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비평 2013년 10월호, 인연] 내 인생의 멘토 - 송준호
"“송 선생, 오늘 일을 잊지 말아요. 송 선생도 언젠가는 교수가 될 거고, 그러다 보면 후배나 제자의 앞일을 여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하는 때가 오게 돼 있어요. 아, 이건 내 말이 아니라 옛날에 내 은사님께서 들려주셨던 말씀이에요. 나한테 대학원 첫 학기 등록금을 주시면서 그 어른이 꼭 그렇게 말씀을 하셨거든…….”"
내 인생의 멘토 - 송준호
아마 가을 어느날이었을 것이다. 우공 선생님을 처음 뵙던 게……. 그날 나는 다른 선생님의 심부름으로 선생님 댁을 처음 방문했다. 논문도 책도 아닌 등산용 침낭을 빌리러 갔던 것이다. 그때 나는 석사과정 두 학기째인 스물다섯 살 대학원생이었다.
첫 대면인데도 선생님은 ‘자원방래한 유붕’이기나 한 것처럼 나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아마 당시 서른여덟 언저리였을 선생님은 이마가 훤하시고 구레나룻이 거뭇거뭇했다. 선생님의 그 형형하게 빛나던 눈빛은 한동안 내 기억 속에 또렷이 자리했다.
그날 이후 나는 또 선생님을 자주 뵙지 못했다. 대학원에 다니는 동안 선생님의 강의를 신청해서 들을 기회가 없었던 게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그로부터 1년 남짓 지난 겨울 어느 날 나는 선생님 연구실을 노크했다. 막 인쇄되어 나온 내 석사학위 논문을 전해드리기 위해서였다. 선생님은 논문을 받아들고는 건성으로 제목만 쓰윽 훑어보더니 그러셨다.
“그래요, 애썼어요. 그건 그렇고, 오늘 혹시 저녁에 별다른 약속 없으면 나한테 시간을 좀 내줄래요?”
동백장 여관 근처 식당에서 다시 만났을 때 선생님은 내 잔에 먼저 소주를 따라주셨다. 놀랍게도 그날 선생님은 내 논문을 꼼꼼히 읽고 메모까지 해오셨다.
“짧은 시간에 그런대로 석사논문의 꼴은 잘 갖추었어요. 그런 뜻에서 한 잔.”
“본격적인 공부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거 알죠. 자, 그걸 잘 알아들었다는 의미에서 한잔할까요?”
선생님은 그렇게 연거푸 건배를 제안하셨다.
이듬해 봄, 나는 박사과정 입학을 포기하고 한동안 방황했다. 입시학원에서 강의도 했고,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입사시험이라는 것도 치러봤다. 그러다가 여름이 시작될 무렵 어느 날 선생님이 찾으신다는 말을 듣고 나는 오랜만에 선생님의 연구실을 노크했다.
“그동안 해온 게 아깝잖아요. 이것저것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다시 공부 시작해요. 뭘 따지고 계산해서는 안 되는 게 공부하는 세계거든. 어때요, 우리 낮술이나 한잔하러 갑시다.”
그날 선생님과의 낮술이 없었다면 내 삶은 또 어떻게 달라졌을까. 다음날부터 나는 다시 박사과정 입학준비를 했고, 선생님과 함께한 무수히 많은 시간들이 시작되었다.
선생님은 이러저런 핑계를 대가며 술을 무던히도 자주 사주셨다. 선생님 댁에서 밤늦게까지 마시다 쓰러져 잠들기도 여러 날이었다. 사모님이 끓여주신 해장국을 먹는 자리에서는 또 간밤에 원고라면서 갖고 가서 읽어보라고 하실 때 선생님은 마징가제트 같았다.
박사과정에서도 나는 선생님의 강의를 듣지 못했다. 복잡한 사정으로 선생님은 내 학위논문의 심사위원조차 맡지 못하셨다. 그런데 심사과정에서 내 논문을 꼼꼼히 읽고 내용과 자료를 보완해 주신 분이 선생님이었다.
논문이 끝나고 나서는 단편소설 하나를 써서 보여드렸더니 그걸 컴퓨터 화면에 올려놓고 함께 밤을 새우면서 소설 쓰는 요령을 꼼꼼하게 가르쳐주신 것도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입버릇처럼 그러셨다. 공부가 지지부진하면 소설이라도 쓰고, 소설도 잘 안 되면 술이라도 마셔야 한다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내가 ≪월간문학≫ 신인상에 당선되었을 때 선생님은 또 그러셨다. 일 년에 단편 하나 이상은 무슨 일이 있어도 써서 발표하라고.
선생님은 가난한 시간강사인 내게 일거리도 참 많이 갖다 주셨다.
그리고 여기, 내가 평생 잊지 못하는 하루가 있다. 그날 나는 아침 일찍 연구실로 선생님을 찾아가서 염치 불고하고 한 가지 부탁을 드렸다. 아무개 교수님께 전화라도 한 통 해주십사 하는 것이었다.
그 무렵 나는 시간강사를 삼 년째 하고 있었다. 당연히 전임 자리에 안달이 나 있었다. 마침 친구가 전임교수로 있는 청주의 한 대학에서 내 전공 분야 교수를 공채한다는 소식을 듣고 무작정 지원서류를 제출했다. 그 친구는 내가 지원한 학과 교수들 중 한 사람이 선생님과 친분이 두텁다는 첩보를 전해주었다. 나로서는 망설이고 말고가 없었다.
자초지종을 들으신 선생님은 오후에 연구실로 다시 들러달라는 말씀만 하시고는 출석부와 교재를 챙겨들고 서둘러 강의실로 가셨다. 나중에야 알게 된 거지만 선생님이 갖고 계신 그 친분이라는 게 연전에 수능시험 출제를 들어가서 함께 지내신 정도였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나는 선생님의 연구실을 다시 찾았다.
“우리 지금 당장 그 학교로 쳐들어갑시다.”
나를 보시자마자 선생님은 가방부터 챙기더니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청주로 내 고물차를 몰았고, 조수석에 앉으신 선생님은 지난 이야기를 한참 동안 들려주셨다. 당신이 학비가 없어서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고 야간 고등학교에서 일할 때 대학원 입학원서를 사들고 학교로 직접 찾아오셨다는 선생님의 은사이신 구인환 선생님 이야기도 그중 하나였다.
선생님은 그 학과 교수님들과 연락을 미리 해두신 모양이었다. 청주에 도착했을 때 선생님은 식당 이름 하나를 대시면서 그쪽으로 가자고 하셨다. 삼겹살집으로 기억하는데 그곳에는 이미 교수님들 세 분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날 선생님은 당신보다 젊은 교수들이 건네는 잔을 그분들이 마치 당신의 은사님이라도 되는 듯 한 잔도 거절하지 않고 두 손으로 깍듯이 받으셨다. 민망하게도 나는 선생님께서 내 주머니에 미리 찔러주신 카드로 몇 차례 더 이어진 술자리를 모두 계산했던 것이다.
“우리 송 선생, 성실하고 재능이 많은 친구라 학과에서 쓰일 데가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밤늦게 그분들과 헤어지면서 선생님은 또 깍듯이 인사를 했다. 나는 민망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해서 그저 멍청히 서 있다가 그분들에게 인사나 꾸벅꾸벅 하는 게 고작이었다.
전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저 앞에 두고 선생님은 조금 일그러진 목소리로 차를 잠깐 세워달라고 했다. 차문을 급히 열고 밖으로 나간 선생님은 길가의 메마른 풀밭에 그날 드신 걸 모두 쏟아내는 게 아닌가.
선생님의 등을 두드리고 쓸어드리고 하다가 나는 또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때 선생님은 마흔일고여덟쯤 되셨을 것이다. 지금의 나보다 훨씬 젊은…….
나는 극구 마다하시는 선생님을 뒷자리에 편히 앉으시게 하고 다시 출발했다. 고속도로에 진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잠이 드신 줄 알았던 선생님의 말씀이 뒷자리에서 들렸다.
“송 선생, 오늘 일을 잊지 말아요. 송 선생도 언젠가는 교수가 될 거고, 그러다 보면 후배나 제자의 앞일을 여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하는 때가 오게 돼 있어요. 아, 이건 내 말이 아니라 옛날에 내 은사님께서 들려주셨던 말씀이에요. 나한테 대학원 첫 학기 등록금을 주시면서 그 어른이 꼭 그렇게 말씀을 하셨거든…….”
나는 또 가슴이 먹먹해져서 아무 말도 못했다.
이듬해 봄에 나는 지금 일하고 있는 대학으로 전임 발령을 받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똑같은 시기에 선생님은 모교인 서울대 국어교육과로 자리를 옮기셨다. 이제 이곳에서 내 할 일은 다 마쳤다는 듯. 열심히 공부하고, 정성스럽게 가르치고, 소설도 부지런히 쓰며 바삐 살라고, 이곳을 떠나시며 선생님께서는 그렇게 당부하셨다.
퇴임 후 좀 한가해지시면 선생님과 그 시절 얘기를 도란도란 나누며 밤이 새도록 술을 마시고 싶다.
송준호 ------------------------------------------------
전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월간문학≫ 신인상 소설 부문 당선. 우석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