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비평 2013년 9월호, HEALING ESSAY] 거짓말하고 뺨맞기 - 김수자
"손맛에다 재료 맛에 느긋한 연륜의 맛과 또 씁쓰레하고 안타까운 추억의 맛이 버무려진 동과박 나물. 착한 어린이 숙제하듯 간장 된장 고추장……을 외고 섰던 새색시 모습이 아롱거린다. 때마다 맛없는 반찬을 먹어야 했던 식구들의 고역인들 또 어떠했을까. 요리에도 거짓말이 있다는 말에 바짝 얼어붙었던 그때가 조금은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거짓말하고 뺨맞기 - 김수자
흉악범 같은 태풍이 서너 개 다녀가고 계속 비가 찔끔거린 데다 연이은 나들이로 코앞의 텃밭에 못 들어가본 날이 근 스무날 째다. 텃밭이 통째 풀밭으로 변해버렸다. 모처럼 갠 날 장화를 신고 낫을 들고 들어갔다가 두 손 들고 철수하고 말았다. 풀이 무릎까지 자라서 풀밭인지 채소밭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예초기로 겨우 풀을 쳐내고 보니 빼빼마른 고춧대와 반쯤 자라다 만 수박 몇 덩이, 들쥐가 파먹다 남긴 단호박 등 봄에 의욕적으로 심었던 채소들의 잔해가 드러났다.
폐허가 따로 없다. 전쟁터를 둘러보듯 텃밭을 돌아보는데 이상한 것들이 눈에 띈다. 굵은 줄기에 연결되어 여기저기 뒹굴고 있는 것은 ‘동과박(동외라고도 부르는)’이었다. 한 아름이 넘는 동과박이 넓적한 이파리 밑에 숨어있다. 대충 세어보아도 예닐곱 덩이가 넘는다. 크기도 크기지만 동과박은 모양이 우스꽝스럽게 생겼다. 호리병이나 도깨비 방망이를 닮은 울퉁불퉁한 생김새가 생경스럽다. 이걸 내가 심었던가? 기억이 없다. 그럼 박이 저 혼자 재주를 부렸나?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났다! 가끔 병원에서 낳은 아이가 뒤바뀐다더니 이런 기분일까?
텃밭 언저리에 박을 심은 뜻은 추석에 박나물을 먹어볼까, 아니면 모양 예쁜 바가지 하나라도 건질 수 있기를, 그도 아니면 저녁에 피는 박꽃이라도 볼 수 있다면 하는 기대에서였다. 추측해보건대 아마도 종묘상 주인이 모종을 잘못 넘겨준 게 분명하다. 모종일 때는 보통 바가지박이나 동과박이나 생김새가 비슷하여 구별이 안 될 수 있다. 박 모종이니 망정이지 아이가 뒤바뀌기라도 했더라면 어쩔 뻔했나. 박 대신 동과박이니 꿩 대신 닭이라고나 할까. 아니 꿩보다 닭이 못 할 것은 또 뭔가. 훌륭한 요리사는 재료를 탓하지 않는 법(그러지 않을까?).
동과박은 나물을 해먹을 수 있다. 박나물은 손질이 귀찮고 양이 많지 않아 귀한 음식에 속한다. 박나물은 시아버지께서 좋아하셨다. 한 덩이를 따다 박나물을 만들기로 했다. 덩치가 워낙 큰데다 껍질이 두꺼워 톱으로 잘라 씨를 파낸다. 삶은 박 속을 긁어내 된장 고추장 참기름 마늘에 붉고 푸른 청양고추를 넣어 조물조물 무치면 끝. 풋풋하고 시원한 맛이 옛날 그대로다. 나는 박나물을 결혼해서 처음 먹어봤다. 나는 결혼해서 처음 먹어본 음식이 많다. 바다와 강이 만나는 지역에 살았으니 생선이나 해조류 외에는 별로 먹어본 게 없는 데다 학교다 직장이다 요리 배울 기회가 없었고, 반찬이라고는 겨우 김치나 먹었던 지독한 편식주의자였다. 편식주의자라니 자칫 귀족스런 분위기가 연상되겠지만 실은 달리 먹을 게 없었던 세대 탓이 맞다. 때문에 시집살이 중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게 음식 만드는 일이었다. 손맛이 어디 하루아침에 생겨나는 건가. 시집온 다음 날, 장독대에 올라 단지 뚜껑을 하나하나 열어보며 간장 된장 고추장……. 하고 외던 일이 기억난다. 못 외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아서 하루에도 몇 번씩 외고 또 외웠다. 첫 추위가 시작되던 무렵이었나. 을씨년스런 날씨만큼이나 몸도 마음도 졸아들던 기억이 남아있다. 결혼해서 1년 동안은 부엌일 도와주는 할머니가 계셨지만 곧 할머니는 떠나고 배운 것도, 아는 것도 쥐꼬리만 한 나는 식사전담이 되고 말았다.
전라도는 의식주 중에서 식食이 가장 발달한 지역이다. 더구나 순천 땅, 내 생각에 시댁 식구들은 모두 식도락가 같았다. 특히 시아버지는 미식가의 수준이었다. 오랜 직장 생활로 남도의 각 지역을 옮겨 다니면서 고급 요리에 길들여진 탓이리라. 시아버지는 식사에 앞서 꼭 시식 평을 하신다. 나물을 한 점 맛본 시아버지께서는 ‘얘야, 거짓말 하고 뺨맞기보다는 낫구나.’라고 말씀하셨다. 거짓말 하고 뺨맞기보다 낫다면 칭찬인가? 꾸중인가? 짜다는 말인지 싱겁다는 말인지. 맛이 있다는 건지 없다는 건지 참으로 애매했다. 어느 날은 꼼꼼하게 따져보았다. 거짓말 하면 뺨을 맞는 거야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것보다 좀 낫다면 안 맞아도 된다는 뜻인가? 긍정인가 하면 부정, 부정인가 하면 아닌 듯하고……. 우리말의 말뜻이 이렇게도 다양하고 함축적인 줄 그때 알았다. 나의 눈과 귀는 오로지 음식 만드는 일에 집중되었다. 5, 6년이 지난 어느 날 나는 거국적으로 음식솜씨를 평가받을 기회가 왔다. 결혼 수삼 년에 요리에는 자신 있노라고 팔도에 자랑해볼 참이었다. 그때가 1980년대 초반이었다. 모 방송국에서 영호남 화합잔치 한마당을 마련한 자리였다. 영남 신랑과 호남 아내가 한 팀 진주 촉석루에서, 나는 경상도 아내와 전라도 남편 팀으로 하동 쌍계사 입구에서, 서울의 방송국과 3원방송이 진행됐다. “경상도 아가씨가 전라도에 시집와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음식 만들기겠는데 어떻게 극복했지요?” 진행자의 질문에 뒤이어 나의 유창한 적응기가 흘러나왔다. 18번 요리도 나열했다. 끝나기가 무섭게 진행자는, “이럴 땐 상대방에게 확인을 해보는 게 공평하겠지요?” 하면서 곧 바로 마이크를 남편에게 넘겼다. 원고에 없는 돌발 상황이었다. 대뜸 마이크를 받아든 남편 입에서, “맛이 아주 형편없어요.”라는 짧은 대답이 튀어나왔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와아 폭소를 터뜨렸다.
그 일로 남편은 3년 넘게 지인들로부터 시달림을 받았다. 아무리 그렇다고 방송에 나가서까지 아내의 음식솜씨를 타박하면 되겠냐. 간이 배 밖에 나오지 않고서야 ……. 뭐 어쩌겠나. 어른이 거짓말할 리는 없고,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했을 뿐인데. 솔직한 것이 뭐 야단맞을 짓인가요? 나는 오지랖 넓은 여인처럼 짐짓 관대한 척 하하하 호호호 웃어넘기곤 했다. 그러나 어찌 유쾌할 리가 있겠는가. 눈앞에 별이 번쩍, 얼굴이 화끈, 뒤통수가 근질근질, 황당 민망, 배신감……. 옳아, 바로 이런 것이었구나. 그때껏 이해 불가였던 ‘거짓말하고 뺨맞기’가 비로소 이해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사코 그보다는 좀 낫다고 했던 시어른에 비하면 얼마나 멋없고 인색한 평인가.
손맛에다 재료 맛에 느긋한 연륜의 맛과 또 씁쓰레하고 안타까운 추억의 맛이 버무려진 동과박 나물. 착한 어린이 숙제하듯 간장 된장 고추장……을 외고 섰던 새색시 모습이 아롱거린다. 때마다 맛없는 반찬을 먹어야 했던 식구들의 고역인들 또 어떠했을까. 요리에도 거짓말이 있다는 말에 바짝 얼어붙었던 그때가 조금은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김수자 --------------------------------------
월간 ≪문학정신≫ 신인상. 신동아 논픽션 최우수상(1990). 수필집: ≪돼지일가≫(1990), ≪낭만산골≫(2009), ≪돼지꿈≫(2009)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