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문학 2013년 여름호, 수필] 비 오는 날 - 현옥희
"비를 맞으면 안 된다는 딸아이의 성화가 아니라면 바바리코트 깃을 세우고 기분을 내어보고 싶다. 오래 전에 보았던 영화의 ‘카사블랑카의 연인’이 되어도 좋고, 한 번쯤은 가슴 절절한 사랑의 열병을 앓는 여인이 되어 비련의 주인공이 되어 보아도 좋을 것 같다. 어디서 누군가 나를 보고 그런 모습에 반한다면 어떨지 모르겠다. 비 오는 날이 좋다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혀를 차던 어른들이 생각난다. 비가 꼭 슬픔은 아닌데 유독 왜 눈물을 먼저 생각하는지 모를 일이다. 비가 좋으면 좋은 대로 좋은 것만 생각하면 그 삶 또한 좋지 않을까. 황사가 있고 환경이 오염돼 비를 맞으면 좋지 않다고들 하지만 그래도 난 비 오는 날이 좋다."
비 오는 날 / 현옥희
언제부터인가 비오는 날이 좋다.
봄 새악시 발걸음처럼 사뿐히 내리는 보슬비가 좋다. 이른 새벽 보슬비가 내리면 포근한 이불 속에서 빠져 나오기 싫은 새댁처럼 아늑함이 그리워진다. 뿌연 안개 속에 얼굴을 내미는 여린 새싹들이 오소소 한기를 느끼며 새벽을 맞는 그 느낌이 보슬비의 느낌이다.
한 여름 애타는 농부의 가슴을 시원스레 적셔주는 장대비도 또한 매력이다.
우악스런 선머슴의 손길처럼 곱지 않은 모습도 간혹 보여지지만 쩍쩍 갈라진 논두렁에 인심 좋은 아낙의 치마폭처럼 메마른 벼들을 감싸주는 후덕함이 좋다. 비가 하루 종일 내리는 날은 시골에서 장떡을 부쳐 이웃 간에 돈독한 정을 나눠 더욱 좋다. 빠알간 고추장에 호박이며 부추며 썰어 넣고 가마솥 뚜껑에 기름을 두르고 부쳐내는 장떡의 고소함이 온 동네에 퍼지면 머얼건히 구들장만 기대고 누워있던 아낙들과 농부들은 막걸리를 들고 전 부치는 집으로 모여들었다. 젖가슴처럼 뿌연 막걸리를 손가락 끝으로 휘휘 저어 한 사발 들이키며 카아하고 뱉어내는 농심에 그 동안 애타던 가슴은 진정이 되었다.
정신없이 오가는 어느 날, 오후 느닷없이 내리는 소낙비도 좋다.
황순원의 소낙비처럼 여리고 아픈 사랑을 그릴 수는 없어 안타깝지만 그래도 소낙비가 좋다. 간혹 우산이 없어 고스란히 옷을 적시기도 하고 피하려고 갈팡질팡하기도 하지만 그 또한 소낙비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영화에선 소낙비 때문에 인연을 맺는 연인들이 종종 생기는데 준비성이 있는 젊은이라면 어쩌면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소낙비 오는 날이 아닌가 싶다. 꽃물이 든 옷을 입혀 달라던 소녀도, 우산 속으로 느닷없이 뛰어들던 어느 여인도 소년의 가슴속에서 소낙비가 되어 적실 것이다. 그 소낙비가 되고 싶다.
해가 뜨다 비가 오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을 여우가 시집간다고도 하고 호랑이가 장가가는 날이라고도 한다. 왜 그랬을까. 어쩌면 여우같이 나타나서 혼을 빼고 사라지는 비가 미워서 그랬을 수도 있고 변덕스런 날씨가 밉기는 하지만 흔치 않은 날이기에 성스러운 동물로 생각하는 호랑이가 장가가는 날이라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그런 날은 운이 좋으면 산등성이에 걸려있는 무지개를 볼 수 있어 좋다.
어린 시절 비가 오는 날이면 툇마루에 걸터앉아 흙 마당에 보글거리던 물방울들이 모였다가 흘러가는 모습을 보며 신기한 여행을 떠나듯 물줄기를 쳐다보던 기억이 새롭다. 그 기억 속엔 어여쁜 색종이 배는 아니었지만 작은 배 하나가 내 꿈을 싣고 빗속의 항해를 떠난 적도 있다. 쓰러질 듯 기우뚱거리다 용케도 앞으로 나가던 그 배가 꿈속에서 맴돌 때도 있다. 어머닌 그런 날 부침을 해서 우리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셨고 낮게 가라앉은 부침 냄새의 고소함이 더욱 기분을 좋게 하기도 했다. 물김치 한 그릇에 부침 한 접시, 옹기종기 모여 앉아 맛있게 먹던 우리 형제의 단란함이 배어있는 추억이다.
옛말에 비를 좋아하면 청승맞다고도 하고 인생이 슬프다고도 하지만 아직까지 내게 그런 징조는 없다. 다만 감수성이 예민해서 지금 이렇게 글이라고 쓰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가랑비에 옷 젖듯 비가 오면 가슴속에 오롯이 피어나는 얼굴이 있다.
내겐 나이 차이가 많은 큰언니가 있었다. 그 언니가 시집가던 날은 하루 온종일 비가 내렸다. 언니는 그 날 무엇이 그리 슬펐는지 거의 통곡하다시피 했다. 어린 동생들을 엄마 대신 돌보던 큰언니는 부엌에 들어가 손때 묻은 솥뚜껑을 어루만지기도 하고 살림이 놓여있던 자리들을 유심히 쳐다보기도 하면서 쏟아져 내리는 눈물을 훔치지도 못하고 가마에 탔다. 멀어지는 동생들과 어머니를 되돌아보며 서럽게 울며 멀어져간 언니의 가마 탄 모습이 가랑비처럼 가슴을 적시다 장대비가 되어 할퀴고 지난다. 그렇게 울며 시집간 언니는 불행히도 사십 고개를 넘기지 못하고 이승을 훌쩍 떠나버렸다. 뒷동산에 핀 아카시아 향내처럼 불현듯 언니가 그리워지는 비 오는 날이면 차를 몰고 목적지도 없이 달려본다. 차창을 두드리며 달려드는 빗방울에 언니에 대한 그리움을 떨쳐보려 하지만 깊게 새겨진 문신처럼 쉽게 사라지지 않아 곤혹스러울 때도 종종 있다. 그런 날이면 한적한 길모퉁이에 서서 한참을 눈을 감고 있다. 지붕을 두드리는 빗방울이 점점 잦아들 때를 기다리노라면 기름 냄비처럼 끓었던 마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평안을 찾는다.
가랑비가 내리는 날은 우산 없이 거리를 거닐고 싶다.
비를 맞으면 안 된다는 딸아이의 성화가 아니라면 바바리코트 깃을 세우고 기분을 내어보고 싶다. 오래 전에 보았던 영화의 ‘카사블랑카의 연인’이 되어도 좋고, 한 번쯤은 가슴 절절한 사랑의 열병을 앓는 여인이 되어 비련의 주인공이 되어 보아도 좋을 것 같다. 어디서 누군가 나를 보고 그런 모습에 반한다면 어떨지 모르겠다.
비 오는 날이 좋다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혀를 차던 어른들이 생각난다. 비가 꼭 슬픔은 아닌데 유독 왜 눈물을 먼저 생각하는지 모를 일이다. 비가 좋으면 좋은 대로 좋은 것만 생각하면 그 삶 또한 좋지 않을까. 황사가 있고 환경이 오염돼 비를 맞으면 좋지 않다고들 하지만 그래도 난 비 오는 날이 좋다.
현옥희 --------------------------------------
《수필과비평》 등단,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한국 문인협회 한국문학사편찬위원, 수비 작가회, 시문회 현대문학 동인회 회원. 서초문인협회 부회장, 시문회 회장 역임, 동포문학상. 수비문학상. 서초문학상 수상, 수필집 《혼자이고 싶을 때》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