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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 2013년 9월호, 다시 읽는 좋은수필] 닭 울음 - 한흑구

신아미디어 2013. 12. 10. 08:40

"한 폭의 국기 위에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한 숨결로써 애국가를 부르는 순간, 나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순정을 감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기쁘고, 아직은 비록 약한 겨레지만, 한마음 한뜻으로 새롭고 튼튼한 국가를 이룩하리라는, 나와 똑같은 희망으로 불타는, 나의 겨레가 있다는 것이 한층 더 미쁜 것이었다. 이 한마음 이 한뜻으로 이 소원을 이루는 곳에만, 우리의 참다운 생활과 아름다운 예술과 문화가 꽃핀다는 것을 생각할 때, 나는 대한 사람으로 이러한 세대에 태어나, 나라 건설의 사명을 띠게 된 것을 큰 행복으로 생각하고 자랑하고 싶었다."

 

 

 

 

 닭 울음     한흑구

 

   닭 울음!  때를 알리는 닭의 울음은 동서고금을 통하여 항상 사람들에게 혹은 기쁨을 혹은 슬픔을 느끼게 하는 신비스럽고도 미묘한 음향이다. 예수께서는 그가 가장 사랑하시던 제자 베드로에게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모른다고 하리라.”하고 예언하셨다. 그때 베드로는 “비록 주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결코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하고 맹세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과연 예수의 말씀대로, 예수를 모른다고 했다. 그가 세 번째로 “나는 그 사람을 모르오.”하고 말할 때, 닭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베드로는 비로소 예수의 예언을 상기하고 통곡했다.
   그날 그때, 베드로의 귀를 울려 주던 그 닭의 울음은 확실히 절망적인 슬픔을 베드로에게 안겨주었을 것이다.
   오늘 아침에도 나는 닭의 울음소리에 피곤한 잠을 깼다. 가만히 누워서 자주 들려오는 기다란 닭의 울음을 들으면서, 나는 어쩐지 새로운 광명의 날이 밝아오는 듯한 유쾌함을 느끼었다. 사실은, 오늘이 두 번째 맞이하는 광복절인 것이다. 나는 작년 이날에도 새벽의 닭 울음을 들었고, 재작년 이날에도 닭 울음을 들었다. 재작년 이날에는 이북 고향에서, 날이 채 새기 전에 닭의 울음을 들었다. 그러나 그날 새벽, 닭의 울음을 듣고, 나는 별다른 감상이 없이 일어나서 조반을 먹자 곧 산으로 올라가버렸다. 그리고 나의 집이 들어앉아 있는 나의 작은 마을을 한나절 내려다보고 있었다. 뜻밖에도 이날 오후가 되어서, 평양에서 친구가 땀을 흘리면서 자전거를 타고 왔다. 왜왕倭王의 항복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오! 하느님!” 나는 감격하였다. 울었다. 너무나 기뻐서 눈물이 쏟아졌다. 40년 동안 나의 몸속에 굳어 있던 붉은 피가, 한꺼번에 용솟음쳐 심장으로 모여드는 것을 감각하였다. 아내와 애들도 다 나와 같은 마음이었고, 마을의 아이들도, 늙은이들도 다 그러하였다. 그날부터 나와 내 가족, 우리 마을 사람들, 아니 모든 대한민국 사람들은 날이 샐 때마다 새로운 희망 속에서 닭 울음을 들었고, 흥분과 감격 속에서 그 하루하루를 살아왔던 것이다. 오늘도 닭의 울음을 들으며 일어나서, 우리의 새로운 희망이 빨리 이루어지기를, 하늘을 우러러 하느님께 기도했다.
   일찍부터 서둘러대는 큰아이를 데리고, 광복절 기념식장인 서울 운동장을 향해 집을 나섰다. 거리를 휩쓸면서 몰려가는 다 같은 동포들의 틈에 끼어서 밀리어갔다. 드디어 장엄한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한 폭의 국기 위에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한 숨결로써 애국가를 부르는 순간, 나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순정을 감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기쁘고, 아직은 비록 약한 겨레지만, 한마음 한뜻으로 새롭고 튼튼한 국가를 이룩하리라는, 나와 똑같은 희망으로 불타는, 나의 겨레가 있다는 것이 한층 더 미쁜 것이었다. 이 한마음 이 한뜻으로 이 소원을 이루는 곳에만, 우리의 참다운 생활과 아름다운 예술과 문화가 꽃핀다는 것을 생각할 때, 나는 대한 사람으로 이러한 세대에 태어나, 나라 건설의 사명을 띠게 된 것을 큰 행복으로 생각하고 자랑하고 싶었다.
   식이 끝나자 병사들의 행진이 있었다. 나는 큰아이를 부둥켜안고 군중들 틈에 서서, 태극기를 선두로 행진하는 대한의 젊은 병사들을 바라다보았다. 미국 뉴욕시의 브로드웨이를 물밀듯이 행진하는 병사들을 노래한, ‘휘트먼’의 시를 생각하면서, 나는 젊은 대한 병사들의 기운찬 행진을 열심히 바라보았다. 군중 속에 서 있던 70이 넘은 한 노인은 나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오늘, 처음으로 우리 한국 병정들을 보오. 참 씩씩도 하오!”
   그는 가까스로 이렇게 한 마디 말을 마치고, 누런 손수건을 꺼내 움쑥 들어간 그의 두 눈의 눈물을 씻었다.
   나도 겨우 “예, 예.”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의 두 눈자위도 뜨거워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젊은 병사들이 행진하는… 브로드웨이를 나에게 달라! 나팔과 북의 우렁찬 노래를 나에게 달라!” 휘트먼의 이러한 노래를 나도 마음속으로 열심히 부르짖고 있었다. 

 

 

한흑구  -------------------------------------------

   한흑구(1909년~1979)님은 평양 출생. 포항수산대학 교수 역임,  《대평양》, 《백광白光》 창간,   저서 《현대미국시선》, 수필집 《동해산문》, 《인생산문》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