악질 도둑을 강도라 부른다고 했다. 그럴듯한 얘기다.
멀쩡한 사람들이 학위논문을 조작하고, 고위직에 오르기 만하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뇌물죄로 쇠고랑을 찬다. 이런 도둑을 소매치기라 하고, 팔리지 않는 물건을 강매하여 힘없는 ‘을’에게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하거나, 알량한 금배지 하나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국민이 어떻게 되고 나라가 어디로 가든 개의치 않는 부류, 원자력 발전라인에 기준미달의 부품을 끼워 넣고, 그런 일을 심사 관리하는 공직자가 집안에 거액의 돈다발을 숨겨두었다면, 영락없는 악질 강도들이다. 그뿐이랴, 100억 원짜리 가짜 수표를 만들어 백주에 은행돈을 빼어간 간 큰 도둑질이 바로 은행원과 전직 경찰관의 합작이었다니, 누가 도둑이고 누가 관리자인지를 분별할 수 없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개그 콘서트>는 세상을 보는 눈이 별나서 재미있다. 얼뜨고 착한 형사들이, 도둑 하나를 잡아 놓고 눈물 콧물을 쏟으며 애통해한다. “저놈 놓아주자. 저놈 불쌍해, 불쌍해도 너무 불쌍해!”
형사도, 도둑도, 보는 이를 따듯하게 한다.
제발 도둑이 없는 세상, 있더라도, 달밤에 남의 집 담 구멍을 파면서 내심 죄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그런 도둑만 있는, 착한 세상을 그려본다.
김한분 ------------------------------------------
≪한국수필≫ 등단. ≪수필과비평≫ 등단. 수필집: ≪달이 돌보는 정원≫, ≪기다리는 소리≫, ≪피자집이 있는 박물관≫, ≪달이 돌보는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