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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11월호, 세상마주보기] 구월의 장미 - 최태준

신아미디어 2014. 2. 26. 08:22

"애틋한 첫사랑과 맺지 못한 사람들은 평생 결핍을 느끼며 사는 것일까. 절절하던 사랑의 불씨를 가슴속에 꼭 눌러 두었다가 가슴이 허할 때마다 불현듯 뜨거워져 가슴을 태우는 화인火印 같은 것 말이다. 아마도 누이가 평생 그 결핍에 시달린 게 아닌가 한다."

 

 

 

 

 

 

 구월의 장미      최태준

   거기 장미꽃이 피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옥외 수도에 손을 씻으려고 웅크리고 앉자 빨간 장미 한 송이가 눈에 들어왔다. 장미는 무성한 초록의 국화 틈에 홀로 피어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다. 태풍이 오려는지 바람의 무게와 속도가 여느 때와는 사뭇 다르다.
   구월에 장미라니. 지난 오월의 정원은 장미의 천국이었다. 탐스러운 꽃봉오리들이 다투듯 피어올라 얼마나 황홀했던가. 구월의 장미송이는 때를 거스른 탓인지 다소 수척해 보인다. 꽃잎은 화려하기보다는 해맑다. 홀로 계절을 비켜선 품새에서 발버둥과 고독감이 묻어난다. 이런 느낌은 바람결에 흔들리는 장미의 빛 바랜 꽃잎, 그 유약함이 자아낸 연민일지도 모르겠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불현듯 어떤 얼굴이 떠오른다. 기억이란 참으로 묘해서 아주 작은 암시에도 이따금 전광석화처럼 반짝 과거의 모습을 재현해낸다.
   나보다 열 살은 위인 그 친척 누이는 귀공자 같은 달콤한 청년과 사랑에 빠졌다. 그는 오십 호 남짓한 우리 동네 유지의 아들이었다. 장미넝쿨 몇 가닥이 담을 넘어 삐죽 고개를 내민 그 집의 사랑채 근처를 걷노라면 동네에서 하나뿐인 유성기에서 자주 애절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와 함께 그들의 사랑 또한 깊어만 갔다. 노인이 별세하자 그 사랑채는 그들의 은밀한 공간이 되었다.
   누이가 연애에 함몰된 것은 그녀의 개방적인 성격 탓일 가능성이 크다. 일찍이 해외 물을 먹은 것과 다정다감한 성품이 그것이다. 일본에 살다 해방을 맞아 유년기에 가족과 함께 귀국했다. 그녀의 집에선 언제나 일본에 대한 얘기가 무성했는데, ‘다다미’와 ‘철도’ 같은 단어들이 자주 들렸다. 그 모든 얘기들은 무용담처럼 재미있고 신기하고 아득했다.
   사춘기의 누이가 동그란 수판에 장미꽃을 수놓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다양한 붉은 색실로 꽃봉오리를 만드는데, 꽃잎들이 입체감으로 도드라져 보였다. 신기해 수판의 배면을 들여다보았더니 뒤에도 전면과 비슷한 그림이 만들어졌다. 다만 좀 거칠고 못나보였지만. 누이가, 숙녀가 되자 주위에 청년들이 모여들었고, 그와 함께 수놓는 일도 시들해졌다. 그녀는 멋쟁이 청년의 손을 잡았다.
   그들의 연애를 오늘날의 잣대로 보면 남녀 간의 웬만한 사랑에 지나지 않았지만 당시엔 큰 스캔들이었다. 연인들은 함께 나다닐 수 없었기에 또래와 함께 만나거나 밤에 야산과 시냇가 혹은 빈 공간에서 은밀하게 만나거나 했다. 남들의 눈에 띄면 금방 입소문을 통해 동네방네 소문이 났고 손가락질로 돌아왔다. 딸 가진 부모들은 자식 단속하느라 전전긍긍이었다.
   누이의 부모는 소문에 자극받아 갑자기 결혼을 서둘렀다. 그 강압적 결정은 피가 끓고,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그녀에게 제어할 수 없는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바로 얼마 전, 사귀던 동네 처녀총각이 양가 부모의 반대에 부딪쳐 좌절 끝에 저세상에 가서 함께 살자며 양잿물을 마신 사건이 있었다. 청년은 죽고 처녀만 겨우 목숨을 건진 비극이었다. 함께 어디 도망가 호구지책의 일을 찾기 어려운 시대라 연인들은 막다른 골목에서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곤 했다. 누이도 엄한 관습의 벽을 넘지 못했다. 천성이 밝은 그녀는 당시 유행하던 데카당스 풍조에도 불구하고, 정사情死 같은 극단의 선택 대신 부모의 뜻을 순순히 따랐다. 어떻게 설득을 당했는지 그녀는 나이 많고 평범한 시골 남자에게 시집갔다.
   누이는 곧 아들을 낳았는데 불행하게도 그 아이는 자형을 닮지 않고 첫 사랑의 판박이였다. 커갈수록 청년의 습관까지 닮아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심덕 좋은 자형은 사랑으로 아들을 다독였다. 그녀는 가정에 정을 붙이지 못하고 흔들렸다. 첫사랑 닮은 아들을 품고 사는 그녀의 가슴에 고였을 그 고독감을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청년은 그녀가 결혼한 이듬해 마을을 떠났고, 그녀 또한 아들이 병사하자 홀연히 봇짐을 쌌다. 자형과 부부의 정이 없었다지만, 누이가 그토록 빨리 돌아설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녀는 시내에 살면서 길흉대사 때나 가끔 얼굴을 내밀더니 언제부턴가 통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내가 누이를 마지막 본 것은 퇴직하던 무렵이었다. 저녁약속에 늦어 식당을 향해 내닫는데, 예순 중반의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 블라우스에 하얀 바지, 그녀는 틀림없는 누이였다. 인사를 하려는데, 그녀가 외면한다고 느꼈다. 흠, 대체 왜 저러지. 지나쳐 돌아보니 그녀가 노신사와 만나는 것이 아닌가. 혹시나 애인? 누이의 어깨와 등이 많이 좁아보였다.
   중학시절 등굣길에 불어난 시냇물을 건너려고 양말을 벗는데, 마침 시내에 볼일 보러 가던 누이가 뒤에서 달려와 물이 차다며 손사래 치는 나를 기어코 업어 건네 준 적이 있었다. 그 고마움이 나로 하여금 평생 그녀의 편을 들게 했다. 바로 그 누이였다. 어쩌면 나를 알아보지 못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뒤돌아 달려가 봤지만 그녀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이후 나는 누이를 다시는 만나지 못했고,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도 모른다.
   애틋한 첫사랑과 맺지 못한 사람들은 평생 결핍을 느끼며 사는 것일까. 절절하던 사랑의 불씨를 가슴속에 꼭 눌러 두었다가 가슴이 허할 때마다 불현듯 뜨거워져 가슴을 태우는 화인火印 같은 것 말이다. 아마도 누이가 평생 그 결핍에 시달린 게 아닌가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바람이 세차다. 예보대로 태풍이 올 모양이다. 구월에 핀 장미라고 장미가 아니랴. 세월을 거슬러 사는 초연함이 가엾고 애틋하다. 장미에 비닐봉지를 씌워 숨구멍을 내고 줄기에 지주를 세워 고정시켰다. 누이가 여생을 온전히 기댈 사람을 만나기나 한 걸까. 첫사랑의 열정이 꺾이자 그 삶이 내내 겉돌고 팍팍하더니 노년의 삭신은 바람조차 버거울 것이다. 절기를 잃은 저 연약하고 막막한 꽃이 태풍 속에서 부디 무사했으면 싶다.

 

 

최태준  -------------------------------------------
   ≪에세이스트≫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