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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연구 2013년 여름호, 기획특집 문학과 문학치료] 잃어버린 목소리를 찾아, 참자아를 찾아 떠나는 여행 - 이봉희

신아미디어 2013. 11. 20. 08:14

"치유는 성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아드리엔 리치(A. Rich)는 ‘변화의 순간만이 유일한 詩이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최근에는 문학치료(Poetry Therapy)라는 용어 대신 사람을 변화시키는 언어로서의 문학과 글쓰기의 힘을 포괄적으로 강조하여서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언어예술(transformative language art)’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영어로 변화, 변형(transform)이라는 말은 라틴어의 trans(넘다, 건너다)와 forma(형태, 형상)의 합성어로서 형상을 바꾸다, 새로운 형태를 주다, 또는 변신하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병이나 상처를 고치고 낫게 하는 치유(heal)라는 말이 건강하고 온전한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말한다면 변형(transform)은 애벌레가 나비가 되거나, 연금술처럼 납이 금이 되거나, 또는 종교적으로 새로운 성품과 심성으로 변화되는 것을 말한다. 즉 단순한 복구가 아니라 새로운 존재를 향한 보다 더 적극적인 움직임과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어떤 용어를 사용하든 문학치료는 건강하고 온전한 상태로 회복시키는 치료와 동시에 보다 더 적극적으로 새롭게 변화가 가능한 상태와 조건을 창조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한 언어의 치유적 힘은 문학에 내재한 시적 요소들이 우리의 정서에 미치는 영향력뿐만 아니라 아울러 자기 표현으로서의 시 짓기나 글쓰기라는 창조력이 갖는 변화의 힘 때문에 가능하다."

 

 

 

 

 

 

 잃어버린 목소리를 찾아,

   참자아를 찾아 떠나는 여행      -  이봉희

 

 

 

   내 안의 무엇 꽃이 되고파 온몸을 가득/ 이렇게 못질 해대는가……/불쑥 눈물이 솟는다. 나 아직 멀었다/ 아직 멀었다. (김경미, 「흉터」에서)

 

   나의 입은 문득 사라졌다/ 어쩌면 좋담 (천양희 「너무 많은 입」 중에서)

 

   나는 창조한다, 울지 않기 위해서. (파울 클레)


   왜냐하면 나도 목소리가 있으니까요 (영화, 「킹즈 스피치」 중에서)


   “왜 이렇게 갑자기 눈물이 나지요? 이상하네요. 왜 이러지?” 문학치료 모임에서 가장 자주 듣는 말이다. 조금 전까지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던 참여자들이 함께 시를 읽고, 대화를 나누고 글을 쓰다가, 또는 자신이 쓴 글을 읽다가 갑자기 울컥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당황해한다. 때로는 다른 분의 글/이야기를 듣다가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정말, 왜 이렇게 갑자기 눈물이 날까? 그것은 우리 내면 깊은 곳에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묻어둔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이야기들이 있기 때문이다. 들어달라고, 말하고 싶다고 호소하는 아픔과 상처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 상처들은 수치심, 죄책감, 우울증, 두려움, 상실감, 불안, 공포, 원망 등과 같은 감정적이고 정서적인 아픔들이며 각각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그런 우리 속의 이야기들이 문학치료 시간에 시를 읽을 때 시의 내용이나, 시 속의 어떤 이미지, 하나의 말, 또는 구절을 통해 자극을 받아 깨어나게 되기 때문이다. 
   문학, 특히 시는 내적, 정신적 이미지나 은유를 통해 그것을 읽는 사람의 내면에서 연상 작용을 일으키고 의식적 무의식적 기억과 생각을 표면으로 이끌어내어 반응하게 하는 강렬한 힘이 있다. 특히 일깨워진 기억과 생각을 글쓰기를 통해 서술하는 과정에서 침묵하던 내면의 이야기는 종이 위에 그 목소리를 찾아 숨을 쉬기 시작한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 구절을 빌려서 표현하면 말은 말을 한 그 순간[부터] 살아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참여자들은 당황하게 된다. “이상하네요. 이런 말 쓰려던 게 아니었는데, 왜 중간에 엉뚱하게 이런 이야기가 나오지요?” “이상해요. 다 잊었다고 생각했었는데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을 쓰고 있었어요.” 그런가 하면 고통을 직면하는 것이 힘겨워 저항이 심하기도 하다. 한 나이 많으신 남성 참여자(말기암환자의 보호자) S님의 경우 첫 만남에서 그만 눈물을 쏟으신 것을 부끄럽게 여기시고는 치료사 앞에서 이거 왜 자꾸 쓰라고 하는 거예요, 하고 펜을 던지듯 내려놓으며 화를 내시기도 하였다. S님은 긴긴 투병을 간호하는 보호자로서 자신의 삶에 대한 그리고 환자인 배우자에 대한 분노, 삶에 대한 허무감, 자녀와의 갈등 등 많은 문제로 가득 차서 모임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문학치료가 진행되면서 자신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고 상실과 이별에 대한 감정적 준비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엊그제 교수님과 헤어진 후 소나기가 쏟아지는데 번쩍 깨달음이 왔다. 내가 그 빗속에 갇혀 있더라. 눈물이 쏟아지면서 글쓰기를 한 후 처음으로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차마 털어놓지 못하던 마음속의 분노와 장기간 여러 종류의 암투병을 하고 있는 아내를 돌보느라 지쳐서 미워졌던 아내에 대한 원망을 다 털어놓고 나자 오히려 환자를 다시 사랑하게 되었고 아내가 떠나도 자신이 혼자서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또한 자녀와의 문제도 새롭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 시인 머어윈(Mirwin)은 말한다.

 

   이 연필 속에 말들이 웅크리고 있다. 한 번도
   쓰인 적 없는
   말해진 적 없는 말들이
   숨어 있다.
   .....
   어떤 이야기기에 그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인가? (「쓰이지 않은 말」 중에서)


   우리의 마음이 상처를 입어 갈라져 있으면 소리를 낼 수가 없다. ‘아, 다시 봄이라는데/ 갈라진 마음은 언청이라서/ 휘파람을 불 수 없다.’(황인숙, 「사랑의 구개」 중에서)라고 말한 시 구절처럼 말이다.  문학치료는 ‘휘파람’을 불 수 있도록 상처입어 갈라진 마음을 치유해주는 것이다.
   상처입고 유기당한 어린 시절로 인해 20년이 넘도록 우울증을 앓고 치료를 받고 있었던 B씨는  「외롭지 않기 위하여」(최승자)라는 시를 읽고 ‘그러나 잘 들어 보세요’ 라는 구절에서 이야기의 실타래를 풀기 시작했다.

 

   지금 내 목소리 들리니? 잘 안 들렸을 거야. 나는 소리내어 말하는 법을 잊고 살았거든. 확성기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꼭 확성기가 아니라도 많이 말하고 싶었지? 내가 들어줄 테니 마음껏 이야기해 봐. 너의 어린 시절을, 너의 아픔을 그리고 네가 꿈꾸는 소망들을….이제는 이야기해 봐.
   나는 언제 어디서나 듣고 있다는 것, 언제나 네 곁에 있었다는 걸 말해주고 싶어. 혼자 있는 시간에 너를 만나고 싶었지. 그래서 골목 어귀까지 내려가서 기다렸었지…. 그러나 너는 오지 않았어. 아마도 모퉁이에 기대어 서서 나를 보며 망설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어. 골목길에서 서성이며 기다리는 내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를 마주하기가 힘들었을지도 모르겠어. 매일 너를 기다리는 그 시간, 너도 나처럼 그 모퉁이에서 기다리고 있었을 거란 걸 이제는 알아. 다만, 용기가 없었을 뿐, 나를 영영 만나고 싶어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것을….
   너의 목소리. 발자국 소리 이제 내가 듣고 있어. 그러니 모퉁이에 와 있으면 인기척이라도 내 주겠니? 나는 귀가 상당히 예민해. 그래서 아주 조그만 소리에도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야. 머지않아 모퉁이를 완전히 돌아나온 너의 모습을 보게 될 날이 오겠지. 내 이름을 기쁘게 부르며 달려오는 널 난 뛰어가서 힘껏 안아줄 날이 곧 올 거라 믿어. 그날을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오른다. 한 번에 한 걸음씩 ‘희망’을 선택하며 그 모퉁이를 돌아 나오길 바라. 나는 오직 너만을 기다린다는 것을 꼭 기억해주길. 곧 만나게 되길….
   처음엔 내 이야기를 하려고 글을 썼는데 쓰다 보니 내 안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와서 그 목소리에 반응하며 글을 쓰게 되었다. 감정이 평안해짐을 느끼고 딱딱하게 굳어 있던 감정의 껍데기도 한 겹 두 겹 벗겨짐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B는 이 글을 쓰고 나서 깨달은 점을 성찰하였다.

 

   내 안에 이렇게 만나길 기다리고 있는 ‘나’가 있다는 것에 참 감사했다. 전에는 이런 ‘나’를 만날까 봐 문을 꽁꽁 닫아두고 살았다. 그 문이 얼마나 두꺼운지 아무도 그 문 안쪽에서 나는 소리를 절대로 듣지 못했다. 나 또한 소리가 새어나올까 싶어 매일 그 문을 지키느라 하루를 다 보냈다. 그 소리는 나를 만나고 싶다는 ‘다정한’ 목소리였는데, 나는 그 목소리가 나를 비난하는 목소리일까 두려워 문을 열고 나오지 못하게 단단히 지키고 있었나 보다.
   나를 야단치며 벌주며 비난하는 그 목소리는 바로 엄마의 목소리였다. 나는 이렇게 40을 바라보고 있는 나이가 되었는데 여전히 ‘엄마의 목소리’에 벌벌 떠는 어린아이로 살고 있었다. 엄마의 표정과 목소리에 늘 반응하며 눈치를 보며 살았던 내 모습을 나조차도 구박을 하며 방치해 두고 살았다. 엄마의 목소리에 내가 더 이상 영향을 받지 않고 건강하게 내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살고 싶다. 내 안의 나를 문학치료 기간 동안 기쁘게 만나보려고 한다. 어색하고 힘든 과정일 수도 있겠지만, 예전처럼 숨거나 외면하지 않기로 다짐을 한다.

 

   B는 그 후 문학치료를 통해 자신 내면에 있는 상처받은 어린아이와의 끊임없는 대화를 시도하였고 놀랄 만큼 변화되었다. 세상이 두려워 세상과 단절하고 살았던 B는 집밖으로 나가지도 못하던 우울증도 극복하고 만성위장병도 사라졌으며 이제는 그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

 


 상호작용 문학치료

 

   문학치료는 ‘치료사(촉진자)와 참여자와의 치료적 상호작용(interaction)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문학과 글쓰기를 사용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치료사, 참여자 그리고 문학/글쓰기라는 3가지 요소 간의 상호작용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의도적’이란 문학과 글쓰기를 치료와 성장, 변화를 촉진시키기 위한 ‘목적을 위해’ 사용한다는 뜻이다. 단순한 독서나 습관적으로 쓰는 일기쓰기나, 타인을 의식한 이성적 글쓰기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독자가 치료사의 촉진이 없이 (스스로 선택했든 사서나 상담사가 권유하였든) 혼자서 책을 읽고 감동을 받고 치유되는 경험을 하는 것과 문학치료가 다른 점은 촉진자(치료사)와의 상호작용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점이다. 문학치료사는 그 그룹의 참여자들에게 맞는 문학작품이나 시를 신중하게 선택하여, 그것을 ‘매개’로 참여자와의 감정적 반응과 대화를 이끌어내고, 대화와 글쓰기를 통해 억압된 스트레스와 감정에너지들을 안전하게 해방시키도록 돕는다. 감정의 해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참여자가 그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새로운 성찰을 얻으며 스스로 문제해결과 성장의 길을 찾아갈 수 있게 가이드해주는 것이다.
   문학치료 모임에서는 다른 사람이 말하는 그들의 진실을 듣고 나도 나의 진실을 이야기하게 된다. 어떤 이들에게는 침묵이 그동안 그들을 안전하게 지켜주었을 것이다. 말을 한 후의 결과가 너무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보다 글은 훨씬 안전하다. 특히 은유를 사용하여 ‘감추면서 드러내는’ 시 짓기나 저널쓰기1)는 아주 안전한 목소리가 되어줄 수 있다. 문학치료 모임에서 그동안 말을 할 수 없었던 일들을 글로 쓰고 그 글을 소리내어 읽는 것은 무척 용기가 필요하지만 동시에 치유의 경험이 될 수 있다. 일단 그 위험을 감수하면, 그리고 어떤 비난이나 판단 없이 그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자존감이 자라나기 시작한다.(단, 공유하고 싶지 않다면 절대로 자신이 쓴 글을 발표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문학치료의 역사

 

   인간들은 아득한 옛날부터 피할 수 없는 내적 고통을 치유하고자 싸워왔고 그 한 방법으로 사용된 것이 발라드, 노래, 시 같은 문학과 예술이었다. 한자로 시(詩)라는 말은 언어(言)와 사원(寺)이 합쳐진 말이다. 즉 시는 말과 성스러움, 신적인 것을 합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정신적 고통의 치유를 위해 아폴로 신전을 찾았다. 아폴로가 의신이면서 동시에 예술의 신이라는 것은 언어예술과 의술이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오세아누스는 프로메테우스에게 말(언어)은 병든 마음을 치료해주는 의사라고 말한다. 어떻게 전통적 사회에서 치유가 이루어졌는지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대부분의 치유가 언어의 힘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대 테베의 도서관 정문에는 ‘영혼을 치료하는 곳’이라는 글이 걸려 있었고 스위스의 한 중세 대수도원 도서관에도 ‘영혼을 위한 약상자’라는 의미의 글이 새겨져 있었다.
   치료를 뜻하는 테라피(therapy)라는 말도 춤, 노래, 시와 같은 문학과 예술을 통해 간호하고 병을 고친다는 의미의 그리스어 therapeia에서 나온 말이다. 종교적 제의에서 무당이나 제사장들은 개인이나 부족의 건강과 안위를 위해서 시나 노래를 읊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최대한 즉각적인 효과를 위해 파피루스에 글을 써서 그것을 물(액체)에 녹여서 환자가 마시게 하기도 하였다. 『성서』에 의하면 기원전 1030년경에는 다윗이라는 소년의 시와 음악이 사울 왕 속의 ‘야수’를 잠재우기도 하였다. 역사적으로 기록된 최초의 문학치료사는 1세기 소라누스라는 로마 의사였다. 그는 조증환자에게는 비극을 우울증환자에게는 희극을 처방하였다고 전해진다. 수세기 동안 시와 의학 간의 관계는 명확히 밝혀진 것이 없었다. 미국의 경우 1751년 벤자민 프랭클린이 세운 최초의 병원인 펜실베이니아 병원에서 정신질환 환자들에게 치료 보조수단으로 책읽기와 글쓰기를 사용하고 그들의 글을 출판한 것이 최초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미국의 심리치료의 아버지라 불리는 B. 러쉬(Benjamin Rush)는 음악과 문학을 효과적인 보조수단으로 치료에 사용하였으며 환자들이 쓴 시詩를 자신들이 만든 신문인 『일루미네이터(The Illuminator)』에 싣기도 하였다. 현대에도 문학/시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문제와 아픔을 대면하고 해결함으로써 삶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하고자 하는 점에서 의학과 공통 관심을 가지고 있다. 프로이트는 ‘우리 몸은 시를 짓는 기관’이라고 하면서 ‘무의식의 세계를 발견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시인’이라고 하였다. 의사인 해로우어(Harrower)는 ‘치료사가 존재하기 전 시인이 먼저 존재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치유는 성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아드리엔 리치(A. Rich)는 ‘변화의 순간만이 유일한 詩이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최근에는 문학치료(Poetry Therapy)라는 용어 대신 사람을 변화시키는 언어로서의 문학과 글쓰기의 힘을 포괄적으로 강조하여서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언어예술(transformative language art)’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영어로 변화, 변형(transform)이라는 말은 라틴어의 trans(넘다, 건너다)와 forma(형태, 형상)의 합성어로서 형상을 바꾸다, 새로운 형태를 주다, 또는 변신하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병이나 상처를 고치고 낫게 하는 치유(heal)라는 말이 건강하고 온전한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말한다면 변형(transform)은 애벌레가 나비가 되거나, 연금술처럼 납이 금이 되거나, 또는 종교적으로 새로운 성품과 심성으로 변화되는 것을 말한다. 즉 단순한 복구가 아니라 새로운 존재를 향한 보다 더 적극적인 움직임과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어떤 용어를 사용하든 문학치료는 건강하고 온전한 상태로 회복시키는 치료와 동시에 보다 더 적극적으로 새롭게 변화가 가능한 상태와 조건을 창조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한 언어의 치유적 힘은 문학에 내재한 시적 요소들이 우리의 정서에 미치는 영향력뿐만 아니라 아울러 자기 표현으로서의 시 짓기나 글쓰기라는 창조력이 갖는 변화의 힘 때문에 가능하다. 김지하 시인의 말대로 시를 쓰는 일은 ‘어둠을/ 어둠대로 쓰면서 어둠을/ 수정하는 것// 쓰면서/ 저도 몰래 햇살을 이끄는 일’(「속3」 일부)이기 때문이다. 

 


 문학치료 자료 선정

 

   문학치료사의 교육에서 치료를 위한 문학작품을 선정하는 교육은 문학치료사가 거쳐야 할 가장 중요한 훈련의 한 부분이다. 문학치료사는 치료를 위한 문학을 선택할 때 그것을 어떤 목적을 위해, 어떤 참여자(연령, 문화, 교육, 병력, 개인사 등의 특성을 고려)에게 사용할 것인지, 시나 문학작품의 어떤 점이 치료 시로 적합한지 언어, 주제, 심상 등을 검토하는 촉진(치료)계획서를 작성하여야 한다.  문학치료는 일반적으로 인식, 탐구, 병치, 적용의 4단계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이 계획서에는 그것을 고려하여 참여자와 어떤 대화를 이끌어 갈 것인지, 어떤 글쓰기 유도문을 사용할 수 있는지 등이 포함되어야 한다.(물론 작성한 대로 활용하지는 않지만 반드시 그 준비과정을 거치는 것이 필요하다.)  
   문학치료사는 심리와 상담의 기본적인 교육과 더불어 문학의 이해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며 많은 문학적 자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혹자는 문학은 부작용이 없기 때문에 공인된 자격증이 없어도 문학치료 모임을 이끌기에 무리가 없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문학도 여느 예술처럼 분명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또한 극심한 심리적 외상이나 특정 정신질환을 가진 환자의 경우 뜻밖의 감정이 돌출되어 압도될 수 있기 때문에 글쓰기가 적합하지 않은 경우가 있으므로 전문가(정신과의사)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문학치료사는 참여자가 정신치료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흔히 자신을 RPT라고 소개하는 경우가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그런 칭호를 가질 수 있는 분은 아직 없다. 문학치료전문가(RPT)는 의료전문인 자격증을 가진 공인문학치료사에게 주어지는 칭호이다. 자기 성장을 위한(developmental) 문학치료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문학치료이며 미국이나 영국의 경우처럼 문학치료사나 글쓰기치료사는 임상전문가나 의학전문가의 슈퍼비전 아래 병원에서 환자의 치료를 돕는 보조치료사로 일할 수 있다.
   문학치료에서 사용되는 문학은 교실에서처럼 예술적 가치나 의미보다는 참여자의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한 촉매의 역할에 그 가치가 주어진다. ‘작가가 무엇을 말하는가’보다는  시를 읽는 ‘참여자에게 무슨 말을 해주고 있는가’가 더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치료를 위해 선택하는 문학은 첫째, 그것이 나와 같은 아픔을 경험한 사람과 공감하고 위로를 줄 수 있도록 보편적인 주제를 담고 있어야 한다. ‘나는 고통 속에 있어요.’라고 말하면 ‘나도 그래요.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라고 말을 해줘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때로는 일방적으로 교훈적인 시는 공감을 불러오기 어려운 경우도 있어서 세심한 검토가 필요하다.
   둘째, 그 주제나 표현이 강렬해야 한다. 보편적이라는 것이 진부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시의 특징은 놀라움에 있다. 놀라움이 없다면 ‘마음의 지진’(천양희)이 일어날 수 없다. 따라서 진부한 언어로 된 시는 참여자의 마음속 깊이 숨어 있는 내면의 반응을 이끌어낼 수 없으며 새로운 깨달음으로 유도할 수 없다. 내면의 이야기를 환기시키고 성찰과 깨달음을 이끌어내는 것은 그 주제보다는 그 주제를 전달하고 표현하는 언어의 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표현이 강렬하다는 것은 자극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셋째, 시의 주제가 궁극적으로 긍정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어야 한다. 시의 몇 구절이 희망적이라고 해도 전반적인 내용과 목소리 주제가 부정적이라면 아무리 예술적 가치가 높거나 혹은 공감을 자아낸다고 해도 역효과가 날 수 있다. 가끔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는 사람들이 문학치료 모임을 이끌면서 우울하고 절망적이거나 냉소적인 시를 사용하는 것을 본다. 이런 시들은 일차적으로 참여자로부터 쉽게 감정적인 반응을 불러오는 것은 사실이어서 때로는 참여자들이 눈물을 흘리기도 하기 때문에 그 치료 모임이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우울하고 절망적인 시는 그 너머의 길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은 참여자를 더 깊은 우울과 절망에 빠지게 할 수도 있다. 마치 치료적 목적을 가지고 쓰는 글쓰기인 저널치료와 달리 반복적으로 한탄하고 털어놓기만 하는 일기쓰기가 때로는 우리를 매너리즘에 빠지게 하고 치료와 성장으로 이끌기에는 부족할 때가 있는 것과 같다. 문학치료사는 자신의 기호에 맞거나 자신이 감동받은 시를 선택하기 쉬운데 자료의 선택은 객관적인 기준에 맞추어야 한다.
   문학치료에 사용할 시를 선정하는 교육을 하는 시간, 한 학생이 미혼모 집단에게 사용하기에 좋을 시로 자신이 존경하는 시인의 시를 선정해왔다. 시어가 강렬하고 이미지가 선명하며 전반부의 내용이 미혼모의 절망적인 처지에 공감을 자아낼 수 있기 때문에 선택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시의 결론 부분까지도 희망을 줄 것 같은 햇살조차 ‘시늉뿐이어서’ 미혼모들에게 용기와 생명력의 존귀함을 일깨워주고 역경을 헤칠 희망을 주기보다는 더더욱 그들의 처지를 절망하게 만들 가능성이 높은 시였다. 분명한 것은 예술적으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시였다. 하지만 예술적 가치와 치료시로서의 가치가 얼마나 다른지 증명해주는 사례였다. 
   넷째, 난해하기보다는 이해 가능한 시나 작품이어야 한다. 은유나 상징들이 명확하고 일관성 있으며 통일된 이미지를 주는 시는 참여자로 하여금 자신의 감정과 문제를 명확하고 일관성 있게 인식할 수 있도록 돕는다.
   문학치료 프로그램 중 참여자가 쓰는 글쓰기(시쓰기를 포함)는 잘 썼는지 예술성이 있는지와 전혀 무관하다. 우리가 교육받아왔던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중시하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좋은 글’ 쓰기가 아니라 외마디 소리라도 좋고 두서가 없어도 좋으며,  문법, 맞춤법, 글씨체 등에 대한 어떠한 검열이나 판단이나 비난도 받지 않는 지극히 사적인 ‘감정표현 글쓰기’이다. 어떤 이는 이러한 글쓰기를 토해내듯 쓰는 글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너무나 오랜 동안 이성적인 글쓰기와 그 누구든 독자(자기 자신일지라도)를 의식한 글쓰기를 해왔기 때문에 이런 감정표현 글쓰기나 저널쓰기를 하기가 어렵다. 그렇기에 처음에 치료사는 감정표현 글쓰기를 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안전한 문학치료 모임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오직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아하!’의 순간, 뜻밖의 깨달음이나 자기 성찰이다. 많은 분들이 ‘나는 글을 못 써요.’ ‘문학은 잘 몰라요.’ ‘시는 어려워서 읽기도 겁나요.’라고 염려하거나 반대로 ‘나는 시인이에요.’ ‘수필가예요.’라고 말하는데 문학 치료와 소위 말하는 ‘글쓰기 재능’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많은 경우 글쓰기나 시를 두려워하던 분들이 자신이 쓴 글에서 자신 속에 숨어 있는 시인을 만나고 놀라게 된다.

 


 이야기 공동체

 

   “누군가 내게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이 뭐냐고 물어서 내가 희망이 있다는 증거를 한 가지라도 갖고 싶다고 했어요. 누군가가 나처럼 회의와 절망 속에 있으면서도 희망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건 큰 위안이 돼요.” (필자의 책, 『내 마음을 만지다』에서)

 

   문학은 내가 어떤 외로운 거리에 서 있든 누군가가 이미 그곳을 지나갔고 그리고 살아남았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G. 존슨)

 

   우리 모두에게는 사람들과 소통하고 접촉하려는 지독한 욕구가 있으며 그 절실한 필요를 알아 줄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고통의 시간에 우리는 언어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 고통을 표현할 언어뿐 아니라 우리가 혼자가 아님을 알게 해주는 다른 누군가의 언어를 듣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란 사람 사이에 걸린 창’이며, 시가 없었다면 사람들은 단절된 채 어둠 속에 갇혀 살고 있을 것이라고 시인 도빈스(Dobyns)는 말한다. 우리가 이 광대한 세계에 단절된 혼자가 아니며 이 세계의 모든 존재들에 연결되어 있고 융화되어 있음을 느끼는 것은 우리를 강화시켜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학치료 모임은 항상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공동체의 위로와 자기 자신에 대한 깨달음의 장이 되어야 한다.
   스타호크의 ‘공동체’라는 시는 이러한  공동체 인식을 형성하기 위해 집단 문학치료에서 첫 모임에 사용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시이다.
   30~40대 초까지의 참여자들로 이루어진 한 문학치료 모임의 예를 들어보자. 참여자들 중에는 처음 참여한 분들도 있었고 이미 여러 회기 째 치료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 분들도 몇 분 있었다.  문학치료세션은 우선 첫 만남의 긴장을 푸는 간단한 워밍업 프로그램으로 시작하였다. 그 후 참여자들은 함께 시를 읽었다. 시인 블라이(Robert Bly)의 말을 빌면 ‘시는 처음엔 귀로 듣고 두 번째는 마음으로 [듣기]’ 때문에 여러 번 읽는 것이 좋다.

 

   어디엔가, 이런 사람들이 있다
   말이 목에 걸려 막히는 일 없이
   열정을 가지고 말을 건넬 수 있는 사람들.
   .......
   우리 각자의 힘에 함께해주는 힘.
   우리가 비틀거리면 잡아주는 팔들
   치유의 원, 친구들의 원.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는 그 어떤 곳. (스타호크 Starhawk/저작권이 있어 일부만 인용)

 

   각 참여자는 자신과 동일시되거나 마음에 울림을 주는 어떤 구절이나 단어를 찾아 이야기하였다. 몇 명의 참여자들이 ‘말이 목에 걸려’라는 구절에 반응을 보였고 어떤 참여자는 ‘자유’라는 단어에, 어떤 참여자는 ‘어디엔가’라는 구절에, 어떤 참여자는 여러 단어와 구절들에 모두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치료사/촉진자의 인도에 따라 대화를 나누면서 왜 그 구절에게 이끌렸는지를 더 깊이 탐구하였다.(중요한 것은 이런 모든 과정에서 시의 의미나 주제를 분석하거나, 치료사가 참여자들에게 이야기를 강요하거나, 그들의 말을 판단하거나 혹은 진단하거나, 교훈하거나 하는 것은 절대 자제하여야 한다. 참여자의 반응은 그 무엇이라도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받아주어야 한다.)
   A는 “‘어디엔가’라는 말은 확실히 알 수 없다는 말로 들린다. 어딘가 있을 것이란 가정일 뿐이고 실제로는 이런 곳은 있을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C역시 A의 말에 공감하면서 “공동체를 참 좋아하는데 경험하진 못했다. 아마 내가 매력이 없어서일 거다.”고 말을 하면서 시에서 말하는 공동체를 경험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왜 자신을 매력이 없다고 생각하는지 촉진자가 대화를 이끌어주자 어려서부터 자신이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고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회상하면서 또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지금도 사람들을 만나면 그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해요.” K도 공감하였다. 돌아보니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참 많다고 생각했는데 이 시를 읽으면서 갑자기 그 공동체들은 알고 보면 가면을 쓰고 만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실은 내게 진정한 공동체란 없다고 말하고 싶다.”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심지어 가족들도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기보다는 비난하기 위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고 느낀다.”고 했다. 하지만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든다고 말했다.
   H는 ‘말에 목에 걸려’라는 구절에서 어린 시절 아버지께 말을 하려면 늘 말이 나오지 않고 눈물만 나왔다고 회상하게 되었다. 그리고 치료사와의 대화를 통해 그때 아빠 앞에서 눈물이 나온 것은 “할 말은 많은데 들어줄 것 같지 않아서”였다고 말하였다. “요즘도 대화 도중 눈물이 나올 때가 많은데 그 이유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데 그걸 표현하지 못해서 답답해서 그런 줄로 생각했었어요. 근데 이제 보니 상대가 들어주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 막혀 눈물이 목을 막는 거였네요.”라고 성찰하였다. Y는 같은 구절에서  갑자기 다 해결된 줄 알았던 형제간의 불화가 떠올랐고 억울한데 말이 목에 걸린 듯 그냥 참고 살아야 했던 자신의 아픔을 표현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N은 “‘말이 목에 걸려 막힘없이’ 할 말 다 하고 사는 사람들이 늘 부러웠다. 그런데 문득 이 시를 읽으면서 나도 이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긍정적인 말을 하였다.
   N은 몇 개월 전 문학치료 모임에 나올 때와 큰 변화를 보이고 있는 참여자이다. 그는 세상에서는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는 그 어떤 곳’은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면서 하지만 ”내가 자유로울 때 더 이상 이런 곳을 찾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L은 자신은 ‘자유로울 수 있는 그 어떤 곳’이라는 구절이 마음에 든다고 말하면서 지금까지는 지금 속한 공동체 속에서 나는 내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힘들었는데 요즘은 직장에서 자신이 하는 일 속에서 자기 자신을 찾는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그 이전과 달리 묘한 마음의 자유를 느낀다고 말했다. 그래서 공동체란 혼자이면서도 혼자가 아님을 알려주는 자유로운 곳, 그리고 자신을 찾아주는 거울과 같은 곳이라고 말했다.
   J는 자신이 속하고 싶은 공동체는 사소한 버릇을 알고 있는 친밀한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상대의 필요를 알고 그것을 서로 채워주는 곳이라고 생각한다면서 때로는 싸우기도 하지만 많은 시간 쌓아둔 소소한 추억 때문에 절대 벗어난다는 생각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고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가족을) 묘사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현재 속한 공동체는 자신을 돌에 매달아 끌어내리는 그런 곳이라고 고통을 호소하였다. 얼마 전 있었던 시댁과의 갈등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자유를 느낄 수 있는 공동체는 친정뿐인데 친정에 가서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고 눈물을 흘렸다.
   문학치료 세션에서 참여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공감하기도 하고 때로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시각에 자신의 생각이 수정되기도 하면서 자신의 문제나 생각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들의 문제에, 그리고 삶에 적용하게 된다.
   우울증치료를 받고 있었던 G(여, 40대 초)는 문학치료를 시작한 지 8개월 정도 되었으며 놀라운 변화를 보이고 있다. 약물치료도 중단하였고 각종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뿐 아니라 이제는 책을 출판할 준비를 하고 있기까지 하다. 이날 그는 공동체란 따뜻한 온돌방이어야 한다고 시를 썼다.

 

   공동체는 따듯한 온돌방이어야 한다.
   차가운 냉골에 밀어넣는 곳이 아닌
   따듯하게 데워진 곳.
   그곳엔 나의 몸을 편히 쉴 수 있을
   이불이 기다리고 있겠지.
   이불 위에 혼자 뒹굴거려도 나를 밀어내지 않겠지
   나는 왜 이런 공동체가 없었나?
   ...
   공동체를 생각할 때 부모님이 생각난다.
   공동체를 만드셨지만 공동으로 망치신 두 분
   그곳에선 숨이 막힐 정도로 힘들었다.
   비난과 질책, 싸움과 분노, 폭력과 주정
   이 공동체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두 눈을 감고 두 귀를 닫아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지시대로 움직이고 내 마음을 표현하면 안 되는 공동체
   나에겐 감옥이었다.
   그 공동체는 내가 단 한 번도 원하지 않았던 곳이었다.

 

   G는 글을 읽으면서 많이 눈물을 흘렸지만 동시에 자신이 쓴 글을 읽으면서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문학치료를 하면서 변화되고 새로운 공동체를 찾게 된 G는 자신의 원가족은 아니지만 이제는 새로운 가족으로 ‘내가 필요한 공동체, 나를 필요로 하는 나만의 공동체를 만들었는데, 이제 그 공동체를 가꾸어 가면 되는데 왜 공동체가 없다고만 생각했을까’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다고 글을 썼다.

 

   내가 원하는 벽돌로 다시 기둥을 세우고
   원하는 곳에 따뜻한 온기가 흐르는 온돌방을 만들고
   격려와 지지, 사랑과 희망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곳으로 만들어 가야지.

 

   G는 자신의 글을 읽고 나서 “마지막에 다시 희망의 목소리가 나올 줄은 몰랐네요.” 한다. 아내의 우울증으로 인해 이혼의 위기까지 갔었던 G의 남편인 L은 아내가 읽는 글을 듣고 다시 “공동체를 한마디로 정의하라면 ‘괜찮아, 괜찮아.’라고 말하고 싶다.”면서 아내를 격려했다.
   이 모임에서 누구보다 놀라운 변화를 보인 참여자는 N(여, 30대 중반)이었다. 3개월 전 처음 이 모임에 참가했을 때 그녀는 몇 년 전의 이혼으로 인한 깊은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분노, 낮은 자존감, 외로움 그리고 우울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글쓰기를 통해 그는 걷잡을 수 없이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했고, 그 분노를 맘껏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면서 차차 자신에 대한 성찰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느끼는 버림받은 기분은 이미 어린 시절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발견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학대로 인해 정상적인 대인관계를 갖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기 시작한 것이다. “누군가가 날 조금 덜 좋아한다고 여겨지면 어차피 이 사람도 [우리 부모처럼] 나를 버리겠구나 싶어서 내가 먼저 그 사람을 버리고 떠나요. 지속적인 친밀한 관계를 맺기가 어려웠어요. 그러면서 또 늘 사람들의 사랑을 구걸해요. 그러는 내 자신이 지긋지긋한데 그 사랑받고 싶은 집착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너무 가슴이 허해서요. 나는 죽을 수도 없어요. 이 허한 가슴을 채우기 위해서 살고 있어요.”
   어린 시절의 상처 해결과 재양육, 그리고 긍정적인 자아상과 자존감을 길러주기 위한 프로그램을 통해 N은 다른 참여자들에 비해 더 빨리 어린 시절의 상처를 극복하기 시작하였고 점점 자신에 대한 믿음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어쩌면 N이 초기에 그 누구보다 얽매었던 자신의 분노와 슬픔과 수치심을 더 적극적으로 쏟아내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N은 차차 자기 정체성을 찾고 자존감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N은 그 사이 또 한 번 새로 생긴 남자친구와 헤어지게 되었다. 전과 같이 남자친구의 사랑을 의심하고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는 자신의 성격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N은 전처럼 절망하지 않았다. “‘아. 내가 또 이 남자가 나를 버릴까 봐 과민반응을 했구나.’라는 걸 이번엔 진실로 깨달았어요. 그러면서 ‘전처럼 자책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앞으로는 실수하지 않을 거야.’라는 생각과 함께 이 상황과 나 자신을 받아들이게 되었어요.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이제는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러던 N은 이날 ‘공동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자유’에 대한 글쓰기를 시작하였다.

 

   자유.....
   나는 사실 오늘 실컷 울 준비를, 태세를 하고 왔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곳에 오게 된 후 이 모임에 앉는 순간 난 기운이 펄펄 나고 의지가 강해지고 자유로워진다. 신기하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여기에서처럼 강해지지만은 않겠지만 언제부터인가 삶이 그렇게 무겁고 심각해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두려움과 걱정, 사랑에 대한 목마름, 갈증으로 오아시스를 찾아 헤매는 나를 만나기도 하지만 이제는 이렇게 피식 웃음이 난다. 날 가볍게, 몸도 마음도 그렇게 만들 힘이 생겼다. 서서히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 가능성을 보았다. 나는 내 스스로에게 용기와 사랑을 주고 싶다. 그래야 내가 사니까. 그래야 살아갈 테니까.

 

   아까워라 내 삶들이여.
   지나간 과거도, 현재도, 남아 있는 날들도
   아깝고 소중하구나.
   소중하기에 더 아껴 잘 쓰고
   감사하며 살 수 있는
   인생이 되기를 바란다.  N아,
   살아줘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와주고
   살아있게 해 줘서 정말 고맙구나,
   살아 있어줘서 진짜 고맙구나.
   그대여 그대여 그대여 그대여…
   불러도 불러도 또 부르고 싶은 그대여
   나의 사랑하는 그대여,
   나의 그대.
   나에게 바치는 사랑의 송가로
   내 남은 인생을 바치겠네
   노래하라 그대의 인생을.

 

   그러면서 그녀는 개인적으로는 회사 일, 이별한 남자친구, 외로움 등으로 여전히 현실은 힘들고  괴로워 울 때도 있지만 전과 달리 자신의 내면에서 자생력이 생겨서 내가 전과 달리 아픔에서 ‘튕겨져 나오는’ 기분을 느낀다고 하였다. N이 정확히 표현해준 대로 문학치료는 우리 속에는 누구나 회복력(탄성)이 내재되어 있으며 그것을 언어의 힘으로 일깨워주는 것이라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위의 예에서 보았듯이 문학치료는 우리들의 감정과 느낌에 목소리를 주어서 종이 위로 표현되도록 이끌어주는 일을 한다. 글로 쓰는 이야기는 감정의 해방뿐 아니라 종이 위에 외면화함으로써 자신의 생각과 문제를 거울처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해주고 그 문제를 통제할 수 있게 해준다. 그 결과 극복할 수 있다는 새로운 자신감을 얻게 된다. 촉매로 쓰이는 시는 강력한 심상과 은유를 통해 우리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시를 읽고 글을 쓰는 일은 참여자에게 그들 개개인을 인정해주고 감정적 안정감을 갖도록 해준다. 또한  라이터(Reiter)가 말한 대로 누군가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다는 것은 그 이야기의 생명력을 정당화시켜주고 확인시켜주며 그 결과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삶도 정당성을 확인받는 것이다.

 

   아프지, 그게 진심만으로 살고 있다는 증거야.(마종기)

 

   영혼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외침에 대해 한마디의 대답도 듣지 못하는 것 그것은 끔찍한 체험이었다. (니이체)

 

   무엇이든 망각에서 돌아온 것은 이야기를 찾아 돌아온 것이다(L. Gluck)

 

   엘리 위젤(E. Weisel)은 신은 이야기를 사랑하셔서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사람들의 가슴에는 이야기가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목소리를 가지고 표현되고 싶어한다. 자신의 목소리를 찾는다는 것은 자신 속에 아직도 목소리가 남아 있음을 일깨워주는 일이다. 목소리를 찾으면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보다 명료하게 알게 된다.
   살면서 이 세상은 거대한 병원이고 우리 모두는 환자라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불완전한 존재인 우리는 모두 어딘가 상처입고 아프다. 다만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이성복 시인의 말대로 아픔을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 이제는 아프다고 말해도 좋다. 아픔은 인격적 결함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증거이며 바로 깨어서, 진심으로 살고 싶다는 내 안의 호소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헤르만 헤세도 말한다. ‘내 참자아가 내게 말해주는 것, 나는 그것을 살아보려고 했다.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이제 내 마음속 참자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아라. 그리고 그 이야기들에 목소리를 주어라. 
   ‘사랑하는 이여 잠에서 깨어나라./ 잠든 당신의 가슴에 친절을 베풀어/ 광활한 빛의 벌판으로 이끌어주어라,/ 살아 숨쉴 수 있도록.’(하피즈)

 

 

 

   1) 저널치료(Journal Therapy)에서 말하는 저널이란 일기를 뜻하는 말로, 일상의 기록을 하는 다이어리와 구분하여 ‘문제해결과 성장을 목적으로’ 쓰는 ‘사적인 글쓰기’를 말한다. 사적이란 말은 그 누구의 검열과 비난, 평가로부터 자유로운 자신만을 위한 글쓰기라는 의미이다. 구조화된 글쓰기, 목록시, 보내지 않는 편지쓰기, 집중글쓰기, 인물묘사 등 각 참여자에게 유용한 기법들이 활용된다. 글쓰기, 특히 저널(일기)쓰기 같은 감정표현 글쓰기의 정신적/육체적인 치료적 힘은 저널치료사들뿐 아니라 페니베이커를 비롯한 많은 심리학자들과 의학계에서도 수많은 연구를 통해 계속 과학적으로 입증되어오고 있다.(글쓰기치료에 대해서는 페니베이커 저/이봉희 역, 『글쓰기치료』를 참고하라.)

 

 

 

이봉희  ---------------------------------------
   문학박사, 미국공인문학치료사(CAPF)/공인저널치료사CJF), 나사렛대학교 재활복지대학원 문학치료학과 교수/영어학과교수, 시인. 『내 마음을 만지다: 이봉희교수의 문학치유 카페』의 저자,