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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10월호, 한국민속촌, 무늬로 남은 이야기] 무늬로 남은 이야기 - 이은화

신아미디어 2014. 1. 25. 11:44

"사람은 갔어도 손길은 남았다. 사람은 바뀌었어도 길은 남았다. 흙길을 걸으며 긴 세월 그 길을 스쳤을 많은 길손들을 생각했다. 그들의 흔적을 고스란히 감내했을 집은 무늬로 세월을 말하고 길은 울퉁불퉁한 결로 시간을 버텨가고 있었다. 낡은 길에서 역사를 읽고 사람에게서 사랑을 읽는다. 훗날 다른 이들은 내게서 무엇을 읽을까. 어차피 무늬는 남이 알아보는 것인데도 문득 궁금해진다."

 

 

 

 

 

 

 무늬로 남은 이야기      이은화

 여행이 만든 무늬
   이유가 있는 여행이란 원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떠나 보면 왜 그곳으로 왔는지는 생각 밖으로 던져버리고 그곳에서 부딪히는 삶에 충실해진다. 이제는 여행이라는 말에 무게만 몽땅 실리고 계획을 세우거나 준비하는 일는 심드렁해진다. 이미 여행이 목적이니까.
   바쁘다는 말은 입에 달고 살지만 나처럼 게으른 사람도 없다. 누가 나만큼 제 할 일 안 할까마는 그러면서도 영혼이 따라올 여유조차 주지 않고 달려온 시간이었다. 어디론가 움직일 때에는 바라보지 못했다. 내 모습이 어떤지, 내 주위에 누가 있는지, 내가 무엇 때문에 힘에 부치도록 벅찬지.
   여행은 이별이었다. 어느 때부터인지 며칠 머물던 곳을 떠나올 때 마음을 내리누르는 감정이 하나 있었다. 처음에는 조금 당황했었다. 이 느낌이 뭐지 싶었다. 몇 차례의 여행을 하면서 반복되던 감정의 정체를 알았다. 그건 이별이 주는 아픔이었다. 늘 그곳에서 마지막 인사를 건네며 느꼈던 작은 동통이었다. 돌아와 보니 그곳만이 이별의 장소가 아니었음에 조금은 생뚱맞았던 그 경험이 순간순간과 이별하며 사는 연습을 하라 한다. 그래서 내게 여행은 조금은 가슴 시린 이별연습이다.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나를 사랑하고 퍽이나 좋아한다는 것도 여행을 다니면서 확인하는 즐거움이다. 여행은 오롯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고 어수선하고 분주한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 가능한 쉼이었다. 하릴없이 사는 삶 가운데에서도 늘 분주한 마음과 번잡한 생각이 떠나지 않는 까닭이다. 그런 내가 나에게 주는 휴식으로 모자람이 없는 여행이다.
   날을 받아놓은 여행지가 민속촌이란다. 가슴이 푸근해지는 이유가 뭐지 싶다. 익숙한 장소라거나 가까운 곳이어서는 아니었다. 그곳에 가야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좋았고 익숙한 시간과 장소를 벗어나서 나만의 일탈을 꿈꿀 수 있어 좋은 날을 받았다고 마음까지 푸근해질리야. 여행이 내게 만든 무늬가 살아있음이다.

 

 사람이 만든 무늬
   제일 먼저 반겨준 폭포가 시원했다. 인공적이기는 하나 물이 주는 친화력은 어디서나 통했다. 숙소 옆에 자리 잡은 폭포에서 모두 하나같은 표정으로 사진을 찍었다. 풍경만 찍으면 정물이지만 사람을 놓으니 역사가 된다. 훗날 날짜와 시간이 박힌 사진을 바라보는 시간여행도 즐길만한 소일거리다.
   서로를 세우고 서로를 격려하는 일에 시간을 온통 쏟았다. 상을 받는 이나 축하해주는 이가 하나가 되어서 축제를 만들었다. 진정한 수필가의 염원인 좋은 글을 쓰기 위한 조언을 듣기 위해 귀를 세우는 것에도 하나가 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 좋은 시간이었다. 여기가 아니고 이 시간이 아니면 만날 수 없는 사람들과 그들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추억임에랴.
   낯선 곳에서의 밤은 더 밝고 더 짧다. 가는 시간이 아쉬운 것은 헤어질 내일이 당겨온 아쉬움이다. 그 공간에서 누구보다 내 곁에 함께 있는 이가 소중한 까닭이다.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공간도 함께할 이에게서 얻을 것이 친밀함이 아니면 무엇이랴.
   삶의 질을 결정한 것은 거창한 무엇이 아니다. 하찮고 작은 것 하나가 의미를 만든다. 아침에 눈을 떠서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까지 먹는 것 하나, 하는 일 하나, 자는 일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이렇게 여름날의 끝자락에서 새로운 의미 하나를 건졌다.
   행사는 계획대로 진행되고 마무리되어야 본전이다. 남는 게 없다. 진행하고 집행하는 자들에게는 늘 모자란 것이 행사이지만 여름날 민속촌에 모인 수백 명이 모여서 치르는 하나의 행사가 그리는 그림은 완전했다. 같은 마음으로 서로를 보듬는 마음만으로도 남긴 장사를 했다. 해마다 치르는 그림의 배경이 다를 뿐, 얹어놓은 사람이 만든 무늬는 사랑이다.

 

 세월이 만든 무늬
   앞서 간 일행과 합류를 위해 걸음을 재촉해야 했다. 들어선 길이 아까 그 길이 아니다. 그러나 어디든 입구나 출구로 통하는 길이 있으려니 하는 마음에 마음에 내키는 길로 들어섰다. 들어가면서 보았던 길이 아닌 것을 보니 일행과는 더 멀어진 셈이다. 마음과 달리 함께하는 이가 있어 걸음은 더 느려지고 있었다. 이제는 일행을 찾기보다 길에서 나의 눈을 붙드는 것에 마음이 가고 있었다.
   오래된 그림처럼 친숙한 가옥들이 눈에 들어왔다. 가늘게 꼬아 만든 줄로 막아 놓은 집안이 궁금했다. 터가 땅보다 낮은 부엌이다. 낮이건만 저녁처럼 어두침침한 내부에는 안주인이 오랫동안 닦고 매만졌을 소반이 부뚜막에 정물처럼 얹혀 있다. 물항아리가 세월이 무색하게 견고한 자태로 아궁이 옆에 놓여있다. 모자처럼 이고 앉은 항아리 뚜껑은 세월의 더께를 그대로 안은 나무뚜껑이다. 빛이 허옇게 바랜 나무는 사람 손을 탄 흔적으로 만든 결로 아로새긴 무늬를 지니고 있다. 사람이 만든 흔적을 읽다 보면 역사가 보인다. 이미 솥뚜껑은 세월이 만든 역사였다.
   한 떼의 사람들이 줄지어 앉은 곳에 반가운 얼굴들이 섞여 있었다. 줄타기를 보는 중이었다.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체구가 크지 않은 이가 줄을 감싸는 발길은 야무졌고 크지 않은 목소리임에도 청중을 쥐락펴락하며 장내의 호흡을 맞췄다. 항아리를 이고 줄을 타던 이가 출렁했다. 순간 짧은 탄성이 관중석에서 터졌다. 땅에 떨어진 항아리는 산산조각이 났지만 침착하게 다시 올려받은 항아리로 시도하면서 침착하게 웃음을 잃지 않았다. 보는 이들이 박수로 격려를 보탰다. 오랜 경험에서 나오는 여유가 묻어났다. 그가 내게 남긴 무늬가 이것이리라.
   사람은 갔어도 손길은 남았다. 사람은 바뀌었어도 길은 남았다. 흙길을 걸으며 긴 세월 그 길을 스쳤을 많은 길손들을 생각했다. 그들의 흔적을 고스란히 감내했을 집은 무늬로 세월을 말하고 길은 울퉁불퉁한 결로 시간을 버텨가고 있었다. 낡은 길에서 역사를 읽고 사람에게서 사랑을 읽는다. 훗날 다른 이들은 내게서 무엇을 읽을까. 어차피 무늬는 남이 알아보는 것인데도 문득 궁금해진다.

 

 

이은화  ---------------------------------------------
   ≪수필과비평≫ 수필 등단. ≪수필시대≫ 평론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