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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10월호, 세상마주보기] 뱀과 마주하다 - 방민실

신아미디어 2014. 2. 3. 08:40

"스스로 헤쳐 나갈 용기가 있다는데 말릴 이유가 없다. 아버지가 그러했듯 아들이 제 길에 대한 물음과 답을 얻어내며 스스로 찾아가길 지켜봐 줄 뿐이다. 심지가 굳은 놈이니 잘해낼 것이다."

 

 

 

 

 

 뱀과 마주하다      방민실


   중학교 때였는지 그보다 더 어릴 적인지 시기는 가물가물하다. 아버지를 따라 구룡평야에 위치한 열 마지기 논에 갔다 되돌아오는 길이었다. 아버지를 한참 앞서서 논둑길을 맨발로 촐랑거리며 걷고 있었다. 발가락 사이로 진흙기둥이 솟아오르는 모습이 마냥 재미있어 눈은 쭉쭉 미끌려 올라오는 발가락 사이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한참을 신이 나 걷는데 가시권 안에 무엇이 불쑥 들어왔다. 아니 그보다 먼저 등골을 서늘케 하는, 공기 중에 긴 혓바닥을 휘둘러 허공을 쓸어 담는 소리가 먼저였다. 뱀이었다. 서로를 확인하는 순간 둘 다 얼음이었다. 제 몸의 절반을 빳빳이 쳐든 뱀과 두어 걸음 사이에 두고 대치 아닌 대치상황이 벌어졌다.
   몇 초간 머릿속 역시 얼어버렸다. 내 짧은 생이 이렇게 마감되고야 마는구나 싶었다. 다행히 잠시 후 내 등 뒤로 아버지의 기척이 들렸다. 그러나 난 뒤도 돌아볼 수 없었다.
   “아부지 뱀이유~ 뱀~.”
   여전히 뱀과 마주한 채로 다급하지만 낮은 목소리로 아버지께 알렸다.
   뱀과 마주한 농로 옆으로 폭이 좁은 농수로가 있고 그 옆으로 농로가 나란히 하나 더 있었다. 내 말을 들은 아버지는 내 뒤에서 훌쩍 농수로를 건너 옆 농로로 넘어가더니 그대로 앞서 가시는 게 아닌가.
   여전히 나는 뱀과 대치중이었으므로 가시권 밖으로 나가는 아버지를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피붙이에 대한 배신감이 이런 것이구나 싶어 어찌할 바 모르는데, 그 순간 겁을 집어먹고 있는 나쯤은 별거 아니라는 듯 뱀 역시 논물 속으로 스르륵 사라졌다. 허탈했지만, 아버지에 대해 의문이 들었지만, 한편 자식에 대한 애정을 호들갑스럽게 표현하지 않는 분다운 모습이 잊히지 않게 되었다.
   잽싸게 아버지 뒤를 쫓으면서도 아버지께 왜 그냥 가셨느냐 묻지 않았다. 차차 그 물음은 내 안에서 일었고 나름 답을 찾았다. 그날 이후 뱀이라면 무조건 무섭게 느껴졌던 선입견이 싹 사라졌으니 새로운 자각이 든 셈이다.
   차츰 뱀과 마주 서 있던 순간을 떠올리면 공포와는 거리가 먼 감정이 솟았다. 아마 아버지는 독이 없는 물뱀이었고 새끼 뱀이라는 걸 아셨을 것이다. 그 일은 뒤늦게 나뿐 아니라 뱀도 놀랐으리란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 뒤로도 뱀에 놀라긴 해도 징그럽다는 일반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있다. 그래서인지 뱀은 나에게 주로 새로운 사고에 닿아있다. 만화나 티브이에서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을 때 사람 머리 위에 반짝하는 알전구를 그려 표현하지만 내 머리 위에는 새끼뱀 한 마리 동동 떠 있어야 하지 않을까. 더불어 그 일로 누군가의 겉모습에 선입견을 갖거나 위축되지 않는다. 속에 있는 덩치를 보려 애쓰는 까닭이다.
   아버지는 당신이 쌓은 지식을 나눠주지 않으셨다. 당신이 의도했든 안 했든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쌓도록 내버려 두셨다. 내 아이에게도 이러쿵저러쿵 하지 않으니 그 점은 아버지께 배운 셈이다.
   그렇다고 아이가 학교를 중도에 그만두겠다고 말했을 때 처음부터 그리하라고 동의할 순 없었다. 졸업을 코앞에 두고서 굳이 그래야겠냐고 묻고 또 물었지만 아이의 결심은 굳었다. 아직 무엇을 전공해야 할지 알아내지 못했다며 떠밀려 대학에 가고 싶지 않단다.
   아들이 쪽지를 남겨두고 떠나고 없는 거실에 컹컹 울려 퍼지는 내 울음이 낯설었다. 내 울음소리라기보다 마치 한 마리 짐승의 울음소리 같았다. 어쩐지 내가 울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내가 왜 우는 거지? 아이가 제 스스로 자신의 길을 결정하는 걸 기뻐해야지 않을까. 울음은 어쩌다 일반적인 생각에 굳어진 나 자신이었다.
   돌이켜보니 몇 달 전부터 불쑥불쑥 생각 많은 얼굴로 제 진로를, 담임에 대한 실망을 털어놓았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아들이 다지고 다져 말한 그 말토막을 지나가는 말이려니 무심했다는 사실에 미안했다. 학업이 어려워 힘들어하는 줄로만 알았었다.
   제자의 앞길보다 자신의 성과에 남을 오점 운운하는 담임의 몇 마디에 직감적으로 아들이 얼마나 실망스러웠고 숨 막혀 했을지 이해하고도 남았다. 처음 뱀을 마주하고 있던 당혹스러운 순간을 자주 회상하던 시기도 그때였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아들은 자신만의 사고방식이 있다. 충분히 생각한 일에는 뚝심이 있다. 그러니 교사나 부모의 관습적인 의견이 분분한 충고는 필요치 않음이 분명했다. 일반적인 생각을 버려야 할 때였다.
   스스로 헤쳐 나갈 용기가 있다는데 말릴 이유가 없다. 아버지가 그러했듯 아들이 제 길에 대한 물음과 답을 얻어내며 스스로 찾아가길 지켜봐 줄 뿐이다. 심지가 굳은 놈이니 잘해낼 것이다.
   지표면이 초록으로 일렁이던 여름 어느 날 옆길이 있는데 왜 그 길에서 쩔쩔매느냐며 훌쩍 옆길로 저벅저벅 걸어가시던 아버지가 나를 토닥이고 있다.

 

 

방민실  ----------------------------------------------

   ≪수필과비평≫ 등단. 200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