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문학 2013년 가을호, 테마포럼① 인간인 나는, 문학에게 이것을 원한다]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물꼬 - 김귀옥(수필가)
"문학이란 나에게 정제되지 않은 소금 같은 것인가? 뭔가를 하고 싶고, 해야 한다는 기한이 없는 숙제 같은 것? 그래서 조금은 느긋하면서도 편하지는 않은 그 무엇. 땅속에서 끓어오른 온천수가 밖으로 솟구치지 못하고 일정한 온도로 얌전히 끓고만 있는 기분. 아니 그저 막연히 끓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다. 끓는다. 와글와글 머리가 끓는다. 머리가 느낀다. 심장이 끓는다. 카오스다."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물꼬 / 김귀옥(수필가)
독서는 나를 행복하게 한다. 추운 날 따뜻한 차 한 잔으로 마음을 데우는 온기이고, 더운 날 유리그릇에, 하얗게 올라앉은 팥빙수다. 부서진 얼음의 입자가 여러 가지 부재료의 조화로 달콤하고 시원한 맛을 내는. 이해도 제대로 못하면서 T.S 엘리엇을 읽는 허영을 부렸고, 고등학교 때는 바이런을 읽으며 친구와 감탄사를 연발하기도 했다. 소설을 읽으며 소설속의 인물들과 산다. 나를 스쳐간 수많은 소설속의 인물들을 주위의 실존인물에 대입해보기도 한다. 얼마 전 읽은 소설 페테르부르크에 나오는 아들은 내가 아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한다. 아들은 이기적인 무신론 철학자인데 음모에 희생된다. 아버지를 살해하려고 기회를 엿보는 아들. 고독한 노인, 버림받은 남편, 무력한 아버지로 페테르부르크를 작가는 묘사했다. 페테르부르크의 지붕과 첨탑과 오래된 성당, 안개 낀 신기루, 음울한 도시가 어릴 때 그 집의 분위기와 닮았다.
노모가 사는 고향마을엔 소설 같은 이야기들이 아주 많다. 오래전 엄마가 시집 오기전의 할머니 이야기부터 시작해, 엄마의 이야기,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그야말로 여러 편의 중, 단편이 만들어지고도 남을 만큼 많다.
재작년 시골 집 근처에 사는 육촌 오빠가 저 세상으로 갔다. 죽기 전, 올케언니에게 그랬단다. “내가 죽고 나서 바람이 불면 밖으로 나와 마당가 대추나무를 보게, 바람에 대추나무가 흔들리면 내가 다녀간 줄 알게나.”라고. 살아 있을 때부터 그분은 좀 기인畸人에 가깝기는 했지만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그곳에 시인이 한 분 계셨네.” 했다. 부유한 집의 맏아들로 태어나 평생 돈벌이 모르고, 은둔 아닌 은둔으로 방에서 나오질 않았다. 술을 좋아해 맨날 아이들이 주막에서 술을 사다 나르고, 아주 가끔 바깥 나들이를 하면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며 우리 집 앞을 지나갔다. 그래도 신문은 우편집배원 아저씨가 꼭 배달을 해주었고, 무슨 집안의 행사에 어쩌다 나타나면 상대를 놓아주지 않던 나름의 지식인이었다. 홀아버지를 냉대해 골방에서 죽음을 맞는 불효를 했다고 이웃들이 수군거렸다.
아들은 남들이 가난 때문에 배움에 목말라할 때, 잘 먹고 잘 입고 공부까지 한 아버지의 특혜를 최대한 누린 자식이었다. 그런 자식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를 혐오했다. 두 사람 사이엔 언제나 불쾌한 바람이 불었고, 소설 속에서처럼 하나의 자아가 또 다른 자아를 테러했다. 견디지 못한 아버지는 객지에서 노년을 보내다 수구초심首丘初心으로 집을 찾았고, 역시 냉담한 아들은 늙고 병든 아버지를 골방에 방치했다. 바람은 끝내 안으로만 불었다. 그 역시 아버지였고, 스무 살 청춘인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었다. 아들을 보내고, 더욱 더 깊숙이 제 몸을 껍질 속에 가둔 거북이처럼 안으로만 침잠해, 결국 물속으로 점점 가라앉는 낡은 배가 되어 썩어갔다. 그에게 논리란 자신을 파괴하는 뜻밖의 결과를 낳는 카오스였다.
죽어서 바람이 되어 그 집을 찾을 만큼의 무엇이 그에겐 있었던 것일까? 어떤 불행한 경우 자신의 생각과 달리 실제는 거꾸로 간다. 끌고 가는 것은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이다. 결코 원하지 않는 것. 동생이 암에 걸렸을 때, 낫겠지 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두려운 마음을 떨쳐버리려 애썼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하필 일어나고 말았던 것처럼, 그도 그렇게 어두운 생을 어둡게 마감하리라는 두려움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빛을 향해 나갈 생각도 하지 않았고, 출구를 찾지도 않았고,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적대시하며 자신을 감금했다.
새들의 말을 알아듣는 신이 말했다. 이른 아침 하늘로 올라가는 종달새도, 그대로 살아서 돌아올지 알 길이 없어 새끼들에게 작별인사를 한다고. 세상과 결별하면서 감금되었던 생이 뭐가 그리 아쉬워 바람이 되어 다시 찾겠노라고 했을까? 기인畸人다운 우스꽝스러운 여유였을까? 활자를 싫어하지 않은 덕에, 그는 바람이 되고 싶다는 시적인 표현을 했다. 어쩌면 문학에 관심이 있지 않았을까? 그가 내면의 응어리를 문학으로 풀었다면 문학은 그에게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물꼬를 터 주었을지도 모른다. 다스리지 못한 감정을 껍데기 속에 가두고, 세상과 담을 쌓고 살지는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두운 소설 같은 그의 생이, 담아놓고 뱉어내지 못한 마음속의 말들, 언어로 태어나지 못해 미성숙한 알갱이들의 반란을, 분출하지 못해 터질 것 같은 감정들을 토해내는 일을, 문학이 그에게 해 줄 수 있었다면 문학은 그에게 출구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속에서 끓고 있는 고향마을의 이야기들을 소설로 쓰고 싶다. 겉으로 뿜어내지 못한 숱한 사연들이 문학의 형태를 가지고 태어나면, 평생을 안으로 안으로만 갇혀 살다 떠난 육촌 오빠에게 영혼의 날개라도 달아 주는 것이 되지 않을까? 그를 속속들이 이해할 수는 없다. 다만 문학의 감성을 지녔음이 분명한 그가, 좀 더 다른 삶을 살 수도 있었을 것 같은 아쉬움이, 그의 마당가 대추나무에 이는 바람이듯 내 마음에 바람이 되어 분다.
문학이란 나에게 정제되지 않은 소금 같은 것인가? 뭔가를 하고 싶고, 해야 한다는 기한이 없는 숙제 같은 것? 그래서 조금은 느긋하면서도 편하지는 않은 그 무엇. 땅속에서 끓어오른 온천수가 밖으로 솟구치지 못하고 일정한 온도로 얌전히 끓고만 있는 기분. 아니 그저 막연히 끓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다. 끓는다. 와글와글 머리가 끓는다. 머리가 느낀다. 심장이 끓는다. 카오스다.
걷는다. 행인의 우산이 걷는다. 내가 걷는다. 축축한 는개 속을, 수풀 속을, 안개가 주변을 에워싼다. 느릿느릿 숲을 품은 안개가 슬라이드처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화면을 이동한다. 나뭇잎에서 물방울이 또르르 떨어진다. 나무 우듬지부터 빛의 은총. 젖은 숲이 몸을 턴다.
김귀옥 ----------------------------------------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