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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9월호, 사색의 창] 라면 한 그릇 먹고 싶다 - 임만빈

신아미디어 2013. 12. 14. 22:40

"지나간 이야기는 세월 속에 꼭꼭 묻어 두어야 한다. 주책없이 끄집어내어 주물럭거리면 울컥 울음이 터져 나올 수도 있다. 사소한 것이라도 과거를 통과하면 그리움으로 색칠해져 아름답게 보이는데, 인생의 가장 화려한 젊은 한때를 시간이라는 투명한 프리즘 속으로 통과시키라니……, 얼마나 애달픈 회귀본능을 자극하겠는가."

 

 

 

 

 

 라면 한 그릇 먹고 싶다     임만빈


   졸업 후 사십 년 만에 그녀가 방문한다고 한다. 그녀를 환영하기 위한 식사장소로 가는 동안 동기회 회장이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단편적으로 들려준다. “이혼 후 아직 혼자다. 개업은 계속하고 두 아이를 변호사로 키워 모두 결혼시켰다. 이번에 검사 사위가 한국에서 연수를 받게 되어 따라왔다.” 아무리 흘려도 마르지 않는 피눈물의 눈물샘과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는 저돌성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녀를 생각하면 두 가지가 생각난다. 양동이 가득 끓이던 라면과 입대할 때 군의학교 정문까지 따라와 손 흔들고 가던 뒷모습이.” 내가 이야기한다.
   약속한 음식점의 넓은 방으로 들어가니 동기 몇 명은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악수를 나누고 회장이 중간에 앉는다. 마침내 주인공이 방안으로 들어선다. 한 사람씩 껴안고 서양식 인사를 한다. 모두가 반가워한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들을 모두 마음속에 담고 살아 왔었구나.’ 그녀가 머릿속 모양과 현재의 모습을 연결시키려는 듯 동기들을 찬찬히 둘러보며 말한다.
   “어제 모교에 갔었어.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었지. ○○교수를 어디가면 찾을 수 있느냐고. 왜 그 교수를 찾느냐고 묻더군. 목소리를 들으니 알겠어. ‘야, 너 ○○아닌가!’ ‘아, 너.’ 악수했지. 세월이 붙어 몸은 변했어도 목소리는 그대로더군.” 길거리에서 스치면 모를 만큼 외모가 변해 있다. 퉁퉁하고 고생에 찌든 듯한 피부를 가진 저 여인이 학생시절 그렇게 야들야들하고 젊음을 품어내던 그녀라니.
   “야, 라면 끓였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누가 라면 끓였나 이야기해라.” 동기회 회장이 말한다. “내지.” 그녀가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자기 가슴을 가리킨다.

 

   지나간 이야기는 세월 속에 꼭꼭 묻어 두어야 한다. 주책없이 끄집어내어 주물럭거리면 울컥 울음이 터져 나올 수도 있다. 사소한 것이라도 과거를 통과하면 그리움으로 색칠해져 아름답게 보이는데, 인생의 가장 화려한 젊은 한때를 시간이라는 투명한 프리즘 속으로 통과시키라니……, 얼마나 애달픈 회귀본능을 자극하겠는가.
   의대 졸업반, 의사국가고시를 대비해서 허름한 집의 방 두 개를 얻어 다섯 명이 모여 공부했다. 그녀도 우리와 같이 공부를 했다. 잠은 다른 방에서 잤지만, 거의 매일 밤을 새우듯이 하면서 한 방에서 비비댔다. 남녀 간이었지만 성性이 배제된 동기생으로 생활했다. 그녀는 미국에 먼저 가서 수련을 받고 있는 약혼자가 있었다.
   이십 대 중반, 아무리 많은 양의 저녁을 먹어도 자정이 가까워지면 배가 출출했다. 해야 할 공부를 태산같이 쌓아놓고 그 시각에 잠자리에 눕는 것은 초조감이 용납을 하지 않았다. 새벽까지 공부하기로 하고 라면 끓이기를 준비했다. 철사를 둥글게 감아 만든 자물쇠를 단 대문 뒤에 바짓가랑이를 한 번씩 잡아끄는 수도꼭지가 있었다. 라면 끓일 물을 담아오는 일은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남자들만 있었다면 눈빛을 빛내가며 가위 바위 보를 해서 당번을 정했겠지만, 그녀가 있는 한 그 일을 서로 하려고 했다. 동성同性만 있는 경우와 이성異性이 섞인 형편의 차이였다. 본능일 수도 있고, 사랑이라는 싹이 땅속에서 꿈틀거리는 신호일 수도 있었다.

 

   라면을 배터지게 먹는 순간 새벽까지 공부하겠다는 다짐은 옛날이야기가 된다. 연탄불에 달궈진 온돌의 뜨뜻함은 수면제다. ‘조금만 누워서 쉬다 공부하자.’라고 사이좋게 의견의 일치를 보고 이불 속에 발을 담그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깜짝 놀라 눈을 뜨면 전등불이 밝아오는 낮의 빛에 힘을 잃고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새벽을 지나 아침이었고, 라면을 담았던 그릇들은 누가 발로 찼는지 저 위쪽에 흩어져 있었다. “아이고, 재시再試다” 정신없이 내 옆에 자고 있는 친구들을 깨우면, 아! 그녀가 내 옆자리에서 놀라 동그랗게 눈을 뜨며 일어나면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다듬고, 멋쩍은 미소를 띠기도 했었다.
   그렇게 공부하여 국가고시에는 합격하였으나 인턴 시험에는 떨어지고 군대에 입대했다. 그날 날씨는 을씨년스러웠고 군의학교 앞 도로는 황량했다. 그때 그녀가 나타나 입대하는 다른 동기들과 작별 인사를 한 후 마지막으로 내 앞에 와 손을 내밀었다.
   “만빈노, 건강하게 군대생활해라.”
   “그래, 그런데 너는 언제 미국 가냐?”
   “응, 지금 수속하고 있는데, 한 달쯤 있으면 갈 거야. 집에 갈 때 너하고 걷던 노란 은행 단풍잎이 덮인 학교 앞 길이 가끔은 생각나겠지.”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의 추억은 분명 사랑이 깃든 이야기인 것 같다. 나뿐만 아니라 같이 공부했던 친구들과 그녀의 사이에는 분명 약간은 사랑이라는 싹이 움트려고 했던 것 같다. 모두가 이십 대의 후반으로 이성만 보면 가슴이 떨리고 손에 땀이 스미어 나오던 시절이 아니던가.
   “너 내가 입대하는 날 군의학교까지 찾아와서 전송해준 일 기억 나니?”
   “그랬었나?”
   그녀가 얼버무렸다. 그렇다. 이제 육십 중반을 넘긴 나이, 풋풋한 이십대의 약간은 가슴이 아린 것도 같고, 조금은 톡 쏘는 것도 같은 풋고추 같은 사랑을 회상해 본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때 내가 그런 감정을 가졌었다면 그녀가 왜 그런 감정을 알아내지 못했었겠는가. 여자의 나이 열 살만 넘기면 남자의 눈동자에 사랑의 그림자가 조금만 스쳐도 귀신같이 알아낸다고 하지 않던가.
   식사가 끝나고 몇 번 사진을 찍는다. 박으라고, 눈물도, 흘러간 시간도, 추억도 선명하게 나오도록 잘 찍으라고. 그녀가 한 명씩 끌어안고 작별의 포옹을 한다. 차를 타고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한동안 멍하게 바라본다. 슬픔이 밀려온다. 굽이치는 강물을 따라 멀리멀리 흘러가는 돛단배처럼 그녀에 얽힌 이야기들이 속절없이 떠나간다.
   “그녀가 끓인 라면 한 그릇만 먹었으면…….”

 

 

임만빈  --------------------------------------------
   ≪에세이문학≫ 등단.  수필집: ≪선생님, 안 나아서 미안해요≫, ≪자운영, 초록의 빛깔과 향기만 남아≫, ≪나는 엉덩이를 좋아한다≫, ≪병실꽃밭≫ 등.  현재 정년퇴임 후 계명대학교 의과대학 석좌교수로 재직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