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비평 2013년 9월호, HEALING ESSAY] 그랬어야 했다 - 정진권
"왜 내 뒤통수가 간질거렸을까? 새치기하는 우리를 본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내 뒤통수에 와 꽂히는 것 같아서 그랬을 것이다. 나라도 뒤에 가 섰더라면 사람들이, 아 무슨 사연이 있구나 하고 양해했을 것이다. 나는 신사에게 그냥 감사의 뜻만 표시하고 뒤로 가 섰어야 했다. 새치기 다 해 놓고 지금 와서 무슨 위선이냐, 그러지 마시라.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마음 한 구석이 개운치 않다. 어째 자꾸만 염치란 말이 떠오른다"
그랬어야 했다 - 정진권
-염치廉恥에 관하여
우리 내외는 이齒가 부실해서 넉 달에 한 번 서울大 치대병원엘 간다. 오늘도 다녀왔다. 11시 40분, 함께 치료를 받고 나오는데 아내가 갑자기 저혈당이 온다고 했다. 우리 내외는 당뇨도 함께 앓는다. 나는 멜가방에서 비상용 초콜릿 한 알을 꺼내 주었다.
“멀리 못 가겠어요. 저기 구내식당으로 가요, 우리.”
모처럼 거하게 외식 한번 하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서울大병원 구내식당은 초만원이었다. 겨우 식권 두 장을 사 들고 들어갔다. 이번에는 밥 타려는 사람들이 30여 미터,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이걸 어쩌나, 줄 끝에 가 서서 차례를 기다리다가는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데-. 나는 줄 앞쪽으로 가 60대 신사 한 분에게 간곡히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 사람이 저혈당이 오나 봅니다. 좀 끼워 주셨으면 하고요.”
신사는 그러라며 자기 앞을 터 주었다. 나는 아내에게 식권 한 장을 주고 뒤로 가려 했다. 그때 신사가 말했다.
“함께 들어오세요.”
내가 그때 뭐라고 말했는지는 지금 잘 생각이 안 난다. 나는 사양 한 번 않고 쑥 들어가 아내 뒤에 섰다. 그러니까 신사 앞이다. 참 염치없는 새치기였다. 아내와 마주앉아 밥을 먹는데 자꾸만 뒤통수가 간질거렸다. 정신이 좀 들었던가 보다.
자, 화제 좀 바꾸자.
나는 1983년 3월에 한국체육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직급은 전임강사, 담당과목은 국어(언어와 문학), 한문, 문장론. 그 2년 후 조교수, 또 그 3년 후 부교수, 그리고 그 5년 후엔 교수(정년보장 교수)로, 승진은 순조로웠다. 그리고 2000년 8월에 정년으로 학교를 물러났다. 어느덧 정년 13년차다.
이 학교에도 여러 학과가 있지만 나는 주로 체육학과 학생들을 가르쳤다. 내 연구실 청소를 도맡아 하던 그 여학생 아이들, 외국에 시합, 전지훈련 다녀오면서 열쇠고리, 볼펜, 토속주, 티셔츠 같은 것들을 선물로 사오던 그 남학생 아이들,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고 살까? 착한 아이들이었다.
나는 늦은 나이여서 후배교수(교수로서는 선배)들의 참 깍듯한 대접을 받았다. 학교 밖으로 점심 먹으러 가서나 오후에 테니스 치고 샤워하고 맥주 한잔 할 때나 가끔 있는 교수들의 회식 자리에서나 그들은 늘 나를 상석에 앉혔다. 더러는 선물 받은 거라며 양주도 한 병씩 보냈다. 이제 그들도 대부분 정년으로 학교를 떠났다. 따뜻한 사람들이었다.
내 연구실은 2층 서북향이었다. 나는 거기서 책 읽고 글을 썼다. 책은 주로 우리 고전문학, 글은 거의 수필과 수필문학론이었다. 석양, 나는 가끔 선물 받은 위스키 한 잔을 따라 들고 창변에 섰다. 운동장에 저녁볕이 엷어지고 있었다.
이 학교는, 정년 후 명예교수가 되면 2년 더 강의를 할 수 있다. 주 6시간 내외, 그 대신 연구실은 곧 비워주어야 한다. 그러면 낯선 강사실로밖엔 갈 데가 없다. 어제까지 연구실 있던 사람이 그 연구실 내주고 강사실로 가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다행히 후배교수 한 사람이 자기 연구실 키 하나를 깎아다 주며 연구실을 같이 쓰자고 했다. 나는 아무 사양 없이 그 키를 받았다.
이제 생각해 보면 내가 그 키를 받은 것은 참 염치없는 짓이었다. 나는 연구실 때문에 언짢은 마음이어서 아무 생각 없이 받았겠지만 그는 늘 혼자 쓰던 연구실을 남과 함께 쓰자니 얼마나 불편했겠는가? 내가 학교에 2년 더 남아 있었던 것도 염치없는 짓이었다. 박사학위를 받고도 시간강사 한 자리 못 얻고 헤매는 젊은이가 얼마나 많은가? 강사료 몇 푼이 아까워서 그랬던가?
나는 한국체육대학교 18년을, 착한 학생들 가르치며 따뜻한 교수들과 교유하며 과분한 연구실에서 공부하며 순조롭게 승진하며 명예교수에 임명되며, 교수로서 누릴 것은 다 누렸다. 그렇다면 학교 규정에 관계없이 2년은 무슨, 지체 말고 떠났어야 했다. 그러면 후배교수의 키 받는 일도 당연히 없었다. 2년 다 해 놓고 이제 와서 무슨 위선이냐, 그러지 마시라. 10년도 더 된 일이지만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 한 구석이 개운치 않다.
자, 다시 서울大병원 구내식당으로 돌아가 보자.
왜 내 뒤통수가 간질거렸을까? 새치기하는 우리를 본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내 뒤통수에 와 꽂히는 것 같아서 그랬을 것이다. 나라도 뒤에 가 섰더라면 사람들이, 아 무슨 사연이 있구나 하고 양해했을 것이다. 나는 신사에게 그냥 감사의 뜻만 표시하고 뒤로 가 섰어야 했다. 새치기 다 해 놓고 지금 와서 무슨 위선이냐, 그러지 마시라.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마음 한 구석이 개운치 않다.
어째 자꾸만 염치란 말이 떠오른다.
정진권 --------------------------------------
수필집 ≪푸르른 나무들에 저 붉은 해를≫, ≪분이별, 삼돌이별≫ 등. 역해서 ≪한시를 읽는 즐거움≫, ≪한국고전수필선≫ 등, 그 밖에 선집, 논저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