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수필과 비평/수필과비평 신인상 수상작

[수필과비평 2014년 1월호, 제147호 신인상 수상작] 책 - 김덕조

신아미디어 2014. 1. 3. 14:04

"책을 읽으며 책을 모으며 나는 책을 푸대접했다. 언제라도 찾아보기 쉽게 손닿는 곳에 밀쳐두는 버릇 때문에 책들이 발에 밟히기도 하고, 책장을 접어 구기기도 한다. 문장을 읽고 참 좋은 표현이라며 밑줄을 벌겋게 그었다. 다시 책갈피를 펼 때 그 구절이 먼저 눈에 들어와 반가웠다. 조용히 미소를 머금게 하는 책은 깊은 사색에 잠기게도 한다. 책을 끼고 잠든 밤에는 오랜만의 반가운 친구가 꿈에 보였다."

 

 

 

 

 


 책      김덕조


   책이 가르쳐주는 길을 따라 가고 있으니 낯선 다른 세계가 눈에 들어찬다. 책에서 가만 눈을 떼면 책을 읽지 않을 때처럼 앞집이 보이고 앞산 또한 덩그렇게 눈에 들어온다. 책을 가령 꿈의 세계라 하면 책에서 눈을 돌렸을 때의 세계는 저녁 찬거리를 사러 시장나들이를 해야 하는 현실이란 마당이다.
   책상 앞에 앉아 나는 꿈과 현실 사이를 오가는 놀이에 빠져 있다. 그렇다고 정신없이 책에 푹 빠져있는 상태는 물론 아니다. 대개의 주부들이 그렇듯이 집안 청소며 빨래를 주물러야 하고 저녁은 무엇을 할까 하는 고민에 빠진다. 끼니때는 것이 어쩌면 그리도 빨리 다가오는지 돌아서면 점심, 돌아서면 저녁 걱정을 해야 한다.
   그런데 잠깐이나마 그런 일상적인 일에서 벗어날 수 있는 틈새가 책 읽기다. 책갈피 속의 글자에 눈을 팔고 있으면 조금이나마 가사노동에서 해방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책은 그런 점에서 일종의 위안거리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위안을 일삼아 책에 매달리는 것은 아니다. 책 속의 여행이란 말을 떠올리면 책에서 받는 이러저러한 눈요기 또한 허술하게만 다룰 수 없다. 책은 일품요리 같은 여행가이드다.
   내가 처음 본 책은 엄마의 장롱 속에 있던 한글로 내려쓴 소설책이다. ≪장화홍련뎐≫과 ≪심쳥뎐≫ 같은 필사본 책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누런 꺼풀이 닳도록 읽고 눈시울을 붉게 적시던 엄마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책 속에서 사르트르를 만난 적이 있다. ≪구토≫를 읽으면서 왜 하필이면 구토일까 하고 궁금해했다. 책갈피는 오래되고 인쇄도 눈에 흐려 쉽게 책장이 넘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무슨 의무라도 짊어진 느낌으로 글자 하나하나를 짚어나가듯 읽었다. 일기체 서술형식이라 그나마 책을 읽어나가는 데 조금은 흥미를 얻었다. 시각, 촉각, 후각을 통해 존재의 이유를 찾고자 했다. 인간의 삶의 의미를 찬양하며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언가가 잘못 되어간다는 것을 알면서, 그럴 거라면서도, 지식인의 상식으로는 구토를 느끼기 시작한다. 작품은 그 내용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구토≫는 사회 현상이며 자기존재와 사물의 인식을 어떻게 감지하며 어떻게 그것을 소화시키느냐를 생각하게 했다. 조금 지루했지만 인간의 내면을 파고드는 흥미에 끌려들기도 했다.
   어느덧 밖에서 들어오던 햇볕은 잔 여울만 남긴 채, 멀어지고 있다. 소파에 길게 누워 책을 배 위에 얹고 피곤한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났는지 허허 벌판에 누워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돌아누우려고 몸을 비틀어 보는데, 움직일 힘조차 없다. 무언가가 몸을 결박하고 있는 것 같다. 손바닥으로 배 위를 쓸어보는데 웬 모래알이 목까지 차고 오른다. 목만 움직일 수 있을 뿐, 나는 어딘가에 갇혔다는 생각이 든다. 혹, 걸리버의 소인국인지도 모르겠다. 소인국에서라면 걸리버처럼 탈출해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발버둥이라도 쳐야 하나, 아무도 없어요, 소리를 질러 보는데 소리는 입 밖으로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다. 누가 도와주었으면 좋겠다.
   내 방에서 누군가가 떠들고 있다. 누구냐고 소리를 질렀지만 목소리는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어둠에 가려 있는 부엌 벽을 짚어가며 내 방으로 간다. 조금 전에만 해도 묶인 상태였는데 언제 풀렸는지 또 움직인다.
   책장 구석진 자리에서 공자가 제자들을 모아놓고 설하고 있다. 죽간에 받아 적는 사람은 안회라는 제자다. 공자가 그 제자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다. 말은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어느새 내 방에서 떠들고 있다. 그러고 보니 내 방이 조금 낯설지만 분명히 내 방이다. 방에 들어가려고 한 발 움직이는 순간 무언가에 부딪힌다. 발에 밟힌 것은 책에서 떨어져 나온 문장이며 단어들이다. 내가 쓰다 만 자음과 모음들이 마구 흩어져서 서로 부딪히며 킥킥거리며 웃기도 하고 희롱하듯 춤을 추고 있다. 나는 귀를 막았다. 내가 펼쳐 놓은 책 속에서 나온 글자들이 줄을 지어 자막처럼 떠다닌다.
   꿈속에서도 잡힐 것 같은 현실을 지각하고 있었을까, 벽을 더듬어 보았다. 어렴풋이 스위치를 찾아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찰칵! 춤을 추듯 흐르던 글자들이 화들짝 놀라며 펼쳐진 책 속으로 찾아들어가는 소리에 무엇인지 요란스런 기척이 있다. 툭! 하고 책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잠깐 동안의 꿈이었다.
   책을 읽으며 책을 모으며 나는 책을 푸대접했다. 언제라도 찾아보기 쉽게 손닿는 곳에 밀쳐두는 버릇 때문에 책들이 발에 밟히기도 하고, 책장을 접어 구기기도 한다. 문장을 읽고 참 좋은 표현이라며 밑줄을 벌겋게 그었다. 다시 책갈피를 펼 때 그 구절이 먼저 눈에 들어와 반가웠다.
   조용히 미소를 머금게 하는 책은 깊은 사색에 잠기게도 한다. 책을 끼고 잠든 밤에는 오랜만의 반가운 친구가 꿈에 보였다.

 

 


김덕조  --------------------------------------------------
   한국방송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드레문학회 회원.

 

 

 

신인상|당선소감

   산이 그곳에 있어 오른다고 등산가는 말합니다. 한발 한발 힘들게 오르다 보면, 어느덧 정상이 눈앞에 나타납니다. 수필의 길도 산을 오르는 일만큼 힘들고 고달프다는 말을 되새기며,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수필이란 새로운 길에서, 찬찬히 깊이 있게 관조하라는 뜻으로 등단의 기쁨과 글쓰기의 기회를 주는 것 같습니다.
   수필 쓰는 일을 수행자에 비유하신 선생님! 항상 지켜보시며 수필의 길로 이끌어주신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항상 용기와 격려를 아끼지 않은 문우들께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늘 격려와 용기를 주는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들, 모두 고맙고 사랑합니다.
   새로운 삶의 길을 터주신 수필과비평사에도 깊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