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비평 2013년 10월호, 사색의 창] 내 임은 누구실까? - 강서
"우리는 결혼해야 할 사이라는 말을 하지 못한 채 절망스러운 날들이 지났다. 결혼에 대한 앙증맞은 내 생각이 산산조각 나고 안도의 숨을 내 쉴 수 있는 일이 드디어 생겼다."
내 임은 누구실까? - 강서
외사촌 언니가 결혼을 했다. 면사포를 쓰고 대문에서 마루를 오르기 전 신발 벗는 곳까지 깔린 조짚을 밟으며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잔칫 집에 모인 우리 친척들과 동네 사람들이 예쁘다고 한마디씩 했다.
내 나이 예닐곱 살 때의 풍경이다. 외할아버지께선 평소의 갈옷(풋감으로 염색한 제주의 노동복) 대신 한복을 입고 다른 할아버지들과 마루에 앉아 계셨다. 내 눈에 비친 엄숙하고도 설레는 광경이었다. 왜냐하면 나도 언젠가는 예쁜 면사포를 쓰고 조짚을 융단 삼아 깔아놓은 마당을 걸어 결혼식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순간, 나는 형부 될 분의 집과 외사촌 언니네 집의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어느 정도인지 감이 왔다. 오호라, 결혼은 그 정도의 거리에 사는 사람과 하는 것인가 보다. 그럼 나의 짝은 누굴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동네에 생각나는 남자 아이가 없었다.
나는 결혼을 하지 못할 것인가? 하는 절망스러운 생각을 하다가 불현듯 한 아이가 생각났다. 그러나 이내 숨이 턱 막혔다. 그 애와는 절대 결혼하고 싶지 않은데 세상에, 내가 그놈에게 시집을 가야 하다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눈물이 나왔다.
학교 짝꿍인 그 애는 받아쓰기를 서로 바꾸어 채점할 것이라는 선생님 말씀에 틀린 부분을 지우개로 지우고 나에게 백점 맞은 걸로 하라고 윽박지른 아이였다. 더군다나 백점이라는 글씨를 빨간 색연필로 쓸 때는 선생님의 필체처럼 쓰지 않으면 자리에 앉지 못하게 하겠다고 나에게 엄포를 놓았다. 초등학교 1학년이 어떻게 선생님의 글씨를 흉내 낼 수 있을까. 참 웃긴다고 생각했다. 나는 겨우 겨우 백점이라는 글자를 그려주었다. 그러면서 글자 하나 제대로 쓸 줄 모르는 바보라고 생각하며 분노에 차 있었다. 틀린 것을 맞는 것으로 해 준 것 때문에 얼굴은 상기되었고, 당장에라도 지옥으로 떨어질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린 마음에도 뭔지 모르지만 나의 인생에 큰 오점을 남겼다는 속상함 때문에 화장실에서 남몰래 울었다. 거짓말하면 피노키오의 코가 길어지는 것에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큰 벌을 그 애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애가 미운 데에는 또 다른 것도 한몫을 거들었다. 그 애는 일본에 있는 아버지가 보내주어서 학용품은 거의 일본제품을 갖고 다녔다. 나도 외삼촌이 일본에 계셔서 몇 가지는 갖고 있었지만 그 애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일제 학용품에 무심코 옷이 스치거나 손이 닿으면 그럴 때마다 책상을 반으로 금을 긋고 조금씩 더 넓게 자리를 차지했다. 그 애 때문에 나는 학교생활이 즐겁지 않았다.
그 애에게 우리는 결혼해야 할 사이라는 말을 하지 못한 채 절망스러운 날들이 지났다. 결혼에 대한 앙증맞은 내 생각이 산산조각 나고 안도의 숨을 내 쉴 수 있는 일이 드디어 생겼다. 앞집의 오빠가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놀라운 일은 신부가 그 오빠네 뒷집 처녀였다. 나는 혼란에 빠졌다. 지금까지의 내 생각대로라면 그 언니와 결혼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좀 더 먼 동네의 신붓감과 결혼을 했어야 했다. 얼마 후 사촌 오빠도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이번에도 신랑과 신부 집의 거리는 과히 파격적이었다. 엉뚱한 결론을 내려 혼자 마음고생 한 것을 나는 그제야 깨닫게 되었고 조그마한 일에도 그 애를 미워했던 것을 반성했다.
그러나 재미있는 일은 정작 어른이 되어서는 어릴 때 생각했던 바로 그 동네의 다섯 살 위의 남자와 결혼을 했다는 사실이다.
강서 ------------------------------------------------
본명: 강순희. ≪수필과비평≫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