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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9월호, HEALING ESSAY] 개망초 - 권일주

신아미디어 2013. 11. 26. 08:12

"속수무책으로 비오듯 흘러내리는 땀을 닦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콩밭 두렁을 현기증을 느끼며 휘적휘적 지나왔다. 어딘선가 육중한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둔중하게 귓가를 울리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농사를 망친다는 꽃, 나라를 망친다는 누명을 덮어쓴 개망초가 내 인생의 뜰에 뿌리를 내리는 것일까."

 

 

 

 

 

 

 개망초    권일주


   산소로 올라가는 길은 내 가슴께까지 자란 개망초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좁은 외길이어도 누가 보아도 번듯한 길이었는데, 뙤약볕 아래서 목을 길게 뺀 채 고개를 갸웃갸웃하며 시침을 뚝 떼고 있는 놈들 때문에 길은 흔적도 없었다. 길뿐만이 아니라 봉분 위에도 버젓이 서 있고 상석 아랫단을 용케도 비집고 들어앉아 그 긴 목을 삐죽이 드러내고 있다.
   지난 한식에 사정이 있어 내려가지 못했던 성묘길이었다. 내일 모레면 장마가 시작된다는 예보가 등을 밀었다. 서둘러 산적을 굽고 몇 가지 전을 부쳐 일찌감치 집을 떠났다. 올해는 맏동서도 몸이 좋지 않아 찾아뵙지 못했다고 했다. 무거운 발걸음이었다. 벌써 비가 시작되려는 걸까? 차창밖으로 올려다본 하늘은 낮게 드리운 구름이 금방이라도 내려앉을 것만 같았다. 그 낮은 구름 위에 납덩이 같은 내 무거운 마음도 얹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고속도로를 달려와 보니 고향산 부근에는 어느덧 해가 쨍쨍 내리쬐고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어머님 봉분에는 잔디들이 많이 상해 있었다. 꺼칠한 더벅머리 사내아이같이 군데군데 맨흙이 드러나 있는 곳도 있다. 쑥떡에나 들어가야 할 애꿎은 쑥들은 왜 그렇게 무리를 지어 쑥쑥 자라고 있는 것인가, 민망하여 똑바로 바라볼 수도 없었다.
   고개도 바로 들지 못한 채 진설을 하고 절을 올렸다. 그리고는 잘못을 잔뜩 저질러놓고 겁에 질려 도망가는 아이처럼 쫓기듯 내려오는데 개망초 무리들이 자꾸만 발목에 감겨왔다. 조금만 한눈을 팔면 가차없이 나를 고꾸라트릴 태세였다. 산을 거의 다 내려와서야 비로소 몇 가지 꺾어 묶음으로 만들어 손안에 쥐어 보았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좀 전의 눈흘기던 심정과는 달리 한없이 예쁘기만 하다. 밭에 뿌리를 내리면 농사를 완전히 망친다 하여 어떤 이는 이것을 개망초라 부르고, 또 어떤 이는 경술년 국치가 이루어진 해에 흐드러지게 피었다 해서 나라를 망친 망국초라고 부른다지만, 농부도 아니요 애국자는 더더욱 아닌 내 눈에는 그저 작고 사랑스러운 작은 꽃일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여린 것들이 어떻게 그 독한 제초제에도 죽지 않고 살아남아 농사를 망친다는 것일까.

 

   한 손에 작은 꽃묶음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껑충한 키의 개망초들을 헤치며 길을 찾아 나오는 내내 가슴이 물을 잔뜩 먹은 스폰지처럼 먹먹했다. 앞으로의 유택관리가 큰 문제이다. 앞과 뒤, 주위를 둘러보아도 능히 그럼직한 후손도 없다. 집을 떠날 때의 그 납덩이 같던 마음은 바로 이런 생각때문이었을 것이다. 왠지 내 인생 여기저기에서 개망초들이 어느덧 자라나 어제까지만 해도 내가 굳게 믿고 고집하며 가던 길을 헷갈리게 만들고 있는 것만 같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확신을 가지고 가던 길은 분명히 있었고, 그 길은 확실하게 내 눈에 보였다. 그런데 지금은 여기인가 저기인가 산소로 올라가는 길처럼 그 길이 확실히 보이지 않는 느낌이었다.
   답습이라는 말 대신 혁신이라든가 개선, 개량, 그런 말들이 윗자리를 차지하게 되면서 너나없이 자기주장이 강해지고, 그 주장을 절대로 양보하지 않는 것이 미덕인 양 되었다. 앞에도 뒤에도 또 옆에도 그런 사람들뿐이다. 조상, 부모, 자식, 형제, 자매, 그런 모든 낱말들이 자꾸만 저 아래쪽으로 밀려나고 있다. 자연히 조그만 바람기에도 가볍게 허공으로 모두 날아가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비교적 완고한 유교적 토양 아래서 태어나고 자란 나도 이렇게 비틀거린다. 아버지 방을 나올 때면 돌아서는 것이 죄송하여 뒷걸음으로 나오고, 아버지 앞에서는 후르륵 소리날까 봐 국수도 먹지 못했던 바로 내 이야기이다.

 

   사실 나는 본래 길눈이 무척 어두운 편이다. 몇 번을 간 길도 잘 기억하지 못하고 생전 처음 가는 길인 양 하여 주위의 핀잔을 자주 듣는다. 그나마 직접 운전을 해서 찾아간 경우는 나은 편이고 옆자리에 타고 갔거나 뒷좌석에 동승했을 경우에는 긴가민가하기 일쑤이고 어떤 때는 갔던 사실조차 아예 무효로 만들어 버린다. 그렇게 어두운 내 길눈이 한심하게도 내 인생길에도 적용되는가 싶어 마음이 자꾸만 움츠러든다.
   속수무책으로 비오듯 흘러내리는 땀을 닦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콩밭 두렁을 현기증을 느끼며 휘적휘적 지나왔다. 어딘선가 육중한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둔중하게 귓가를 울리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농사를 망친다는 꽃, 나라를 망친다는 누명을 덮어쓴 개망초가 내 인생의 뜰에 뿌리를 내리는 것일까.
   새끼손가락 한마디도 되지 못하는 그 작고 순한 얼굴로 배시시 웃으며, 그놈들이 갸웃갸웃 고갯짓까지 하며 나를 놀리고 있었다.

 

 

 

권일주  ---------------------------------------

   월간 ≪한국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낮에 나온 반달≫, ≪혼자놀기≫, ≪나만의 빈터≫ 외. 번역서: A.R.GURNEY의 ≪러브레터즈≫, Chaco의 ≪천사의 선물≫. 田中佐知의 시집: ≪조용히 바라보는 것, 그건 사랑≫, ≪모래의 추억≫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