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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10월호, 월평] 체험하는힘으로써의 수필 - 허상문

신아미디어 2014. 2. 7. 11:43

"수필이란 궁극적으로 자신의 삶의 체험에 대한 기억을 통하여 현재의 나의 삶을 재현하는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최근의 많은 수필들은 체험적 묘사의 기능과 가능성을 재확인시켜 주면서 그 절실함과 진정성을 보여준다. 우선 몇 편의 작품을 살펴보자."

 

 

 

 

 

 

 체험하는힘으로써의 수필      허상문

1. 체험의 힘, 수필의 힘
   문학작품의 다양한 양상들은 기본적으로 작가의 체험에서 우러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체험은 작가의 물리적 삶의 환경이나 대상에 대한 인식과 경험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이런 체험은 대상과 관계를 맺고 그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문학작품의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가 경험하는 매 순간의 체험들은 궁극적으로 ‘작품의 생명력’이 되기도 하고 진정한 ‘작가의 모습’이기도 하다. 따라서 작가가 어떠한 삶의 환경에서 어떻게 대상과 관계를 맺고 체험을 이루었는가를 밝히는 것은 문학작품에 대한 수용적 심미 체험을 위해서도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체험은 일차적으로 작가들에 의해 이 세상 만물과의 관계 맺음으로부터 이루어진다. 그러나 세계 내에서 사물과의 독특한 관계 맺음을 통해 작가들의 일차적 체험은 이루어지지만, 이것이 문학작품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사물이나 대상으로부터 초월적 의미를 보는 것, 즉 즉자적卽自的 초월을 경험해야 한다. 말하자면 사물을 내려다보는 위치에서가 아니라 동일한 차원에서 감정 이입의 과정을 이루면서 그들과 조우해야 되는 것이다. 작가는 때로 무욕과 무념의 자세로 사물을 관조하고, 그를 바탕으로 사물을 자신의 용도로 전환시켜야 한다. 이러한 의식적 변형을 통해 유보적 잠재적 상태로 존재하는 사물들을 새롭게 재탄생시켜야 하는 것이다. 작가의 의식과 눈을 통해 그 자신의 원래의 용도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역할을 부여받은 사물은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다양한 변형을 이룬 대상들은 작품의 전체로 혹은 작품 속의 이미지나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결국 체험은 문학에서 물리적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의식적 측면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원래 인간존재에게 있어 의식과 물질은 반드시 이분화되거나 이중적인 구조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전체이다. 그런 의미에서 존재의 두 가지 측면인 의식과 물질, 영혼과 육체가 온전히 ‘지금 여기’에 참여될 때 체험은 온전하고 진실하게 된다. 그것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추구했던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의 임계 상태 저 너머에서 일어나는 변화, 즉 ‘메토이소노(거룩하게 되기)’를 경험하는 단계이기도 하다. 예컨대 포도가 포도즙이 되는 것이 물리적인 변화이고, 포도주가 사랑의 ‘성체’가 되는 것이 바로 ‘메토이소노’이다. (이윤기, “작가론-20세기의 오뒷세우스”, ≪그리스인 조르바≫) 그 과정에서 의식과 물질, 영혼과 육체는 동등하게 자리 잡아서 동시에 중요하고 거룩하게 된다.
   카잔차키스의 ‘메토이소노’의 개념에 입각한 체험은 사물과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지는 의식적·물리적 변형으로 만물을 자유자재로 포섭할 수 있는 정신을 가능케 한다. 이런 정신이란 관념이나 지식이나 목적을 내려놓은 텅 빈 ‘초월’의 상태와 같은 것이다. 관념이나 목적을 내려놓은 지금 여기에 ‘과거’와 ‘현재’, ‘영혼’과 ‘육체’는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 비유컨대 그것은 마치 춤을 추는 것과 같다. 춤을 추는 동안 나는 사라지고, 지금 이 순간의 행위로서의 춤만이 남는다. 문학작품은 오로지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체험의 산물이며, 끊임없이 진행되는 과정의 어떤 순간들에 대한 증거이다. 이는 해체주의적 관점에 빗대면, 자크 데리다가 미의 순수화를 위하여 탈구축을 시도한 ‘파레르곤’의 개념과도 상통한다.
   요컨대 우리의 문학은 이 땅 위의 구석구석에서 보고 느낀 냄새와 촉감과 빛깔들을 세포의 구석구석에 담아두고, 인간과 세상의 모든 만물들과 애정을 나누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그리하여 다시 한 번 카잔차키스의 표현을 빌면, 우리의 문학은 “맨 몸을 땅과 바다에 밀착시키고 이 사랑스러운, 그러나 덧없는 것들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어야 하고, 그리고 “거짓이 없는 맨 몸으로, 그 온전한 전체로, 그저 느끼고 받아들이고 존재하며 이 어머니 대지 위에서 춤추는 것”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이 된다.
   수필은 다른 어떤 문학 장르보다도 체험의 힘에 의해 이루어지는 ‘체험의 문학’으로 알려져 있다. 수필에서 이러한 체험의 힘이 어떻게 문학적으로 형상화되어 나타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인가.


2. 체험의 수필적 형상화
   수필이란 궁극적으로 자신의 삶의 체험에 대한 기억을 통하여 현재의 나의 삶을 재현하는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최근의 많은 수필들은 체험적 묘사의 기능과 가능성을 재확인시켜 주면서 그 절실함과 진정성을 보여준다. 우선 몇 편의 작품을 살펴보자.

 

   i) 마음을 진정하고 탄피 밑에 쪽지를 집어들었습니다.
   “박병장님, 전역 축하드립니다. 가진 것이 없어 마음의 선물입니다. 군 시절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사격장의 군기처럼 저는 몸이 오싹해 왔습니다. 그리고 치열하게 살지 못한 며칠을 탄피가 꾸짖는 듯 했습니다. 실탄을 토해내 버린 탄피일지라도 아직도 뜨겁게 탄피는 빛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탄피처럼 순간 순간을 치열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온갖 의심과 수모 속에 준비한 그의 정성 위로 내 눈물이 한방울 또 한 방울 떨어졌습니다.

-박용수, <탄피 이야기>에서

 

   ii) 눈에서 피 눈물이 맺히던 그때 일을, 죽을 때까지 못 잊겠다고 어머니는 가끔씩 말씀을 하시곤 했다. 미친개같이 달려들던 가난 속에서, 모두가 피 울음을 터뜨리며 살아 남기 위한 수단의 몸부림이었다. 지금도 이따금씩, 그때의 일들이 떠오를 때마다 가난의 아우성들이 환청이 되어 귓속을 찢을 듯 울려대고, 사금파리 조각으로 가슴을 후벼 파는듯한 아픔의 앙금이 되살아나지만, 그땐 시절이 그랬던 걸 누구를 원망 하랴.

-김성렬, <장날>에서

 

   iii) 식사가 끝나고 몇 번 사진을 찍는다. 박으라고, 눈물도, 흘러간 시간도, 추억도 선명하게 나오도록 잘 찍으라고. 그녀가 한 명씩 끌어안고 작별의 포옹을 한다. 차를 타고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한동안 멍하게 바라본다. 슬픔이 밀려온다. 굽이치는 강물을 따라 멀리멀리 흘러가는 돛단배처럼 그녀에 얽힌 이야기들이 속절없이 떠나간다.
   “그녀가 끓인 라면 한 그릇만 먹었으면…….”

-임만빈, <라면 한 그릇 먹고 싶다>에서

 

   위 i) ii) iii)의 작품에서 작가들은 모두 흘러간 시간의 흐름 속에 축적된 체험을 통하여 현재적 삶의 의미를 재현코자 한다.
   박용수의 <탄피 이야기>는 군대 시절의 체험을 탄피라는 상징적 매개를 통하여 묘사하고 있다. 야간 사격 훈련을 마치고 나면 자꾸 사라져가는 탄피, 탄피가 한 개라도 사라지고 나면 부대원들은 그에 따르는 엄청난 군기훈련과 탄피 찾기의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그것은 시골 출신의 가난한 이중석 상병의 짓이었다. 그는 첫 휴가를 다녀올 때에도 빈손으로 귀대해서 부대원들의 따돌림을 받던 사병이었다. 그가 탄피를 하나씩 모아 전역하는 선배 전우들을 위해 선물한 것이다. 남자들에게 군대 이야기는 영혼과 육체의 안식처와 같은 곳이라고 하지만, 냉엄한 군대생활과 치열한 전투 속에서 아픔과 고통이 이어지지만 그 속에서도 언제나 따뜻한 인간주의적 정신은 존재한다. <탄피 이야기>는 군대 체험에서 있었던 이중석이라는 인물의 행위를 통하여 따뜻한 사랑의 마음과 동료애의 정신을 잘 그려내고 있다.
   김성렬의 <장날>은 전쟁 시절 그 지긋지긋하던 가난과 그 가난과 싸움하면서 힘겨운 삶을 영위해야 하는 어머니의 체험을 기본적 에피소드로 하고 있다.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어느 해에는 학비가 없어 중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등에 걸머진 나뭇짐은 어깨를 짓누르며 점점 무거워지고, 무엇보다도 국밥집 앞을 지날 때, 가마솥에서 설설 끓는 고깃국 냄새가 파도처럼 달려들어” 허기진 화자의 발길을 붙잡는다. 땟거리가 떨어져 밥 구경한 지가 오래고 멀건 나물죽으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다. 화자는 하얀 쌀밥에 고깃국이 눈에 선하고 땅이 핑핑 돌아 어지러워 그대로 쓰러 질것만 같은 체험을 하게 된다. “나무를 잘 팔면 국밥 한 그릇을 꼭 사주마.” 어머니가 집을 떠날 때 하시던 말씀이 귓가를 울려댄다. 국밥집 앞에서 머뭇거리는 막내아들을 바라다보시고 어머니는 끝내 눈물을 훔치신다. <장날>에서 화자가 이야기하는 가난의 체험은 “생각조차 하기 싫은 그 무시무시했던 전쟁과, 심장까지 파고 들어 피멍을 들게 했던 가난의 생채기들”로 남아 있다. 이 작품은 지난 시절 가난의 아픔과 슬픔이 그 자체로도 잘 묘사되고 있지만, 가난의 체험에 얽힌 화자의 아픈 내면이 개인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 · 집단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독자들에게 다가오는 공감은 더욱 절실하게 느껴진다.
   임만빈의 <라면 한 그릇 먹고 싶다>는 라면에 얽힌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의 체험을 찾는 작품이다. 화자는 졸업 후 사십 년 만에 만나는 그녀에 대한 기억을 지울 수 없다. “사소한 것이라도 과거를 통과하면 그리움으로 색칠해져 아름답게 보이는데, 인생의 가장 화려한 젊은 한 때를 시간이라는 투명한 프리즘 속으로 통과시키라니……, 얼마나 애달픈 회귀본능을 자극하겠는가.”라는 화자의 말에는 지나간 시간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이 배어나온다. 의대졸업반, 의사국가고시를 대비해서 허름한 집의 방 두 개를 얻어 다섯 명이 모여 공부하던 그 시절의 그녀는 이제 이혼 후에 두 아들을 두고 혼자 지내는 여인이 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차를 타고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한동안 멍하게 바라보면서 화자에게는 슬픔이 밀려온다. “굽이치는 강물을 따라 멀리멀리 흘러가는 돛단배처럼 그녀에 얽힌 이야기들이 속절없이 떠나간다.” 떠나간 사랑과 시간에 대한 애틋함을 아련하게 보여주는 문학작품과 영화는 그동안 수없이 많았다. 떠나간 사랑을 주제로 한 수많은 문학작품과 영화들이 우리들에게 공통적으로 주는 교훈은 모두 이별을 한 이후에야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할 걸 그랬다.”고 후회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임만빈의 <라면 한 그릇 먹고 싶다>도 이 같은 상투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옛날 그녀가 끓여주던 그 라면을 한 그릇만 더 먹어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과 그리움이 이 작품을 읽는 독자들에게 깊은 여운으로 남는다.
   박용수의 <탄피 이야기>에서 읽을 수 있는 가난한 이중석 상병의 사랑의 마음, 김성렬의 <장날>에서의 가난, 임만빈의 <라면 한 그릇 먹고 싶다>에서의 흘러간 시간의 체험을 통하여 우리는 각각 다른 새로운 차원의 삶을 체험하게 된다. 문학작품의 텍스트에 나타나는 타자의 체험은 우리들에게 많은 인식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사랑과 가난과 세월의 흐름의 의미들은 어찌 보면 우리들의 일상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지극히 당연한 명제들일지 모르지만, 좋은 작가들은 이들을 통하여 무한과 초월을 바라보는 더 넓고 깊은 시선을 가진다.
   독일의 낭만주의 시인 F. W. 쉘링은 “미는 유한한 가운데에서 무한한 것을 보는 것이다”라고 한 적이 있지만, 이는 예술이 형이상학적인 초월이 아니라 즉자적인 초월, 즉 매 순간의 감각세계로부터 더 나아가 사물로부터 초월적 의미를 보는 것을 말한다. 동양적 관점에서는 장자莊子도 ‘홀로 천지정신과 왕래’하면서도 ‘만물을 내려다보는 태도를 취하지 않고’, ‘옳고 그른 것을 따지지 않았으며 세속에 순응하며 살았다’고 했다. 장자에게 있어 초월 정신이란, 만물을 떠나서는 안 되며 결코 세속을 떠나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최고의 예술정신과 맞닿아 있는 이러한 장자의 정신은 예술적 초월 역시 명상적이고 사변적인 형이상학의 초월에 맡겨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것 중에서 새로운 존재를 발견해 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문학작품은 인간과 삶의 의미와 인식이 새롭게 제공되는 하나의 훌륭한 체험의 장이라 할 수 있다. 문학 텍스트는 단순히 무엇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인생을 살아내는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문학이 삶의 인지적·정서적 경험을 표현하는 유효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문학작품은 체험의 폭을 확장시켜준다. 또한 문학 텍스트는 경험의 폐쇄성과 고립성을 극복하고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겪어보지 못한 체험의 세계를 제공한다. 이전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을 어떻게 하면 생각할 수 있는지를 보여줌과 동시에 무심하게 바라보던 세계와 삶의 범주들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 문학이다.
   이런 관점에서 권남희의 <터>와 김순자의 <한 알의 쌀 속에>는 눈앞에 보이는 현재적 삶을 통하여 새로운 삶의 체험을 가능케 하는 의미 있는 작품들이다.

 

   i) 건물 외벽에서 번쩍이는 광고전광판을 보며 나는 별 쏟아졌던 외가의 마당을 떠올린다. 대나무 숲 뒤란과 평상이 있던 마당, 여름 방학이면 나를 반겨주던 외할머니, 소여물을 썰던 외삼촌, 외숙모와 그곳 친구들……. 더 이상 돌아갈 고향이 없다는, 터를 잃고 떠돌아야 한다는 불안 때문에 상실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권남희, <터>에서

 

   ii) 하늘과 땅을 부모로 세상에 나온 뭇 생명체들은 대자연 속에 하나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자연 속에 녹아있는 땅의 기운, 물의 기운, 불의 기운, 바람의 기운이 볍씨를 싹틔우고 성장시키고 마침내 알곡의 결실을 가져오게 한다. 이렇게 얻어진 쌀을 내가 취했으니 쌀은 내 안에 들어와 내가 되고, 후에 내 몸 또한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흩어져 자연으로 돌아가게 되리니 그땐 내가 무엇으로 그들과 만나게 될지 모를 일이다.
한 알의 쌀 속에 우주가 담겨 있음을 배우는 아침이다.

-김순자, <한 알의 쌀 속에>에서

 

   권남희의 <터>는 현대적 삶에 있어서의 삶의 공간의 모습과 의미를 성찰하는 작품이다. 작품의 화자에게 강남거리는 ‘터’를 빼앗긴 폐허의 얼굴과 같다. 그곳은 사람을 위한 공간이 없다. 별빛을 삼킨 불야성 거리가 존재할 뿐이다. “이곳이 뉴욕인가, 이태원인가? 클럽과 카페, 탈출구를 찾는 젊음이 뜻을 합해 하룻밤 미치는 문화만 살아남는 장소일 뿐이다. 시대의 울기鬱氣를 발산하기 위해 날마다 축제가 벌어지는” 곳이다. 거리에서는 매일 빌딩을 지어올리고 또 새로운 건물을 짓기 위해 빌딩을 해체한다. 화자가 절망적으로 말하듯이, 이제는 “대나무 숲 뒤란과 평상이 있던 마당, 여름 방학이면 나를 반겨주던 외할머니, 소여물을 썰던 외삼촌, 외숙모와 그곳 친구들”이 사라지고 없고 더 이상 돌아갈 고향도 없다. <터>에서는 원초적인 고향을 잊지 못하는 생래적 의식이, ‘터를 잃고 떠돌아야 한다는 불안’ 의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사람 사는 근본이 되는 ‘터’로서의 고향은 우리들에게서 자꾸자꾸 멀어져 가고 있다.
   김순자의 <한 알의 쌀 속에>에서 작가는 한 알의 쌀에 깊은 의미를 부여한다. 화자의 말대로 어쩌면 이 쌀 알갱이들은 넓은 들판에 살았을 때 만난 적이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햇살 따사로운 봄날, 깔끔하게 모내기를 끝낸 논두렁에선 살랑살랑 미풍으로, 땡볕에 숨이 막혀 헉헉댈 땐 시원한 소나기 바람으로, 살이 통통 여물기 시작하는 가을들판에서는 선들바람으로 이 쌀과 만났을지도 모른다.” 대지의 생명이 살아 숨 쉬는 그곳, 쌀의 고향에서 한 알의 쌀과의 만남, 화자는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대자연 속에 하나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더 나아가 화자는 “이렇게 얻어진 쌀을 내가 취했으니 쌀은 내 안에 들어와 내가 되고, 후에 내 몸 또한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흩어져 자연으로 돌아가게 되리니 그땐 내가 무엇으로 그들과 만나게 될지 모를 일이다.”고 생각한다. 쌀 한 톨에서 생명의 의미를 찾고자 하고, 한 알의 쌀 속에 우주가 담겨 있다고 생각하는 작가의 인식을 통하여 우리는 작가의 범상치 않은 생태적 상상력을 엿볼 수 있다. <한 알의 쌀 속에>에서와 같이 쌀 한 톨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고, 우주만물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이 있다면 오늘날과 같은 무자비한 생명파괴와 자연에 대한 도구적 인식이 이렇게 만연할 수 있을까.
   권남희의 <터>와 김순자의 <한 알의 쌀 속에>는 현대적 삶의 체험의 과정에서 ‘경계 없음’의 태도를 취한다. 권남희는 <터>에서 붕괴되고 타락한 도시에서 순수하고 아름다운 시골의 모습을 찾고자 하고, 김순자의 <한 알의 쌀 속에>는 한 알의 쌀 속에 우주가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이 같은 작가들의 의식적 체험은 어떤 대상도 분별하지 않는 태도이며, 따라서 ‘무경계’의 의식 상태로 나타난다. 그것은 무한의 의식적 체험과 통하는 것이며, I. 칸트의 숭고미와도 연관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칸트가 주장하는 숭고미는 절대적인 것에 대한 인간의 인식이 균열과 불일치로 인해 파생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현대 기술 문명의 형식주의, 절대성 등은 본질적으로 재현할 수 없는 것으로 향해 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여기서의 ‘경계 없음’은 정신과 육체 혹은 형식과 무형식을 조화하고 통합하는 단계를 의미한다.
   현대의 인간들은 경계와 형식과 물질에만 갇혀 살아가고 있다. 모두가 최대의 독점적 이윤을 얻기 위해 분투해야 하는 한탕주의자들 뿐이다. 그들은 부대끼며 살아온 정든 ‘터’와 이웃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를 키워준 고향땅을 쉽게 허물어 버리고, 물을 더럽히고, ‘한 알의 쌀’도 소중하게 생각지 않는다. 현대의 지배적인 자본주의와 산업문명의 횡포와 그 동력으로서의 과학기술의 오만함이 수천 년간 지속되어온 우리들의 삶의 방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현대인들은 힐링체험을 이야기하고 힐링문학을 이야기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3. 힐링체험과 힐링에세이
   인도의 명상가 라즈니쉬는 “인간은 질병이다. 인간은 질병에 걸리지만 인간자체도 질병이다. 이것이 인간의 문제이며 인간의 독특함이다.”고 했다. 이러한 인간의 질병은 현대사회로 갈수록 더욱 심각해져가고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는 말을 상기치 않더라도 인류사를 살펴보면 인간이 외부적 환경요인들과 깊은 유대관계를 맺으며 사회와 역사를 이룬 것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인간의 주변상황은 인간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지만 때로 부정적인 쪽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서구적 합리주의와 자본주의의 논리가 지배하는 현대문명사회는 실용성 · 기능성만을 강조하다보니 개인주의적 성향의 팽배를 낳게 되었으며, 더 나아가 상호불신과 인간성의 상실로까지 나아가고 있다. 현대사회는 소외의 시대라고 불리어지고 있지만, 인간은 자신의 뜻대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일원으로서만 생활하게 된다. 인간이 창조한 기계나 제도에마저도 예속되어 오히려 그에 봉사하고 예속된다. 이 모든 것이 가치전도의 과정에서 비인간화와 인간성 상실이라는 양상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예전에 볼 수 없던 각종 병리현상들이 질병처럼 자라가고 있는 것이 우리 사회의 일면이다.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만 마음과 정신은 갈수록 황폐해져가고 있는 현대사회의 병폐는 근대화 이래 개발과 성장에만 몰두해 온 우리 사회가 치러야 할 대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힐링 바람도 이 같은 분위기를 잘 반영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본과 물질, 과학과 기술에 대한 욕망과 풍요만을 좇아온 현대인들의 텅 빈 몸과 마음을 치유해줄 힐링의 대안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수필과비평≫(143호)에 실린 ‘힐링에세이’ 특집에서 그에 대한 해답의 일단은 찾아질 수 있을 듯하다.

 

   I) 내 어머니의 시간들은 난해하고 고통스러운 현실, 홀로 풀어야 할 태산 같은 짐이었다. 삼십대 중반부터 홀로 되어 살아오던 어머니가 어려울 때면 한숨처럼 내뱉던 말, “어서어서 늙었으면 좋겠다.”
그 말은 내 뼛속에 아주 독한 슬픔으로 스몄다. 성장하는 내 나이를 두어 살씩 앞당겨 견뎌낼 수 있도록 예습시켰던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무거운 절망이었다.

-이향아, <어머니의 시간>에서

 

   ii) 왜 내 뒤통수가 간질거렸을까? 새치기하는 우리를 본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내 뒤통수에 와 꽂히는 것 같아서 그랬을 것이다. 나라도 뒤에 가 섰더라면 사람들이, 아 무슨 사연이 있구나 하고 양해했을 것이다. 나는 신사에게 그냥 감사의 뜻만 표시하고 뒤로가 섰어야 했다. 새치기 다 해 놓고 지금 와서 무슨 위선이냐, 그러지 마시라.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마음 한 구석이 개운치 않다.
어째 자꾸만 염치란 말이 떠오른다.

-정진권, <그랬어야 했다>에서

 

   iii)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밥맛이 떨어지면서 어느 날 조용히 우리는 이승을 떠난다. 나에게 밥맛을 돋우어 힘을 안겨주는 것은 한우의 등심도 삼겹살도 아닌 혹한의 겨울 밭에서 추위를 견뎌낸 ‘쪼글배추’와 바다에서 방금 뜯어온 ‘돌파래’, ‘돌미역’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파란 색깔의, 그 뜨거운 불길을 만나기 전의 풋것들이다. 그래서 해마다 추운 겨울이 되면 나는 혹한에의 두려움보다 생으로 쌈을 싸먹는 자연 그대로의 풋것들을 만나는 즐거움에 오히려 내 가슴은 부푼다.

-정호경, <쪼글배추, 파래, 미역쌈>에서

 

   iv) 잘 웃지 않고 살았다. 좋게 표현하면 진중했고, 나쁘게 말하면 지나치게 무거웠다. 게다가 앞에서 말했듯이 천성이 몫을 더했을 수도 있겠다. 그리 살았던 것인데 어느 좋은 날 환한 웃음과 눈물겨운 웃음을 만났다. 꾸밈없이 늙어가는 촌부가 함빡 웃어 주었고, 영영 늙지 않을 나이든 아이가 순한 웃음을 남겨주었다. 더하여 살아오는 동안 마주하고 웃었던 수많은 사람들 덕분에 그나마 웃으면서 살았다는 생각도 든다.
웃는 얼굴로 살아야지. 꽃도 웃고 나도 웃고 그대도 웃으면 참 좋겠지. 그런 마음 으로 살고 있다. 그리하여 나는 자주 환하게 웃고, 때로 박장대소하며, 때때로는 미소 지으며 살아간다. 그렇게 웃으면서 산다.

-허창옥, <나도 웃고 그대도 웃으면>

 

   <어머니의 시간>에서는 어머니를 통한 나이와 세월의 의미에 대하여, <그랬어야 했다>에서는 노년의 일상적 삶의 체험을 ‘염치’로 표현함으로써, <쪼글배추, 파래, 미역쌈>에서는 먹거리를 통해서 무욕의 삶을 인식해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나도 웃고 그대도 웃으면>에서는 이 험난한 세상에서 웃음의 미학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주면서 이 시대의 힐링의 방식을 모색하고 있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현대사회에서 개인주의의 팽배와 상호불신, 자기소외, 비인간화에서 빚어지는 온갖 양상과 그로 인한 사회병리와 물질의 풍요 속에 몸과 마음의 황폐화를 치유할 대안을 찾는 것은 절실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 병을 다스리고자 하면 그 마음을 먼저 다스려라.”라는 붓다의 이야기는 물질과 권력, 명예의 유혹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현대인들을 질타하고 있다.
   인간은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과 더불어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간다. 생각해보면 우리들의 삶은 항상 무언가 부족하고 허전하며 빈곳이 많다. 그런 삶 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불안과 근심, 해소되지 않는 갈증과 욕망은 인간을 끊임없이 괴롭힌다.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고 유목민처럼 떠도는 정신의 사막을 걸으면서 때로 오아시스의 맑고 시원한 샘물은 어디 있는지 항상 그리워한다. ‘힐링에세이’들은 우리가 그동안 잃고 지냈던 그윽한 삶의 향기와 정취를 흠뻑 맡게 해주며 메마르고 풀죽은 삶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기에 충분하다.

 

 

허상문  ---------------------------------------------
   문학평론가. 영남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문학평론집: ≪문학과 변증법적 상상력≫, ≪현대문학비평론≫. 영화평론집: ≪우리시대 최고의 영화≫. 산문집: ≪시베리아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실크로드의 지평에 서서≫, ≪바람의 풍경≫ 등 다수의 저서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